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비아토르/양혜원 지음

양혜원 작가에게 진심이 되다.

by 수박씨

2012년에 발간된 [교회언니, 여성을 말하다]에 입덕하고 두 번째 책이다. 결혼 전,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불만도 많았고, 의심도 많았고, 상당한 반항심이 있었던 때, 이 책을 접하고는 그래, 이거였어! 하는 시원함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왜 지금은 왜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지.. 리뷰를 써놨던가 뒤져봤지만 아무 기록이 없다. 다시 읽어봐야 겠다..) 그랬던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바쁘게만 지내면서 그 때의 열의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좋은게 좋은거지 하며 침묵하며 지냈다.


결혼을해서도 나의 페미스러움으로 남편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가장 많이 싸운 주제이자, 지금은 어머님들의 일이 되어버린 '와이셔츠 다리기'는 신혼때부터 골칫거리였다.

결혼 전까지의 우리집에서 '다림질'은 힘이 센 아빠의 몫이었다. 그 무거운 다리미를 들고 구석구석 쑤시다 보면 가녀린 여자의 팔목은 남아나질 않는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고 벌어진 뼈들로 고생하는 여자들에게 다림질이 다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남자는 신혼 때부터 내 뚜껑을 왕왕 열어 놓았다.


결혼 한 달여 전에는 집을 먼저 구하고 대강의 살림을 들여놓고, 남편은 먼저 들어가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세탁기를 돌려달라고 했던가? 그랬던거 같다. 본인은 세탁기도 한 번 안돌려 봤다고 해달라고 했다. 지금 장난합니까? 나도 세탁기 돌려본 적 없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세탁기를 내가 알려줘야 한다니, 기가차서 대꾸도 안했다. 풀이 죽어 남편은 알아서 세탁을 했다.


신혼 때는 매일같이 와이셔츠를 다릴 필요는 없었으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와이셔츠를 입어야 했다. 세탁기와 같은 맥락으로 남편은 다림질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니 왜? 우리집은 아빠가 다림질을 했는데? 그래도 신혼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다림질을 해줬는데, 고상하게 책을 읽으며 남편은 '대충해도 돼~보이는 데만 해줘' 하며 인심을 썼다. 분이 삭히지 않아 더는 다림질을 해줄 수 없다고 공포했으나, 구깃한 와이셔츠를 그냥 입고 나가는 걸 차마 볼 수는 없어, 살림의 우선순위 중 가장 나중으로 미뤄, 억지로~억지로~해주긴 해줬다. 그러다가 아이 셋을 낳고, 출근까지 하다 보니, 다림질은 죄송스럽게도 양가의 어머님이 해주는 처지가 되었다. 정말 죄송하고도, 남편이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건 저를 도와주시는게 아니라, 남편을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런 나의 불만에 남편도 지지 않았다. 그럼 힘 쓰는것, 전구 가는 것, 벌레 죽이는 것 등 너가 부탁하는 모든 일들도 남자의 일만은 아니니 너가 해야하는 것 아니냐, 라는 반론이었다. 여성 평등을 외치면서, 오히려 여성이 우위를 점하는 불평등 아니냐는 거였는데, 일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셋이 되고, 니 일 내 일이 없어지면서, 누가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의미가 없게 각자의 할 일이 태산이었다. 패미니즘으로 가족의 평화를 깨뜨리느니, 조금 희생하더라도 오순도순 웃으며 지내는 게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이었다. 리고 팩트는 각자 조금씩 양보하며 살고 있는게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는 불평등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보수교단에 속해 있는 우리 교회는 아직도 부엌에는 권사님들이, 각종 중요한 일에는 장로님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장로님들의 배후에는 권사님들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성은 배후에서만 힘을 발휘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고, 미래의 청년들이 이런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참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으며, 나는 교회에서 어떤 여성으로 자리매김 해야할 지도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아는 지인과 양혜원 작가의 책이 언급되면서, 첫 책 이후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의 패미니스트로 알고 있던 작가는 6년 여의 공부 끝에, 자신의 이야기는 결국 패미니즘과 만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여성학은 여성들의 경험을 배제한 남성 중심 역사와 학문을 비판해 왔는데, 여성 신학이라고 하는 것마저 믿는 여성들의 경험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그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면, 굳이 그것을 따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또 다른 어느 수업 시간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원이 있는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나마 협상력이 있는 나의 지위—친정에 기댄 어느 정도의 경제력, 어린 시절 해외 생활 경험과 그로 인한 영어 실력, 인정받는 대학에서의 고등교육—를 돌아보면서 모든 여성에게 같은 해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다 가부장제 때문이야”라고 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졌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여성 신학이 이러한 다양한 삶을 다 담아 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들의 삶을 설명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은근히 비판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하는 여성 신학은 결국 여성 신학이라는 하나의 분과일 뿐 그 너머의 사람들에게는 별 설득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성 신학은 여성 신학일 뿐, 그것이 신학의 계보와 풍토를 다 갈아엎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이라는 이질감을 이 예배를 통해 해소하면서, 내가 한국 여성으로서 나를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좀 더 보편적 언어는 역시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독교는 자유주의의 구미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해체된 기독교는 아니라는 좀 더 분명한 깨달음을 이 여행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


작가를 처음 만나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이 셋의 사십대가 되었고, 저자는 가족을 떠나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바뀐 저자의 관점만큼이나 나도 변했는지, 거의 대부분의 의견에 동의했다. 교회가 여성을 억압하기 보다는, 성경으로 인해 여성의 지위가 성장했던 적도 있었다. 단지 더 나아지지 못했을 뿐. 이제는 그 나머지의 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교회의 여성으로서 나의 서사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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