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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씨 Oct 27. 2023

병과 상처는 드러내야 합니다.

유진과 유진, 이금이 장편소설

이금이 장편소설 [유진과 유진]에서 유진과 유진은 동명이인이다. 큰 유진과 작은 유진으로 불리는 두 친구는 같은 상처가 있다. 유치원 시절 겪었던 원장의 성추행 사건. 큰 유진의 부모님은 이 사건으로 입었을 아이의 상처에 사랑으로, 눈물로, 칭찬으로, 온갖 방법으로 구원해 주고자 애쓴다. 반면 작은 유진네는 그 상처를 잊게 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기 위해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고, 그 상처가 아이 잘못인 양 아이를 다그친다. 


그래서 아이들이 상처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었던 큰 유진은 덤벙대고 실수해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과 마주하면서, 우정을 쌓아가면서, 첫사랑의 실패에 눈물도 흘려가면서. 반면 작은 유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주변을 보지 못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넘어지고야 마는, 넘어지고 나서야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아이다.


때로는 오늘처럼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라도 그 속엔 언제나 환히 빛나는 태양이 있음을 의심치 않듯이 엄마 아빠 가슴속에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느끼기 때문이다. -265p
감추려고, 덮어두려고만 들지 말고 함께 상처를 치료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상처에 바람도 쐬어 주고 햇볕도 쬐어 주었으면 외할머니가 말한 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하게 아물었을 텐데. -285p




숱한 아픔 속에서도 성장하여 아이를 낳고 세상과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에게 받았던 사랑이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받고 싶은 사랑은 아니었어도, 부모님이 주려고 했던 것이 '사랑'이었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아이들에게도 주어야 할 것은 남부럽지 않은 교육보다도, 화려한 여행보다도, 엄마 아빠가 주는 따뜻하고 온전한 사랑을 충분히 느끼도록 해주는 일이겠구나 싶다. 자꾸 까먹게 되어 문제지만.


어디선가 음악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그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려 본 적이 없다. 정해진 길을 가는 데는 앞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 길이 죽어라 이자만 갚는 길인지도 모르고서. 나는 지난날의 나를 비웃었다. -172p


지금의 나는 더 넓은 선택지를 보고, 안 해본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해보고 싶은 것들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을까? 학창 시절엔 대학입시에 급급했고, 대학땐 취업에 조바심 났고, 결혼 이후엔 육아와 내 집마련 따위의 응당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몰두하며, 그것이 전부인 줄만 알고 지내는 참 좁게 사는 나를 본다. 당연한 의무들 사이에서 울고 웃으며, 좋아하는 것들을 도전하고 실패하며 살아가긴 했지만, 큰 틀을 벗어나는 삶은 꿈꿔보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의 학생들도 성적표는 없어졌을지라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성적의 압박과 입시의 과정에서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 아이들, 허둥대며 불안해하며 고민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마저도 모른 체 앞만 보고 바쁘게 가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청소년 시절의 문제는 그때에 쉬이 끝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성인이 되어도, 아이를 낳아도,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나를 괴롭힐지 모른다. 많은 심리 치유서가 어린 시절 상처를 찾아 꺼내어 보고, 나라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는 작업을 먼저 하는 것이, 상처를 햇볕에 꺼내어 말려주어야 잘 아물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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