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중학교 시절, 남녀공학이지만 남자, 여자반으로 나뉘어있던 반들이 3학년이 되자, 남녀합반으로 바뀌었다. 시범학교로 정해졌다고 했다. 설렘으로 가득한 3월, 남녀 합반이 되었음에도 어색한 아이들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2 분단씩 나뉘어 쭈뼛쭈뼛 눈치만 살폈다.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은 남녀 짝꿍을 지어주고, 잘 섞일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렇게 다리 놓아주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금세 알아서 친해졌을 거니까.
선생님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금세 서로에게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며 친해졌다. 누가 누굴 좋아하더라는 당시의 가장 핫한 주제였고, 비밀 편지, 쪽지 따위를 돌려가며 누군가의 사랑을 도와주기도 하고, 잘 풀려가지 않는 사랑 얘기에는 따뜻한 위로를 주고받으며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열정 넘쳤던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주말에는 아이들을 모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보내주지 않는 아빠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아빠의 반대로 가지 못했던 친구와 열변을 토하다가, 지금까지 베스트 친구로 남게 되는 인연이 되기도 했다.
우리 아빠 같은 아빠가 또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딸이 학급의 정규 여행이 아닌, 선생님의 개별적 여행에 동참한다고 하면 선뜻 가라고는 못할 것 같다. 그 선생님을 내가 어떻게 믿으며, 아무 안전장치 없이 떠나는 남녀 합반의 여행을 어떻게 보내나. 역시, 나이가 들고 같은 상황이 되어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어쨌거나, 인생의 첫 남녀합반의 경험은 지금도 기분 좋은 설렘으로 기억되는 한 컷으로 남아있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선생님까지도.
성장소설을 읽고 싶어 집어 들었던 [밤의 피크닉]은 중학교 시절의 향수를 불현듯 끄집어냈다. 일본의 한 학교에는 독특한 행사가 있다. 학교 전체의 학생들이 하룻밤을 지새우며 걷는 ‘야간 보행제’다. 1학년, 2학년 때는 도대체 이런 무지막지한 행사를 하는 이유가 뭐람, 하고 생각하지만 3학년이 되면 다시는 이 행사를 못할 것이란 생각에 그리워한다는 ‘야간 보행제’. 그 하루의 일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주인공의 이야기에 따라 전개된다.
주축이 되는 사건은 이복남매의 이야기다. 다카코와 도오루는 이복남매인데, 아빠가 바람을 피운 상대의 딸과 하필이면 같은 반, 같은 학년인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마음에 혼란만 남긴 채 위암으로 죽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인들의 잘못은 아니기에 자식들은 화해를 하는 아름다운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결혼을 한 주부의 입장으로, 내 남편이 딴 여자와 짝짜꿍 맞아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내 아이가 한 반이 된다? 나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식의 입장으로도, 엄마의 입장으로도. 실제로 친한 친구의 아버지도 다른 가정을 꾸려 어린 자식이 있었지만, 친구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으며, 그런 아빠의 혼외 자식과 친하게 지낼리는 더더구나 만무했다. 그런데 한 학년이고, 한 반이라고 해도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가능할까? 아빠의 유전자를 나눠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동질감이 정말로 있을까? 그들은 보행제가 끝나고 더욱더 친밀해졌을까?
같이, 함께 걷는다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이복남매들 조차도 누그러지는 특별한 '추억'은 함께 걸었기 때문이리라. 그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과 생각들. 그 길을 다 지나고 와보니, 그 시간 함께해주었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성숙하진 않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간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 때마다의 추억들이 넘실댄다. 시간 시간을 지내면서는 그때가 즐겁다고 여기지는 못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눈물 마를 일이 없었던 학창 시절, 대입을 앞두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도 가야만 하는 막막함, 대학에 들어와서는 어디든 들어가야 하는 취업 고민에 이르기까지 걱정과 고뇌는 끝이 없었다.
아빠가 보증을 잘못 서 빚을 떠안고 갚아내야 하는 순간도 있었고,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온가족이 쓰러져가는 방 두칸에서 지내야 하는 시절을 보냈고, 그마저도 집이 없어 잠깐 비워둔 집에 살면서 이사를 전전해야 할 때도 있었고, 그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은 아빠는 풍으로 쓰러지고, 엄마는 미싱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는 밑바닥의 삶 한가운데서도, 함께 해주었던 친구 덕에 깔깔거리며 웃는 평범한 소녀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야.
네가 빨리 훌륭한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싶다, 홀로서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잘 알아. 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 물론 너의 그런 점, 나는 존경하기도 해.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155p
다시 십 대의 고민많고, 불만도 많고, 상처투성이였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더 치열하게 울고 생각하고, 읽고 쓰리라. 그리고 함께하는 친구들과 숱한 고민을 껴안은 채로 부둥켜 안고 울고 웃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