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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슈 Jun 22. 2023

삶의 궁극적 목표는 천국?

단테의 신곡 - 알레기에리 단테


단테의 신곡 - 알리기에리 단테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다나구치 에리야 엮어씀, 양억관 옮김


단테의 신곡을 읽기로 마음먹고 나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참 난감했다.

그간 출간된 책의 종류가 너무도 많아서 고전은 특히나 더 선택이 어렵다.

나는 정말 단순하게도 내가 이용하는 온라인 서점에 단테의 신곡을 적은 후 맨 앞에 뜨는 책으로 골랐고, 그 선택은 신곡을 처음 접하는 나에게 딱 맞아떨어졌다. 이렇게라도 단테의 신곡에 대해 조금은 쉽게 만나볼 수 있어서 뜻깊었던 시간이었다.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 단테.

피렌체의 소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박학다식했다던 단테의 역작 ‘신곡’을 만났다.

내가 고른 단테의 ‘신곡’ 책은 의역판 이었다. 옮긴이의 생각들과 일부 내용들이 발췌되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삽입된 생생한 그림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넘나들었다.


사실 단테의 ‘신곡’에 대해서는 주로 ‘지옥’에 대한 부분 위주로 접해왔기에, '지옥에 떨어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히 묘사되고 있는 책일까?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어두운 기운의 책을 읽어내기에 내 심신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선뜻 도전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신곡'은 단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도움을 받아 지옥, 연옥, 천국을 두루 여행하며 경험한 내용을 상세히 그린 여행기라 보면 될 것 같다.


먼저 지옥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디에선가 봤을 법한 다양한 과오를 저지른 죄인들이 지옥의 문을 들어설 때마다 끔찍한 몰골들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옥이라는 곳에서는 아주 세세하게 죄와 형벌의 종류를 잘게 쪼개어 놓은 느낌이랄까. 한편으론 이렇게 다양한 ‘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신문의 사회면에나 나올 법한 기이하고 말도 안 되는 기사들 속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하나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더 격해지고 잔인해지는 과오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데, 이 또한 지옥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무섭게도 닮아있었다. 단테의 지옥편에는 사회에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 관련 기사들에서 봤을 법한 자극적인 기사들 속 범죄자들이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었다.  


단테 그는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사람들의 심리를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 관찰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죄인들의 생각들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을 터. 그는 왠지 풍부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가도 혹시 사이코 패스는 아니겠지?라는 우려까지 들 정도였다. 지저분하고 살벌하고 잔인한 형벌들의 묘사들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지, 덕분에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기는 하는데  무서운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잔혹하다 싶었다.


인간사에서 부릴 수 있는 모든 욕심의 종류는 여기 다 있었다.

우리는 욕심을 부림으로써 한발 한계를 넘어서길 원하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며,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갖기를 원한다. 욕망의 본성은 감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때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닥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과한 욕심에 대한 대가를 달게 받기도 한다.


지옥을 여행하며 깨닫게 되는 것은, 살아가면서 부리는 과한 욕심의 대가는 분명 있기 마련이라는 점.

이것은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 분명히 선택적 혹은 필연적으로 따르는 수순이라는 점이다.


때론 지옥에서 신을 거역한 자들을 만나기도 하며, 단테에게 해를 끼친 망자들도 만난다. 그러나 단테는 그들에 대해 평화를 비는 넓은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그럴 수 있을까.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끔찍한 지옥을 보고 왔기에 그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생겨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단테의 심경에 한번 집중해 보기도 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적에게 의연함을 보일 수 있는가? 나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단테가 여행하는 열개의 형장, 사악한 구덩이들에서는 다양한 잘못을 저지른 망자들을 만난다. 대부분 그들의 욕심이 문제였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윤리적으로 하면 안 되는 것들을 해버린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 많은 죄악들을 저지르고 반성하지만 또다시 반복되고야 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참 어렵다. 한번 죄를 지은 사람이 절대로 반복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단테는 너무 많은 죄인들과 끔찍한 형벌들에  몸서리를 치고 하다못해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기도 하며, 이런 상황이 된 그들에 대해 애통해하기도 한다.


단테는 생각한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면서 또 죄를 저지르는 것 인지. 사실 우리는 그 해답을 알고 있지만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도 다 '욕심'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뉴스 사회면에서는 유난히도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자주 뜨곤 한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여성, 유기견들을 괴롭혀 죽이는 남자, 어린 자식을 먹이지 않고 학대해 죽인 후 발각되자 용서를 구하는 여성, 상대방 탓을 하면서 정신적 이상 호소를 하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들 하며, 기사를 읽다 보면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미개한 짐승도 이렇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이 현세의 사람들이 단테의 신곡에 모두 묘사되고 있었다.


지옥을 지나 연옥으로 들어서는 단테는 그 속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단련받는 사람들을 만난다.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고 스스로 고통을 참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단테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한다.


다양한 잘못들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스스로 그 번뇌들을 깨고 깨닫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었다. 커지는 야망,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개인의 고통들을 한 단계 넘어설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고 중심도 내가 잡고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단테가 연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깨닫는 동안 동행자이자 스승이었던 베르길리우스가 어느 순간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 단테. 문득 스승이 없어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내 그는 지옥과 연옥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가 있는 천국을 향한다. 긴 고통을 지나 깨달음을 얻고 사랑이 가득한 천국으로 향하는 단테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한줄기의 빛이 주는 힘을 만난다.


천국으로 향하면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에 대한 묘사에서 단테의 생각을 공감해 본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 열심히도 아웅다웅 복작복작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테다.

사람들은 고통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때론 과한 욕심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의도하지 않든 그렇든 죄를 짓고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힘든 날들을 견디며 살아가기도 한다.


지옥을 벗어나고 연옥에 다다라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그런 상황들을 극복함으로써 드디어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는 데, 사람들은 막상 본인에게 닥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선한 마음을 갖고 천국을 만날 때에는 이미 많은 과오를 저지른 삶을 살고 반성을 거듭해 깨달은 후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테다.


천국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원초적인 힘을 믿고 ‘사랑’이 충만한 한 줄기 ‘빛’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비치는 한 줄기 빛. 그 빛은 어떤 형태로 나에게 다가올 것인가.

희망? 사랑?


인간이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추구하는 행위들 속에서 '사랑, 슬픔, 고통, 희망'등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을 고르게 잘 배분하여 맞춰가며 살라는 뜻이 아닐까도 싶었다. 그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지, 어떤 감정들을 어떻게 표출해 내고 감춰가며 살아내야 할지 안내해 주는 것과도 같았다.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는 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천국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는 신앙과 신학을 상징한다고 한다. 길잡이를 도와주는 동료, 스승, 현인이 내 옆에 있다면 참으로 복될 듯싶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천국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과 아름다움이 가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행여 또 너무 큰 기대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실망감이 크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 치 앞을 모르겠는 내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감사히 살아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의 궁극적 목표는 천국이라고? 아니다. 나도 그리 독실하지 못한 종교가 있지만 꼭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사실 지옥과 연옥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품었던 '인간의 욕심'을 나도 가져봤던 부분도 있기 때문에 더욱더 초라해진다. 그러나 지옥은 가기 싫다는 것을 보니 앞으로의 인생,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하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우습다. 지옥은 가기 싫다.

나도 사람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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