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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슈 Jul 21. 2023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몇 년 전, 윤동주 시인의 삶을 영화로 표현한 '동주'를 보았다.

강하늘 배우의 열연 덕분에 윤동주시인의 시와 함께 당시의 사회상, 시인이 살아온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생체실험용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처참하게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신 동주시인의 마지막도 알게 되었다.


먹먹했다. 그는 그저 문학을 좋아하고 글을 쓰며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었을 뿐.

독립운동가 정신이 굳건한 피로 물든 독립운동가도 아니었고 그는 그저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문학도였으며 감정선이 여리고 섬세한 작가였다. 그가 쓴 시에 일본인들이 반일감정의 기운을 감지해서 유도심문을 하고 고문을 했다면 그도 그럴 것이, 글에는 한 사람의 당시 살아가는 환경에 따른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나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의 삶이 안타까웠다. 더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후세에 더 많은 감동적인 글들이 많이 전해질 수 있었을 텐데.


오랜만에 들춰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책에서 일제에 대한 감정이 쏙 빠진 윤동주시인의 순수한 짝사랑 이야기부터 신변잡기적인 주제와 사물과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몇 편의 산문들을 접하게 되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지적욕구를 가득 품은 듯한 시도 보았고, 타국의 신화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써 내려간 시 '간'을 읽어 보면서 내 눈에는 그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가득했던 윤동주 청년의 성장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보면 그냥, 일제강점기만 아니었으면, 그는 평범한 한 사람의 문학도였다.

전쟁이, 사상이, 독립운동이 뭔지 잘 알지 못해도 자신의 생각과 살아오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오롯이 글로 표현해 내는 순수하고 감정선이 섬세한 한 청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동주'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여 다시 보게 되었다.

몇 년 전 혼자 느꼈던 감정이 다시 일렁여 책장에서 시집을 찾아 읽어본다.

아들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았다. 창씨개명도 부당하고, 왜 우리말로 된 책을 보면 안 되며, 왜 특별히 죄 없는 사람을 일부러 죄를 만들어 파고들고 유도심문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사람에게 생체실험을 하며 이름 모를 주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는 것인지... 당시 시대상을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아픔과 감정을 아들과 함께 나눈다. 아들도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이의 생각도 들어본다. 작년에 함께 들렀던 윤동주문학관에서 봤던 전시물과 영상을 회상한다.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 때문에,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랬다고. 윤동주 청년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일 뿐이라고. 그는 그저 공부를 하고 싶었고, 문학을 하고 싶었고, 머릿속에 다양한 생각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던 한 젊은이였을 뿐이라고..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에 반해 너는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냐...로.. 결론이 나는 것이 어째 나도 영락없는 K-부모인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윤동주시인이 일본에서 수학한 대학이었다. 당시, 동주 영화를 보고 난 후, 먹먹함은 오래갔었고, 자주 일본을 드나들며 출장과 여행을 하던 터에 교토에 윤동주시인이 수학한 대학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음을 검색하다 발견하였다.

우리 가족은 2016년 7월, 교토 여행길, 도시샤 대학을 방문해 교정 한쪽 구석에 있는 윤동주시인을 기리는 기념 장소에 가서 잠시 추모를 했었다. 아들은 당시 고작 6살이었기 때문에, 이곳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땐 잘 몰랐을 테다. 굳이 이곳을 찾아간 이유, 짧은 추모와 묵념, 비석 앞의 사진과 자료, 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7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 공간의 의미를 블로그에 올렸던 여행 사진들을 들춰보며 아들에게 설명해줘 본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어로 된 동주시인을 기리는 윤동주시비 앞에서, 잠시 짧은 묵념을 하고 교정을 거닐다 나왔다. 동주 시인은 그렇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땅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를 기리는 비석이 일본 대학교 교정에 존재하고 있음에 살짝 국뽕이 차올랐다.(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뭔지 모를 애국심이 벅차오른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어가 반가웠다. 무려 2016년이다. 지금은 또 어떤 물건들과 어떤 꽃이 동주시인 비석 앞에 놓여 있을까.


비가 온 다음날 살짝 물기를 머금은 시비 앞에 자료들은 세심하게도 코팅이 되어 있었다.


저 통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메모 한장이라도 남겨서 넣어두고 올껄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비석앞 작은 잔술에 한잔의 술을 따랐어도 괜찮았을 터.








간  -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카프카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시인의 시 중 '간' 시를 몇 년 전 설민석선생님의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게 해석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다루어 인상 깊게 봤던 적이 있다. 윤동주 시인도 그리스신화에도 심취해 있었던 것일까. 고전은 시대를 넘나드며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는구나 싶었다.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코카서스(카프카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그 간이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었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토끼전 설화와 함께 섞여 글 속에 묻어나 있다. 윤동주시인의 외국 신화에 대한 탐닉,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고 덕분에 카프카스를 찾아보기도 했다. 카프카스는 현재 러시아의 코카서스 지방이라고.  우리나라 설화와 러시아의 산, 그리고 그리스 신화가 함께 공존하는 '간' 시가 인상적이었다.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감내하는 당시 우리나라 혹은 동주시인의 고충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감내하고 있는 설움을 이 한 문장 속에서 경험해 본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람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너무도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는 어지러운 나라의 상황 속에서도 멀리 자식을 유학 보내준 부모님에 대한 마음, 나라가 이 모양이고 살기 힘든 속에서도 시가 써짐에 대한 시인의 부끄러운 심정, 무언가 침전하고 있음을 감지하는 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안함도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타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고국을 떠난 유학생으로서의 고충도 느껴지고, 눈물과 위안으로 자신을 다독이는 슬픔도 느껴진다.  '침전'이란 단어가 내가 고른 두 시 속에 등장했다는 것에서도 새로웠다.

윤동주시인의 시 속의 '침전'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처음 접해본 윤동주시인의 산문도 새로웠다.



P128...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없을 듯하다....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순도순 이야기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러운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 준 자리를 지켜 무진 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산문 '별똥 떨어진 데'에서, 윤동주


나무라고 행복하기만 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늘 좋은 일만 있으란 법이 없겠지. 나무도 오히려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하기에 훨훨 너른 세상으로 가지도 못하고 한 자리에서 여러 자연 현상들과 인위적은 상황들을 견뎌가며 우뚝 서 있을지도 모르기에. 사람이든 사물이든 남의 속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단지 상상만 할 뿐. 남의 떡이 다 커 보인다. 그런 것이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 알려진 몇몇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픔이 느껴지는 유명한 시들 이외에 다양한 주제로 써 내려간 시들, 산문들을 읽으며 폭넓은 시인의 감정선과 환경의 영향들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글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살아있는 동안 내가 처한 상황, 환경의 영향에 따라 생각하는 것과 써 내려가는 글들이 다양하고 또 모두 다르겠지.

적어도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마음껏 글을 쓰도록 해야겠다.

우리의 글이 또 누군가에게 역사가 되고 자료가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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