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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슈 Jul 26. 2023

출근길 관찰자시점

다양한 삶, 다양한 사람들



아침 8시 반, 규칙적으로 집을 나서면 대략 8시 35~45분 사이에 도착하는 N번 버스를 타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귀에 콩나물 에어팟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을 주시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간, 나는 차근차근 주위를 둘러본다.


길에 학생들이 많은 시간이다. 조금 있으면 지각이니 발 빠르게 걷는 중고등학생들의 등굣길을 마주한다. 도착하는 버스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내린다.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들을 보면서 내 아들의 몇 년 후를 상상해 본다. 말랑한 아가였던 아들이 키가 훌쩍 크고 입가에 털도 나고 늙수그레 , 목소리도 변성기가 와서 굵고 낮으며 갈라진다.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모두 내 아들 같고 예쁘다. 대한민국 입시지옥에 빠져있는 청소년들이라 하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우정을 나누고 꿈을 찾고 학교생활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테다. 다만 많이 놀 수 없다는 것이 안쓰럽고, 놀면 안 된다는 것을 K중고등학생들은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다.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닌 것 같은 아이들의 매일매일.. 공부와 문제집, 학원과 산더미 같은 숙제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나름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며 버텨내겠지. 우리도 그렇게 컸지만, 인생은 늘 정답이 없더라. 무엇이 맞는 것일까.




맞은편 다이소에는 주 몇 회 이 시간에 물건이 들어오나 보다. 큰 트럭에서 물건을 내려주면 아주머니 직원분들이 삼삼오오 나와 짐을 나르기 시작한다. 다이소 오픈이 10시니까 1시간 전부터 물건을 들여오고 정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거래명세서를 꺼내 대조하는 직원분도 있고, 일사불란하게 물건을 들고 매장으로 들어가는 직원들이 바지런함이 느껴진다. 활기차다.




버스정류장 뒤 H마트에서 기운차게 틀어놓은 90년대 댄스가요를 들으면서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저 마트에서 아침 오프닝 노동요를 선정을 하는 직원은 아마 내 나이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터보의 '회상', 어느 날은 H.O.T의 '캔디', 어느 날은 영턱스 클럽, 코요테, 쿨,,.. 추억의 가요 총집합이다. 재미있다. 아마 이 시간,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대부분의 연령대들은 잘 모를 곡들을 들으며 혼자 즐겁다. 내 머릿속엔 이미 그때로 타임슬립해서 노래에 얽힌 학창 시절, 대학시절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90년대 댄스곡이라니!




몇 주 전부터 보이는 여자분이 있다. 내가 탄 다음 정류장에서 탑승을 하는 그녀는 큰 키에 화장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 젖은 머리, 약간 어눌한 듯 구부정한 자세로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 그저 창밖을 보거나 무표정상태로 있다가 내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함께 내린다. 그녀는 또 내가 갈아타는 버스를 함께 갈아탄다. 어디에서 내리는지는 알 수 없다. 갈아타는 버스에는 사람이 엄청 많이 타기 때문에 나 역시도 사람 관찰을 포기해 버리니까. 오늘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 표정에 구부정한 자세와 걸음걸이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혹시 어디가 아팠던 것일까. 몸이 좀 불편해 보이는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하는 그녀다. 매일의 출근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거의 매일 보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있다. 이 여학생을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관찰을 해왔다. 표정 없이 굳게 다문 입술, 매부리코 느낌의 높은 콧대, 정갈하게 빗어 넘긴 중단발머리, 단정한 교복매무새, 자그마한 체구, 그리고 야무져 보이는 행동과 다르게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

이 학생은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나와 함께 N번 버스를 탄다. 처음에는 이 여학생이 특별한 줄 몰랐다. 그냥 수많은 교복 입은 학생들 중 한 명이려니 싶었다. 그런데 학생이 하는 좀 특이한 행동에 눈길이 갔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가 저 멀리에서 보이기 시작하면 이 여학생은 바짝 정류장 앞으로 나아가 팔을 쭉 뻗고 서 있는다. 행여 버스가 자신을 지나쳐갈까 봐 보이는 제스처인 듯, 힘껏 팔을 쭉 뻗고 버스가 바로 앞에 설 때까지 줄곧 그렇게 서있다. 버스를 탄다. 정류장을 몇 개 지나고 여학생이 내릴 역에 다다르면 미리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고 버스 카드를 찍고 큰소리로 외친다.


"기사님 내릴게요."


기사님이 대꾸를 하지 않는다.


"기사님 내릴게요." 두세 번 더 반복해 말한다.


기사님은 귀찮은 듯, "학생, 아유.. 벨 눌렀잖아요. 뭐 자꾸 말해..."


"네.."


여학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버스는 정류장에 잘 도착했으며 학생은 내렸다. 그리고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당차게 걸어간다. 마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빠르고 잰걸음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안쓰러웠다.

보통의 기사님이라면 벨이 울리면 내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하차 준비를 하시기에, 승객이 굳이 내리겠다고 말을 하는 이런 상황이 어색할 수 있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 여학생의 약간의 전투적이고 강하고 크게 말하는 말투에서는 약간의 강박감과 불안함이 느껴졌다. 약간 듣는 이가 불편할 수 있을 정도의  불안감이었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학생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늘 팔을 번쩍 뻗어 버스를 세우고, 내리기 전 벨을 누른 후에도 "기사님 내릴게요."를 외친다. 한결같다. 몸에 배었나 보다.

혹시 버스가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내리려고 벨을 눌렀는데도 기사님이 깜빡하고 정류장을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부모에게 이렇게 하라고 배워서일까...

요즘은 방학중일 텐데 사복을 입고도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탄다. 그리고 내리는 정류장을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린다. 매일 공부하러 가는 곳이 방학이라 달라졌나 보다. 그리고 여전히 팔을 뻗고 "기사님 내릴게요."를 반복한다.


무엇이 이 여학생을 이렇게 강박감이 느껴질 정도의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까. 성향이 그런 것일까, 환경적 요인이 있었을까. 타인이지만 매일의 관찰을 통해 여학생을 보고 있자니 살짝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청소년을 키우고 있다 보니 부쩍, 요즘 청소년들의 생각과 행동에 관심이 많아진다.

이 여학생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조금 여유를 갖고 살아도 괜찮아. 행여 버스가 지나가도, 다른 방법이 있고, 정류장을 지나쳐도, 다음 정류장에 내려서 가는 다른 방법도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마음, 잘 아는데 사실 살아보니 그렇게 완벽하게는 절대 살 수 없더라.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거든. 최대한 오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그게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거나 남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거든. 조금 내려놓아도 실수해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렴. 그래도 참 좋을 나이 아니겠니?.."


꼰대 같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까지 오지라퍼는 아니기에 직접 말을 건넬 위인은 못된다. 그저 관찰에서 그치고, 생각하고 글로 토해낼 뿐이다. 그리고 내 아들을 돌아본다. 아이들 각자는 천성적 혹은 환경적으로 몸에 익숙해져 있는 습관들이 있을 테다. 그런 기본적인 생활습관들은 가정에서 길러질 터. 물론 일부는 학교생활이나 다양한 환경을 통해 익힐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주양육자이 부모를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아들이 조금은 유연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게으름이나 한량과는 다른 느낌이다. 타인의 삶과 태도도 이해할 줄 알고, 승부욕이 있어 끈덕지게 뭐든지 잘 해내면 좋겠지만, 행여 그것이 아들을 힘들게 하거나 주위를 힘들게 한다면 잠시 한눈을 팔아도, 여유를 가져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들이 요즘 정치인의 성대모사에 재미를 들렸는데, 모 정치인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종종 따라 한다.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있지만 한편으론, 이 말은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A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사고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A가 될 때까지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A도 되고 B도 될 수 있고, A가 틀릴 수도 있고 B가 틀릴 수도 있다. A와 B가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처음엔 맞았다가 나중에 틀릴 수도 있다. 즉,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세상이 있음을 우리는 직접 깨닫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출근길 관찰자 시점에서 몇 달간 들여다본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모습들은 다채롭다.

이 매일의 출근길도 언젠간 끝이 있을 테다. 나도 그렇고 이 사람들도 각자의 삶 속에서 또 매일매일을 살아가겠지.


나는 앞으로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출근길을 맞이하게 되려나.

다양한 삶이 있음을 다양한 일을 함으로써 느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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