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습했던 여름, 장마와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여름을 맞이했다.
지난 주말, 부산행..
구정 이후로 뵙지 못한 시부모님을 뵈러 부산에 다녀왔다.
5월에 가려고 했지만 사정이 생겨 남편만 다녀왔고, 8월 초에 가려고 기차표까지 끊어두고 나서도 시부모님께서 코로나 감염에 아버님은 폐렴까지 겹쳐 병원에 입원까지 하셔서 남편만 다녀왔다.
나는 주말마다 강의가 있기에, 이틀연속 강의 없는 주말을 찾아 움직이려다 보니 이제 남은 날짜는 8월 마지막주 주말뿐.
'한 달 후에 추석인데? 그냥 좀 있다가 추석 때 가면 되지 않을까? 기차표도 세 명이 움직이면 비싼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지지난주 부산에서 건강이 안 좋으신 아버님을 코로나병동에서 며칠간 간호를 하고 온 남편에게 미안하고 부모님이 걱정도 되어 이번에는 꼭 뵈어야 할 것 같았다. 곧 추석도 있고 갈까 말까 고민하는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나 8월 마지막 주말에 강의 없어. 가자."
새벽부터 움직여 부산행 아침 8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태생 며느리인 나는 시댁이 부산인 것이 나쁘지 않았다.
부산남자와 결혼한 지 벌써 16년 차. 1년에 못해도 부산을 최소 2번 이상 드나들면서 부산은 시댁이지만 서울사람인 나에게는 맛있는 먹거리와 푸른 바다가 있는, 가볼 곳이 넘쳐나는 화려한 관광지였다. 16년이 지나도 부산은 매번 다르고, 변화무쌍하다.
명절에 부산에 간다는 것은, 최근 새로 생긴 카페나 맛집, 관광지를 한 두 군데 들르는 재미도 있고, 가족들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멋진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자갈치시장에서 떠온 산처럼 쌓인 활어회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도 하니 늘 즐거운 생각을 가득 안고 떠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실 가는 동안 마음이 마냥 편치 않았다.
아버님 건강이 올해 초부터 안 좋아지셔서 남편이 연차를 무리해서 쓰고 두 번이나 부산에 내려가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게 해 드리고, 챙겨드리고 급기야 코로나병동에 함께 들어가 간병까지 한 터였다. 남편이 이러는 동안 멀리서 찾아뵙지 못하고, 마음은 쓰면서 두 발만 동동거리고 있던 나는 착잡하기만 했다.
"아버지 거동이 불편하셔서 외출은 힘들 거야. 네가 가보면 알 거다."
부산에 간다는 들뜬 마음은 내려놓고, 부모님을 뵈러 가는 마음이 무겁고 죄송하고 두렵고 그랬다.
아버님.
조용하신 성격에 선한 인상, 조곤조곤하신 말투, 뭐든 다 맛있다고 좋다고 잘 드시고, 무엇보다도 소소한 걱정이 참 많으신 아버님이시다.
힘들게 돈 벌어 이런 거 사 오냐며, 이거 비싸지 않냐, 사돈은 편안하시냐, 안부 전해줘라, 어디 외출할 때면, 소지품 챙겨라 가스 잠겄냐 전기 코드는.. 등등.
그래서 늘 분주하게 두 눈은 손주들 안위를 살피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가져다 준비를 해주시고
소소한 일상 속 챙겨야 할 것 걱정할 것들이 참 많고 분주하셨던 아버님이셨다.
최근 3개월간 갑자기 아버님이 앉았다 일어서시면 어지러워 쓰러지셔서 다치는 일이 생기고, 급기야 혼자 외출이 버거워지기 시작하셨으며 엘리베이터를 타시면 어지러워 주저 않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코로나에 걸리신 후 폐렴증세로 인해 호흡이 안 좋아져 입원까지 했다가 퇴원하시고 얼마 안 된 터.
'기립성 저혈압'이라고 했다.
몇 달 만에 뵌 아버님은 부쩍 수척해지시고 마르시고 염색을 못하셔서 하얘진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춤주춤 서서 우리를 맞이하시며 늘 그렇듯 꼭 안아드리고 손을 잡아드렸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아들이 이만치 컸으니 말 다했지.
어머님.
문득, 나는 같은 여자로서 어머님이 걱정되었다.
배우자의 병은, 남은 배우자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어머님은 몇 달 전부터 간병 자격증 학원을 다니기 시작, 시험도 치고 실습도 다녀왔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게 되면서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이번 시험에는 비록 떨어졌지만 9월 초에 다시 시험을 치를 거라고 하신다.
어머님은 굉장히 활동적이시고 생활력이 강하신 편이시다. 주민센터에서 하는 노인공공근로도 신청해 찾아 나서서 하시고, 지인분 토마토 밭에서 일해보시거나, 어린이집 조리사보조를 하시기도 하고, 노인복지관에 다니면서 탁구도 치시고 등산도 다니시고 한마디로 가만히 못 있는 활동적인 성격이셨다.
그러던 어머님에게 지난 몇 달의 시간들이 어떠셨을까는 감히 상상만 해볼 뿐, 집에서는 아버님이 계시니 가족들 모두 조금씩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부산에서의 이튿날 아침, 도련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고, 특별한 일정이 없는 일요일을 맞이했다.
부산사람인 동서가 부산에 오면 카페투어 좋아하는 나에게 근처에 새로 생긴 베트남처럼 꾸며놓은 카페가 있다며 주소링크를 쓰윽 보내주었다. 코로나 이전에 도련님 가족은 시부모님과 함께 다낭여행에 다녀왔던 터였다.
"어머님~우리 여기 다녀올까요? 다낭의 추억도 떠올리시면서! "
"그래! 좋다! 가자! "
처음이었다. 시어머님과 둘이 카페에 나선 것은.
말수가 많지 않으신 어머님인데 왠지 집을 나설 때부터 수다를 풀어내시기 시작하신다.
카페에 도착해 어머님은 망고스무디, 나는 코코넛스무디와 베트남스타일의 카페라서 반미샌드위치가 있길래 주문을 했다.
카페가 독특하고 예뻐서 여기저기에서 어머님을 담은 사진을 찍어드리고 2층 조용한 자리로 이동했다.
어머님이 하고 싶으신 말이 많으셨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간 아버님을 간호하면서 있었던 집에서는 못다 한 말들을 쏟아내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버님의 상태의 변화로 시작해서, 밤마다 잠을 못 이루시며 아버님의 거동을 돌봐야 하는 것,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는 것 마저도 이제 힘들어져서 소변을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해프닝에 주위에 친구 남편이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져 머리를 다치신 후 조금 있다가 돌아가신 사연까지..
아버님 험담도 하다가, 화도 내시다가 하소연하시다가..
결국 대화의 끝자락, 어머님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셨다.
어머님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주섬주섬 티슈를 찾았다.
꾹꾹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가시던 어머님.
나는 아무 말없이 쭈글 해진 어머님의 작은 손을 잡아드리고 쓰다듬어드렸다.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어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도 처음이었고 어떤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지난 3개월간 나도 많이 단단해졌데이. 앞으로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테고."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서 우리 둘은 한참을 그렇게 티슈로 눈물을 훔쳐내기 바빴다.
"나는 훨훨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이제는 안될 거 같아. 나는 이제 끝났지 뭐. 아버지 혼자 두고 못 돌아다니지. 가끔 시장에 나가거나 이렇게 나오면 그렇게 숨통이 트이고 좋을 수가 없어. 공부하러 학원에 나와 수업을 듣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가도 앉아서 공부하고 하는 시간이 너무 좋더라. 행복했어. "
나는 어머님의 여린 어깨를 감싸고 등을 쓸어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주 부산에 올 수 없는 서울며느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머님의 하소연을 들어드리고, 드실만한 먹거리들을 택배로 보내드리는 정도일 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무거운 감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