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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슈 Jan 08. 2024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 마련


연말을 어떻게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지 모르겠다. 벌써 1월이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새해계획은커녕 몸과 마음, 주변, 하다 못해 다이어리정리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정신없는 1월을 맞이했다.


내 일의 특성상 3개월 전부터 3개월 후의 강의 일정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기에, 연말 마지막 일주일을 과감히 강의를 빼고 쉬자고, 여행을 가자고 남편과 휴가를 맞췄다. 12월 스케줄을 보면 비록 크리스마스이브까지 강의 일정들이 빼곡했지만 이 모든 것을 소화해 낸 후 ‘나는 떠날 거야!’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고된 강의 일정을 버텨냈다.

하지만 미리 여행계획을 세워야 하는 나에게 6학년의 삶이 너무도 즐거운 아들이 본인은 12월 29일에 하는 졸업식에 참석해야 하며, 그전에도 계속 학교를 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솔직히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 유치원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체험학습을 써내고 당당히 떠났다. 물론 다녀와 보충은 네 몫이라며 아이에게 책임을 떠넘기긴 했지만, 여행에서 얻는 또 다른 가르침을 위해서라면 아이도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주, 그리고 졸업식은 포기할 수 없겠지 싶어서 졸업식 전에 며칠 다녀올까? 졸업식 이후에 갈까?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으나 도저히 연말 3박 4일 일정의 스케줄로 갈만한 여행지의 평소 대비 부쩍 오른 비행기값과 숙박비에 혀를 내둘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떠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연말 긴 일주일의 휴가 동안 뭘 하지? 하다가 아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가까운 호텔에서 호캉스나 할까? 하고 뒤지기 시작했다. 뒤적거리다가 굳이 30만 원 돈을 1박 호캉스에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냥 접기로 했다.


정신없는 크리스마스 시즌 출강하던 모든 센터들의 수업들을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강의를 하고 시동을 걸고 달리는 차 안에서, 피곤에 찌든 몸과 감겨오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송을 들으며 돌아오는 길. 그래도 입가에서는 배실배실 미소가 흘러나왔다.


“와! 끝났다! 놀자 놀자!.”


집에 돌아오니 이미 시작된 긴 휴가를 맞이한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삐질 삐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여보 올해도 고생했어 푹 쉬고 놀자 맛있는 거 먹자~!”


“그래 그래 우리 둘 다 올 한 해 고생했어 수고했어!.”


서로를 토닥이며 외식을 하고 노래방을 가고 오락실에서 펌프도 하고 셋이서 신난 휴일을 만끽했다.

평일 우리부부의 휴일, 아이는 학교에 갔지만 결국 쉬는 평일에 하는 것은 늦잠 자고 자동차 수리 맡겼다 찾아오고 장보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뭐 그런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봄학기 강의 계획서를 넘기라는 각 센터들의 성화에 봄학기 스케줄 정리를 하다 보니 평일의 황금 같던 휴가 며칠은 후딱 지나 아들의 졸업식 전날을 맞이했다.

꽃집을 하는 친구네에 아들 졸업식 꽃다발을 주문하고 픽업 시간도 확인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여할 생각으로 연말 휴가도 미리 낸 우리 부부의 계획대로 착착 돌아가는 듯했다.


연말에 너무 먹은 듯해서 아침 일찍 운동을 나섰다. 정리를 하고 나오려는 찰나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할 말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다. 그냥 말하라고 하는 나에게 안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 조용히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작년 중반부터 부쩍 건강이 쇠약해지신 시아버님이 떠올랐다..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당신은 부산으로 당장 내려가라고, 떨리는 손으로 기차표를 검색했다. 연말에 여행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SRT는 이미 매진이고 KTX가 겨우 몇 석이 남아 있었다.

남편은 아들 졸업식이 걸려하는 듯했으나 지금 그게 문제냐고. 어서 가라고 하고 나는 내일 아들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뒤따라 가겠다고 했다.

그를 보내고 잠시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었다.


“자,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곧바로 다음날 떠날 기차표를 검색하는데 모두 매진. 어쩔 수없이 버스를 보는데 겨우 오후 출발하는 버스표 2장을 구해 결제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 아니야, 아직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함께 할 남편이 없게 되니 근처에 사는 친정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졸업장 강당이 협소한데 학생수는 많은 학교다 보니 하객들은 모두 서서 졸업식을 봐야 한다는 말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선뜻 모시기 그랬었지만 아빠와 동생, 그리고 올해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동생의 막내 조카 녀석이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주었다. 무려 250명, 9반의 6학년 졸업생이 한 명씩 단상에 나가 교장선생님께 졸업장을 받고 난 후 인사를 하고 후배들의 영상과 졸업식노래로 간단하게 끝나는 식순이었지만, 졸업장 받는 시간이 너무도 길긴 길었다. 계속 서있어야 하니 연로하신 아빠나 꼬맹이 조카 녀석이 힘들 것은 뻔한 일, 그래도 아빠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아빠의 다섯 손주 중 세 번째 손주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끝까지 함께 해주셨다.

할아버지가 사주시는 짜장면을 먹고 축하를 받고 헤어진 후 집에 돌아와 주섬주섬 부산에 갈 짐을 쌌다.

버스 시간이 다가오자 엄마아빠가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셨다. 잘 다녀오라고. 손주에게 휴게소에서 엄마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까지 쥐어주고 보내주신 엄마 아빠의 따뜻한 마음을 아들은 느끼려나. 내가 느껴보지 못한 조부모가 주는 사랑을 말이다.


연말이라 해돋이를 부산에서 보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버스 역시 만석이었고. 차가 상당히 막혔지만 우리는 어두운 버스 안에서 잠을 자고 또 자고 잠병 걸린 환자처럼 계속 잠만 자다 보니 어느새 부산노포터미널에 도착했다.

남편이 도련님과 함께 터미널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의 상황이 좋지 않고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모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면회도 되는 요일이 정해져 있다 하여 뵐 수도 없었다.

부산집 아파트에 도착해 도련님이 우리를 내려주고 주차를 하러 간 찰나, 부모님 댁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부모님 댁 주차장에 내리면 아들이 어릴 때에는 차를 끌고 부산을 내려갔던 우리 가족이 걱정이 되어 올 시간쯤이 되면 1층에 나와계시거나, 17층에서 빼꼼히 내려다보고 계셨던 아버님이 떠올라 어머님을 뵙기도 전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다.

배우자의 이런 상황에 경황이 없을 어머님 마음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실까..

이렇게 며칠을 부산에서 보내고 다음날 중환자실 면회를 하러 갔다. 혼자 들어가야 하는 중환자실면회는 쓸쓸하고 외로웠다. 물론 부산에 사시는 친척들이 많아서 부랴부랴 와주셔서 코로나로 인해 못 뵌 친척들을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잠시, 면회를 하고 나오는 가족들의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도 한없이 눈물이 났지만 흐느끼는 어머님의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좁은 어깨를 감싸드리는 것이 어머님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도 무거운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조금씩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며 현재를 살고 견뎌내는 가족들의 응원대로 아버님이 건강히 일어나 주셨으면 좋겠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다. 연말에 우리의 계획대로 멀리 여행이라도 갔다면, 호캉스를 갔다면 어땠을지, 이런저런 상황의 흐름이 계획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을 돌아보며 순리대로 흐르는 대로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그저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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