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숭생숭했던 무거운 시간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소개를 통해 철학관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예약을 하고 신년 사주를 보러 갔다.
내 사주를 풀어내며 상담을 하던 중 시아버님이 몇 주째 위중하신 상태라 어떤가 싶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 거를 보다가 남편의 사주를 풀어보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여기(나)는 복(상복) 입을 일이 보이지 않는데, 남편 쪽은 빠르면 봄 안에 늦어도 6월 안에 복(상복) 입을 일이 있어. 한쪽이 먼저 가시네.”
소름이 돋았지만 아닐 거라고, 벌써 3주째 급성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계시는 시아버님 이야기는 제발 아닐 거라고, 더 버티실 거라고 그래도 6월이라잖아 하면서 애써 두려운 심정을 감추며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다.
“지금 어디야? 상담 마쳤어? 집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 줄래? 할 말이 있다.”
“뭔데, 이야기해.. 설마…”
“그냥, 집에 가면 전화 줘. “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겨우 집 앞에 주차를 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가셨어?”
“응.. 아까 밤 9시즘..”
생각보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다. 그가 있는 청주에서 이미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러 가는 중이라 하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장 내일부터 매일 있는 강의 일정들을 전면 폐강시키기 위해 담당자들에게 연락들을 취하고, 다음날 기차를 끊어 두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상과 며칠간 단절되어 버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가족의 장례를 치르러 가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일순간에 멈춰버리는 거구나 싶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몇 시간 동안 아이의 학원선생님들께 차례로 부고로 인한 결석 연락을 했다. 아버님 소식을 걱정해 주고 기다렸던 몇몇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고 나니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찰나 부산에 도착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좋은 일도 아닌데, 하면서도 한편 알리지 않아 더 마음 쓸 사람들이 있을 거란 생각, 거기까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혹시 내 일 관련이나 내가 글 쓰고 읽고 공부하는 모임 관련 며칠의 부재로 인해 오해나 업무에 지장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SNS에 부고 공지글을 올렸다. 정신이 없었지만 나보다 더 황망해 눈앞이 캄캄할 남편보다 내가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부산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병원을 향하는 길. 든든한 아들과 함께였지만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막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눈물이 마구 흐르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울컥해져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랄까.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냥 아버님의 마지막을 인사도 따듯한 말 한마디도 못 나눈 채 이렇게 보내드리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서 가슴 한구석에 뭔가 뻥 뚫린 듯, 먹먹하기만 했다.
지하 2층 장례식장.
무거운 공기와 함께 새하얀 국화꽃 화환이 가득한 공간을 마주했다. 먼저 어머님을 찾아 꼭 안아드리고 토닥여드리다가 그만,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홀로 남게 되신 어머님의 마음을 여전히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행여 어머님이 몸이 상하실까 싶어 집에서 챙겨 온 환약을 어머님 손에 쥐어 드리고 지금 씹어 드시라고, 장례식장 구석에 있는 골방에서 어머님이 꼭꼭 씹어드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상복을 갈아입고 아버님께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지만 슬픔도 잠시, 멀리서 온 우리를 맞이해 주시는 친척분들이 저녁밥을 먹으라고 자리에 앉히셨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남편회사에서 나온 이모님들이 뚝딱 한상을 차려주신다.
몇 시간을 걸려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와,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첫끼였다. 장내에는 와글와글 조문객들과 친척들로 인산인해였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챙겨야 했다.
“엄마, 특이하게 장례식장에 육개장이 없어. 그런데 수육이 있네.”
서울에서는 늘 장례식장에 가면 시뻘건 육개장이 나오곤 했는데, 부산은 시락국(시래깃국)이다. 부산 친척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아래쪽 지방에서는 장례식장에 시락국이 흔하다고 많다고 말씀하셨다. 맑은 된장에 배추를 풀어놓은 것 같은데 슴슴하고 맛이 좋았다. 야들야들한 수육도, 도라지무침도 오징어무침도 속없게 왜 이리 맛있는 거지. 왜 장례식장 밥이 잘 들어가는 건지. 아들은 왜 이렇게 시락국에 밥을 두 그릇씩, 수육을 꿀떡꿀떡 잘 먹고 있는 건지..
조문객들이 올 때마다 인사를 하고 절을 올릴 때마다 예를 다했다. 남편과 도련님 아들과 조카, 남자 넷은 마르고 닳도록 조문객들과 절을 하느라 다리가 후달려 보였다. 그렇게 조문객들을 상대하고, 하염없이 우시는 분들을 뵈면 함께 눈물이 흐르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처음으로 '입관'이라는 의식을 보았다. 아들도 함께였다. 아이를 보여주냐 마냐의 판단은 부모몫이었다. 누구도 봐야 한다 말아야 한다 말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재작년 할머니를 보내드릴 때에도 40넘은 딸들에게 입관은 보지 않는 게 좋다 하셨던 부모님의 판단하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어떤 분위기이길래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하신 걸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친할아버지의 입관의식을 아들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와 애도의 의미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 속에 파묻힌 주무시는 것 같은 아버님의 얼굴을 마주했다.
누군가의 울음소리. 흐느끼는 소리. 아이고아이고 곡하는 소리. 자꾸 힘없이 쳐져버리는 어머님을 지탱하면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끝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아들을 보았다. 나도 아이도 처음이었던 관에 누워계신 아버님과의 마지막 인사.. 노잣돈이라고 사람들이 만 원짜리를 관속에 넣어준다. 누군가 내 손에 쥐어주었던 만원을 아버님 관 속에 넣었다. 관을 천으로 싸고 관위에 손을 대고 마지막인사를 나누라는 지도사의 말씀에 가만히 손을 올려보았다. 내 옆에 서있던 남편의 훌쩍이는 울음소리와 파르르 떨리던 그의 손을 보고 말았다. 눈에 눈물이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현실이 아닌 티브이 속 영상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게 현실이 아녔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고 술을 치고 향을 피웠다.
이런 행위들의 의미는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게 시간은 또 흘렀다.
장손이라 영정사진을 들고 걷는 나의 아들, 그 뒤를 따르는 아버님의 관, 그 뒤를 걷는 사람들.. 부산치 고는 유난히 추웠던 그날, 아버님을 보내 드리던 낯설었던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아버님을 화장하는 동안 '화장중'이라고 써져 있는 화면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행여 어머님이 정신을 놓치실까 싶어 두 손을 꼭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계속 건넸다. 슬픔으로 흐느끼는 친척들이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 주셨다.
아버님의 발인날인 이 날은, 공교롭게도 어머님의 생신이기도 했다. 장례 내내 곁에계셨던 작은어머님 생신도 같았기에, 아버님 화장터에서 온 가족이 울며 어머니와 작은어머니의 생신축하드린다는 인사말을 건넨다.
모두 울고 있었다.
행여 어머님의 생신이 아버님의 발인으로 인해 슬픔으로 얼룩질까 싶어 모든 장례행사를 마치고 집에 와 황망한 몸과 마음을 달래시는 어머님이 씻으시는 동안 동서와 몰래 나와 장을 봤다.
어머님 생신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었다. 조기 한 마리를 굽고, 불고기를 볶고 시금치를 무치고 어묵을 볶았다. 며칠간 집을 비운 어머님의 냉장고를 채울 심산으로 장을 봐 채워드리고 큰손 큰며느리는 음식도 푸짐하게 해 버렸다. 남으면 뒀다 드시라고, 혼자 계실 때 대충 끼니 때우지 마시라고 말이다.
삼우제까지 마치고 저녁 기차로 올라오는 길. 우리 세 가족만 남게 되니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남편이 보인다. 슬픔에 잠기는 것도 잠시, 한 사람이 죽으면 처리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장례를 치르면서 오가는 많은 액수의 돈과 시간, 서류들, 사람들, 그리고 애도의 마음들까지.
장례식장 마지막 결제를 하러 남편을 따라갔는데, 사무실담당자가 주는 것은 결제영수증 한 장과 밤새며 출출할 때 드시라며 컵라면 6개들이 한 박스를 안겨준다.
어마어마한 장례비용과 식대를 결제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컵라면.
아.. 털털한 웃음만 났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될 뿐인 것을. 심각한 경쟁을 이겨내며 아웅다웅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결국 한 줌의 재로 남게 될 것임을 잘 알면서 사람들은 또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현대를 살아낸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 모르게 순간을 달리고 있고 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아직도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부산에 전화를 하면 아버님이,
“응~ 며느리, 나다. 잘 있나~ 사돈은 별고 없고~원차이 보고 싶네. 언제 보노~”하며 허허하고 웃으실 것만 같다.
가족들이 모이면 항상 말씀도 별로 없으셔서 늘 조용히 웃고 계시던 아버님이 여전히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다해 아버님을 애도하는 중이다. 마음으로 떠나보내드리기엔 수일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또 일상의 전선에 뛰어들게 되니 서서히 무뎌지겠지 싶다.
몸과 마음의 안정과 평화, 고인과의 추억을 이따금 떠올리며 마음속에 간직한 채, 또 건강히 남은 가족들이 웃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