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우유 생크림 롤케이크
집에서 홈베이킹 클래스를 운영하다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자! 결심했던 가을이 지나고 그리고 겨울, 간단한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발품 팔아 준비한 설비들을 들이고, 로고 디자인을 제작하고 드디어 내 공간, 내 베이킹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동네 지인들과 친정가족들을 모시고 소소하게 오픈식을 하고 파이팅 넘치게 시작하기로 했다. 혼자 운영하지만 기대감, 설렘, 걱정, 만감이 교차했다. 일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정말 행복했다.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내 공간, 내 일터. 내가 몰두할 일이 생기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아지트. 내 사람들을 들이고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랑방,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내 공간은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았다. 내가 사장이니 사장 마음이었다. 내 전공을 살려 주부를 대상으로 재능기부 일본어 교실도 열었고, 동네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도 좋았다. 아들 친구들에게 베이킹 수업을 열어 주기도 했고 아들 생일파티 장소로도 활용했으며, 동네 친한 가족들과 연말 파티 공간으로도 이용했다.
하지만 내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월세, 관리비를 내기 위한 운영자금이 필요했고, 재료비는 별도, 각종 제반비가 드는 것이 집에서 홈베이킹 클래스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한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고, 두 집 살림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방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베이킹'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했다. 공격적으로 일하려고 공간을 빌려서 나왔기 때문에 갑자기 경제적인 부담감이 커졌지만 책임져야 했다. 나는 작업실 오픈의 기쁨은 잠시 내려놓고, 기존 수강생들과 고객님들과의 소통과 SNS로 나의 공간을 홍보하고 수업과 주문을 받으며 부지런히 일에 몰두했다.
어느 정도는 혼자서 부지런히 즐겁게 스튜디오를 운영했지만, 더 잘하고 싶은데,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절대적으로 온 신경을 다 내 공간을 위해 쓰지 못하는 시간적인 여유가 모자라는 것도 문제였다. 조금씩 지쳐갔다. 내 공간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살짝 벅찬 감이 있는데, 내가 여기에만 매달릴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옆에는 회사생활로 야근이 잦은 바쁜 남편과 4살 아들이 있었으며 나는 그들을 챙기고 살림도 해야 하는 주부이기도 했다.
아들, 하나뿐인 내 아들. 속눈썹이 기다랗고 예쁜 얼굴선을 가진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본다. 벌써 어느새 12살. 이제 나보다 발은 더 큰 지 오래고 내 옷도 같이 입는다. 언제 이만치 컸나 싶다. 그리고 돌아보니 아들과 함께 성장해왔던 내 베이킹 경력도 어언 1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들을 뱃속에 품었던 임신 기간 내내 베이킹을 했다. 책을 읽어주거나 음악을 듣거나 다양한 태교들을 했지만 아마 나의 아들은 배 근처에서 윙윙거리는 핸드믹서 돌리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는 아이가 나오면 어쩌지 걱정도 했지만, 항간에는 아이에게는 엄마 배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기계음 소리와 비슷해서 우려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행히도 나의 아들은, 걱정과는 다르게 또래보다 순했고, 차분했다. 돌 전부터 보낸 어린이집에서도 잘 적응해 주어 고맙게도 엄마가 베이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지? 가까이에는 아이를 잠깐 맡길 가족도 없는데..”
내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늘 노심초사 아등바등, 헐레벌떡 그렇게 지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의 허둥댐과 대조적으로 주위 환경에 차분하게 잘 적응해 주면서 성장해주었다.
내가 운영하던 베이킹 스튜디오는 아이에게 제2의 집이자 놀이터였다. 아들은 일이 늦어지는 엄마를 기다리며 작업실 한쪽 테이블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공방에 있는 귀여운 소품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기도 하고, 반죽 덩어리를 쥐여주면 혼자서 한참 동안 조물조물 쿠키를 만들며 엄마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들 생일 때에는 공방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이벤트로 베이킹 수업을 해주고, 맛있는 디저트와 음식들을 차려 근사한 생일파티를 해주기도 했었다. 늘 특별한 행사 때나 명절 때에는 다양한 디저트들을 구워 아이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선물하면서 아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나는 베이킹 선생님, 쿠키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이가 유치원에서 엄마의 직업을 소개한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베이킹 선생님이라고, 쿠키랑 케이크를 만든다고 소개하니 반 친구들이 거의 엄마를 알고 있었어. 엄마가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라 기분이 좋았어.”라고 말했다. 늘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빼빼로데이 때에는 아이 손에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쿠키를 들려 보내곤 했는데 나로서는 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주시는 기관과 친구들, 친구 엄마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바빠서 늘 미안했지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지 다 해주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한동안 내가 만든 우유 생크림 롤케이크가 인근 지역 온라인 카페에서 난리가 나서 엄청난 주문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몇 주씩 대기를 해야 하는데도 만들어만 달라고 고객님들이 대기를 하기도 했던 그야말로 애증의 우유 생크림 롤케이 크였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당시에는 내가 사용하는 비싸고 질 좋은 동물성 생크림과 촉촉하게 구워낸 특별한 시트로 말아낸 순수한 이 우유 생크림 롤케이크를 파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나를 찾아주는 분들이 너무 감사해 초반에는 주문받아 만든 케이크를 배달해드리는 서비스를 했었다. 바쁜 와중 시간을 쪼개서 나를 찾아주는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막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운전연습 삼아 동네 구석구석 차로 배달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가 기관에 간 시간 안에 일을 못 끝내면 가끔 하원한 아이를 차에 태우고 케이크 배달을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배달할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아이가 카시트에서 곤히 자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잠깐인데 뭐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자는 아이를 차 안에 둔 채 케이크 배달을 하고 내려왔다. 오분? 십분 남짓이었을까. 멀리서 보니 아파트 경비아저씨께서 내 차 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랴부랴 가보니 차 안에서 아이가 깨서 우렁차고 서럽게 울면서 엄마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재빨리 차문을 열어 우는 아이를 달래주고 차량 블랙박스를 돌려보았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엄마 엄마 우아아 앙~”
아이가 엄마를 여러 번 부른 후 터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나뿐인 아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건지 싶었다. 일이 먼저인지 아이가 먼저인지 순서를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후부터 다시는 아이 혼자 차에 두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기억을 남겨준 것 같아 자책하고 눈물을 쏟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혼자 일을 하다 보면 퇴근이 늦어지는 날도 있었고, 밤을 새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남편은 늘 야근이 많았고, 일과를 마친 아이를 스튜디오로 데려와 놀리고 먹이고 졸려하는 아이를 작업실 안쪽 공간 바닥에 박스를 깔고 이불을 깔아 재우기도 부지기수였다. 남편이 늦은 시간 공방으로 퇴근해서 잠든 아이를 안고 집에 데려가면 나는 그제야 밤새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의 건강을 돌아보거나 할 여유조차 없었다.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 해결되면 오로지 내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언젠가 아들이 열이 나서 유치원에 보내지 못했던 날, 해열제를 먹고 죽은 듯이 공방 구석에서 잠만 자던 아들을 보며 안쓰러워 눈물짓던 날들도 있었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내 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신은 아들에게 쏠려 있고, 괜히 아이를 고생시키는 것만 같아 울면서 일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려고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는 엄마에게 떼를 쓰거나 불평불만도 없었고, 늘 차분했다. 부끄럽게도 엄마만 버둥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성장하는 순간순간이 참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런데 엄마인 나의 인생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중간을 찾아가는 것이 참 어려웠던 시간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독박 육아를 하며 일을 하는 워킹맘으로 살았던 거의 삶이 전투에 가까웠던 ‘그때’가 있었고, 지금도 역시 별반 다를 것은 없다. 그리고 주위에는 그렇게 살고 있는 수많은 워킹맘들이 존재한다. 모두들 보이지 않는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일 테고 나도 겪었고 그들도 겪은, 겪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그 답은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혼자 모든 것들을 해내느라 그땐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 그렇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후회는 없다.
참,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