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나로 충분했다고
안녕. 활달하고 인형놀이를 좋아했던 여비야. 어린 시절, 커서 뭐가 될 거야? 하면 단연 선생님, 어 그리고 엄마 그랬지. 학교에 빨리 보내달라고 떼도 많이 쓰고 동네 오빠들 따라서 운동장에 놀러도 갔었고 히 히...
딱지치기, 공놀이, 다방구, 술래잡기 모두 달리는 것을 좋아해 온 동네를 몰려다니며 집에는 깜깜한 밤이 되어서나 들어가고 순이 언니는 저녁밥 해놓고 나를 찾으러 헤매던 날들도 부지기수였어. 밥때 놓치면 키 안 크고 난쟁이 된다고 성화도 많이 부렸잖아?... 내 머리통 쥐어박으며 찬 머리라서 빗기기가 힘들다고 가늘어 빠진 니 머리카락은 엿도 못 바꿔 먹는다고, 그래도 빨간 망사 덮개로 곱게 갈래 머리 딸 때마다 "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 했지
또렷이 기억하는데 언니가 선 본 안경잡이 아찌 하고 시집간다고 했을 때 나도 데려가라고 했잖아
시골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며 책도 많이 보고 학생들한테는 무섭지만, 언니한테는 노란 국화를 연거푸 보내고 나한테 미제 쵸코렛도 주고. 거기 가서는 한시 반시 붙어 다녔던 나는 눈곱만치도 생각 안 할 거라고 딱 자르고 시집가버렸잖아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텅 빈 마당을 바라보면 혼자인 나를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게 속상해서 애꿎은 책가방을 던져버렸지. 혼자서 무얼 해도 재미가 없으니. 그때 생긴 버릇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는데 책 읽는 거지.
막내 고모 방안엔 책이 많았으니깐.... 삼켜버리듯이 무조건 읽고 또 읽었어. 꿈결 같은 시간들이었어. 아버지가 선생님이시니 좋았겠다고? 천만에 하나도 좋지 않았어. 무섭기만 하고 매일 술을 드시고 마루에 있는 난로 통도 집어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동네 창피가 말이 아니었지. 친구들에게 잘난 척도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들어 단짝 친구도 못 만들어봤어. 공부를 곧잘 해서 칭찬도 들을만했지만 최고만 보이는 아버지는 칭찬은커녕 못하는 것만 지적했잖아. 날 착한, 그 모습으로만 보시면 내가 잘, 따르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 당시에 날, 너무 몰아세우고 싶진 않아,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연거푸 생긴 어린 동생들에게 많은 손길이 필요했을 것이고 난 혼자서도 잘 놀고 보이지 않으면 다락방에 처박혀 책 읽는 놀이에 푹 빠져 밥도 제때에 못 먹고 어둑해지면 도둑고양이처럼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잤잖아. 여전히 잘 지내고 일상적으로 별일도 없이 말이야. 이제와 새삼 관심받고 싶어서일까? 외로웠을 거야.
이제와 생각하니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어. 떼쓰고 투정 부리고 울면서 날 두고 가면 안된대도, 폭발하고 던지며 보여주신 불만도, 한시적으로 생겨나는 소소한 우리네 일상이라고,
지금의 나는 어린 여비에게 말하고 싶어. 뭘 해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나로 충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