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밥상을 치우고 텔레비전을 켰다. 딸애는 보통 3주나 4주에 한 번씩 서울 집에 온다. 지난 주부터 북한의 핵 발사 위협에 부대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 딸은 직업이 군인 공무원이기에 타지에서 근무한다.
집 안엔 온기도 없고 무료하기까지 하다. 식구 하나 들고 나는 것이 대수일까마는 나에겐 두 손에 들고 있던 풍선을 놓쳐 버린 것만 같다.
켜놓은 텔레비전 안에는 반백의 헝클어진 머리, 주름진 입가, 듬성한 이빨, 하회탈같은 얼굴의 할머님이 웃고 계신다. 너와집이 먼 그림같이 앉아있고 처마 위엔 말린 생선들이 줄을 지어 매달려 있다.
할머님께 공손히 인사를 하는 진행자분, 할머니를 거드는 손녀딸, 느리게 걸어가는 누렁이... 화면은 내 시선을 잡아당겼다. 댓돌 위에 나란한 흰색 고무신이 햇빛을 받아 뽀얗다. 나무 기둥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이 알록달록 의 색채로 내 눈을 잡아당긴다. 가까이 다가 서있는 모습엔 결연한 기운도 보인다. 추억을 더듬어 시간은 흘러 내 어린 시절까지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고 직장을 다니는 내가 보이는 것 같아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거리를 돌아 옛날 찐빵을 파는 상점, 장작불을 때서 끓여내는 메밀 막국수집, 누렇게 바랜 사진을 보고 디지털 기계로 전환해 칼라판의 색 짙은 신세대 작품을 만들어 주는 사진관, 젊은 부부가 손으로 만드는 머그컵의 공정과정 등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동네 한 바퀴...
만난지 한 달만에 결혼을 했다. 나는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해온 노처녀였다. 내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우리집 가정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이 되었다. 먹고살아야 했고 동생들의 학비도 벌어야 했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홍보과 미스김처럼 다방을 들락댈 수도 없었다. 쓸쓸함을 메우기 위해서, 한창 때라서,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연애소설은 많이도 읽었다. 소개팅을 하고 소설 같은 향기가 폴폴 나는 결혼을 꿈꾸었다. 덤비듯이 달려 용감하게 결혼했다.
시어머님, 시동생 그리고 낯선 환경 모두 내게는 맞지 않았다. 무섭고 기질이 억센 시어머님은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남편은 시어머님보다 더 무서웠다. 종잡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성질, 알 수 없는 울분에서 오는 괴팍함...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이 나는 벌벌 떨었다. 잠 못 드는 밤이 많았다.
나라는 사람은 멀리 도망가 버렸다. 무력한 일상이 싫었다. 보행기를 밀고 다니는 딸애의 눈망울은 티 없이 맑고 예뻤다. 힘을 내야만 했다. 나는 딸애를 업고 장사를 했다. 씩씩하게 당당하게 멋진 아가씨 시절의 나로 돌아가려 했다. 영업부에서 일한 경험은 많은 보탬이 되었다. 시집 식구들과 방 2칸에 붙어 눈치를 보기 싫어 악착같이 일했다. 전력 질주해도 힘든 줄 몰랐다. 장부책에 적힌 깨알 같은 숫자는 나를 물 만난 고기처럼 헤엄치게 했다.
두 딸애들 모두 독립을 했다. 짝을 찾아 한 독립은 아니다. 각자 직장을 찾아 내 곁을 떠나 잘 살고 있다. 그런데 거리와 마음의 틈은 비례하는 것 같다. 나의 성정이 씩씩해서인지, 늦둥딸애는 하늘을 지키는 학사장교다. 내가 중학교 때 꿈이 여군이었다고 지금은, 웃으며 말한다. 큰 딸애가 삐질까봐 그애 직업도 얘기하련다. 큰 딸애는 프리랜서다. 영어를 가르친다. 원하는대로 일정기간 일하고 놀고 싶을 때는 논다. 자립을 한 두 딸들을 보면 힘차게 달려온 나의 지난 날들이 자랑스럽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돌듯 편하게 살고 싶다.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해볼 계획이다.
만난지 한 달만에 용감하게 결혼해서 지금껏 잘 살아왔다. 거침없이 전력 질주할 힘이 이제는 부족하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조금은 내려놓고 싶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파아란 물감을 끝없이 뿌려 놓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