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햇빛이 거실 중앙에 나앉아 있다. 부드러운 마시멜로우의 향기처럼 가벼운 입맛을 간질인다.
흰옷을 걸친 뭉게구름을 눈 속에 담다가 문득 기억의 창문을 열었다.
거실 한편 소파엔 안경을 쓰신 나의 아버지가 앉아계신다. 안경 너머의 반백의 머리를 이고 두 손은 책을 잡고 계신다. 언제나 똑같은 제목의 그, 책 "도꾸가와 이에야스"...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셨다. 할머님의 교육열은 대단하셔서 아버지 위로 두 고모님도 일본에서 공부하셨다. 그 당시 이북에서 남한으로 넘어오실 때 금덩이를 이불보따리에 싸서 가져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니 아버지는 사실 큰 아들이 아니었다!" 아버지 위로 두 분의 형님이 계셨다고 했다. 한 분은 병으로 또 한 분은 6.25 전쟁통에 잃으셨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대동강과 을밀대를 빛바랜 사진으로 보여 주시며 목청을 돋우어 힘 있게 강조하셨다. 훌륭한 아들로 만들겠다고 반드시, 반드시!
6.25 전쟁은 할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모두를 망가뜨렸다. 화마에 터지고 부서졌고 모든 것을 불바다로 던져 넣었다. 평화롭던 일상은 사라졌고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떠돌이의 유랑민이 되었다. 아버지도 정신을 놓고 갈 곳을 몰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음악공부를 하셨다. 성악전공을 하셨고 악기도 잘 만지셨다.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재직하셨다.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치고 가녀린 활을 당기시면 위, 아래로 미끄러진 듯 움직이는 손동작에 따라 나오는 빗방울이 또르르 구르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음악에 심취해있는 모습은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혼자서 음악을 들으셨다. 책도 혼자서 읽으셨다. 그 누구도 곁에 두시지 않으셨다. 난 아버지가 어려웠다. 어두운 갈색 거실 바닥처럼 무거운 공기까지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거실에서 우연히 음악을 듣게 되었다. 방학도 아닌 나른한 오후였다. 폭풍이 몰아치는 듯 한 굉음이었다.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러다 갑자기 소란스러움은 사라졌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학교에서 배운 동요와는 사뭇 달랐다. 나는 온몸이 찌릿했다. 그냥 모든 시공간이 멈춰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물었다. "음악소리 듣기 좋지? 어떻게 들리니? 무엇을 얘기하는 것 같니?" 나는 당황스럽고 어색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별 뜻 없는 물음이었지만 내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부터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을 드시면 감정도 올라 센베이 과자, 전기통닭구이를 사 오셨다. 거실 바닥에 펼쳐진 식어빠진 닭다리 한쪽을 내게 주시며 "여기 저기 헤매다 차갑게 식어버렸구나. 미안하다. 요담 번엔 술 안 먹고 사다주마. 어서 먹어라 어서..." 아버지는 내 귀에 대고 연신 끈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술냄새가 코끝에 달려들었다.
나는 거실에서 우연히 음악 듣던 그날이 잊히질 않는다. 아버지는 술에 젖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언제나 혼자서 음악을 들으시며 어떤 공상을 하시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 드비쉬, 하이든, 라흐마니노프, 쇼팽, 말러, 요한 슈트라우스, 생상스, 멘델스존 등의 음악을 들을 때면 아버지와의 추억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