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수아비 모자

by 여비

나는 모자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가 패션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진바지에 운동화가 어울리듯 긴 생머리에 넓은 챙을 감싼 리본 달린 모자는 소녀를 연상하게 된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배우다. 의상이나 손에 들고 있는 담뱃대, 긴 손장갑, 특히나 내 두 눈을 사로잡는 것은 모자였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검은색의 넓은 모자였다. 베이지 색의 리본은 마치 허리를 묶은 벨트를 보는 것만 같았다. 부는 바람에 처지지 않게 양 날개처럼 묶었다. 검은 눈동자에다 목선을 드러내는 헤어스타일에다 빨간 두건으로 감싸진 모자, 업스타일 헤어가 들어있는 높은 퍼 모자, 스카프를 머리까지 두른 모자, 앞머리를 보여주는 띠 모자, 나는 그중에서도 창가에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 부를 때의 수건모자가 가장 좋았다. '문 리버'로 시작되는 노랫말은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된다.

나의 모자 사랑은 합리적인 기능을 우선시한다. 시간에 쫓겨 머리를 감지 않았거나 손질을 못했을 때 쓴다. 모발의 정갈함은 단정한 용모의 첫째이다. 어수선한 머리채를 편한 말로 "미친년 머리, 귀신이 산발한 머리"라고 하지 않는가? 색깔 있는 옷을 입어 산만해 보인다 치면 검은색의 영국 식 중절모를 눌러쓴다. 바지를 입고 평범한 스웨터를 걸쳤으면 넓은 챙의 모자를 쓴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머리가 흩날리면 눈에 스치면 거추장스러워 모자를 쓴다. 안경을 쓰는 나는 시야를 가리는 물체가 신경에 거스른다. 하는 일도 정교하고 섬세한 일을 하기에 더욱 그렇다. 주방에서도 두건을 쓴다. 머리카락이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영하의 매서운 찬바람을 맞다 보면 머리가 시리다. 뒷목을 중심으로 띵한 느낌에 어지럼증이 올라온다. 울 소재의 비니 모자는 머리를 따뜻하게 보호해준다.


어렸을때 10월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새엄마를 심하게 때렸다. 그날 아침 나는 교회에 갔었다. 주일학교가 파했어도 늘 그렇듯이 곧장 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교회와 집으로 가는 길목엔 방직 공장이 있었고 그 아래론 실개천이 둑방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개천가에서 친구들과 물푸레나무 껍질을 가지고 간질임을 치며 놀다가 전도사님의 지루했던 설교 중 돌팔매질로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죽인 소년 다윗 이야기가 떠올라 내 멋대로 열심히 떠들어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에는 밥사발이 어질러져 있고 양은 밥상은 뒤집혀 대롱대는 철심 박은 다리가 달랑거리는등,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내가 현관에 들어선 것도 모르는 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기억나는 건 새엄마의 울음소리와 포악뿐이다. 나는 쪼그려 앉아 꾸역꾸역 울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내 꼬질꼬질한 운동화로 뚝뚝 떨어지는데 아버지는 "넌 왜 우냐, 내가 너한테 뭘 했다고"라고 말을 쏟아 내셨다. 나는 소스라쳐 움찔대며 악몽 같은 이 난장판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었다. 그 이후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었고 저녁엔 아버지와 함께 마당 끝에 핀 꽃을 보았다.



아버지는 가족의 품 안에선 쉬어지지 않았나 보다. 낚시가방을 둘러메고 자주 집을 나가셨다. 한 번은 나를 데리고 남한강변 어디인지로 낚시를 가셨다. 느리게 철거덕 거리는 기차를 탔었다. 여름 한낮에 늘어지게 자는 누렁이처럼 한가하게 차창밖의 풍경이 지나갔다. 넓은 들판엔 누런 벼들이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까마귀와 참새를 쫒기 위해 허수아비가 찢어진 옷과 구멍이 뚫어진 모자를 쓰고 멍하니 서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벼들이 흔들렸다. 논 위로 매어놓은 깡통도 덩달아 위아래로 널을 뛰었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만 살았다. 시골은 가보지도 못했다. 아버지 고향도 이북의 평양이었다. 나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학교 소풍 정도였다. 책에서 읽은 농촌 풍경을 기차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맘속에 눈 속에 열심히 담았다. 소반 위에 한가득 담긴 빨간 홍시처럼 마음이 저려왔다. 뭔지 모를 무한의 어디로 가는것 같았다가 다시 맴돌아 빨려드는 옹달샘가에 가는것도 같았다. 하늘은 내게 무상으로 일출과 일몰 구름과 달을 보여준다. 매일 다르게 색을 연하게도, 때론 구멍 뚫린 허수아비 모자처럼 그림을 그려주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좋아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