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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비 Jan 06. 2023

남편의 술

예쁜 빛깔의 술들이 찻잔 뒤에 서있다. 남편은 술을 못 먹는다. 체질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먹거리는 마다하지 않고 잘도 먹는데 유독 술만 못 먹는다. 남편은 학창 시절에 생맥주를 파는 비어홀엘 갔다고 한다. 병맥주를 두 병 주문하고는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라만 보다가  값을 치르고 나오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불러 세우더니 왜 술을 안 마시고 그냥 가느냐고 물었다고.. 엉겁결에 무슨 핑계를 대야겠어서 그냥 술빛깔을 보려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궁색한 변명, 어색해서 가게를 뛰듯이 나왔다고 한다.

 군대에 가서는 일병시절에 훈련받고 군생활에 적응하기도  난감하였다. 철모에 막걸리를 철철 넘치게 부어 한번에 마시라고 명령을 하더니 다른 사병 앞에서 먹지 않는다고 구타를 당했다.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고참병에게 핑계가 통하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고 죽을힘을 다해 마셨고 그 뒤에는 쓰러진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또 사회생활 할 때는 회식자리가 고역이어서 차라리 배달을 자청해서 가고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댔다고 했다.


 나는 이런 술 못 먹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여름날 땡볕을 받으며 좁은 언덕길을 올라 허름한 대문을 넘어설때철철 넘치는 맥주잔이 머릿속에 보여 숨에 들이마시고 싶다. 우울할 때 술잔을 앞에 놓고 눈물을 떨구며 마시는 술, 재수하던 시절에는 학원에서  배우는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힘든 공부에 지쳐 신세한탄을 함께 나누는 친구와 마시는 술, 서양 영화에서 보면 바텐데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의 빛깔을 상상하며 흠뻑 감상에 젖어 마시는 술, 세상의 정의와 규칙들이 나를 먹어가는 것이 못마땅해 담판을 내보겠다고 호기를 부리며 먹었던 술, 젊었을때는 혼자인 것이 싫어서 전화를 걸어 아무나 무조건 불러내 시간과 술을 흘려보냈었다. 머리와 목구멍을 같이 적셨었다. 그렇다고 내가 술 주정뱅이처럼 살았던 것은 절대 아니다. 남편이 술을 못 먹으니 반론이나마 늘어놓아 위로를 해본다는 걸까?


나는 남편이 술을 못 먹는다는 것을 알고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잡아맸었다. 사실 결혼은 생각도 안 했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도 끝마치지 못해 어정쩡한 상태였다.직장생활이 지겨운 차에 성급히 덤비듯 결정했다. 만나 서로를알아가는 과정도 없이 정면돌파를 했다. 남편의 말수가 적은 것도, 소심해서 평소에 하고 싶은 자기표현도, 화가 들어오면 털어내지 못하는 것싫지않았다. 술기운을 빌려  남편은 잘난 척을 해보고 호탕하게 웃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은 했었다.

 나의 아버지처럼 집 앞에 대문을 박차고 "문 열어라" 하고 큰소리를 치면 어찌 안 되겠을까? 그는 참으로 침착하기만 하고 집안분위기도 회색빛으로 무거웠으며 거기에 시어머님은 위풍당당하기까지 해서 나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시어머니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나는 혼자 부엌으로 나가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한 두려움의 오랏줄은 남편의 술 못 먹는다는 사실부터였나 보다. 한창  때의 나는 밝고 싱그러운 오월의 장미였는데 이제는 맥도 없고 내 꿈들이 주저앉은 상태여서  안타깝기만 하다.

 남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한다.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과 받아야 할 돈을 계산기로 두드리며 하루를 보낸다. 시간이 없어 친구도 만들지 않는다.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다고 한다. 언제나 퇴근하면 집에 돌아와 내가 차려준 저녁밥상을 대하고 묵묵히 먹는다. 그런 다음 몸 씻기를 마치면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앞에서 정리도 한다. 일상을 묵묵하게 지내다 보니 그것이 루틴이 되어 인생을 숫자로 바라보느라 큰 눈이 눈꺼풀이 처져 작아졌다. 선천적으로 술을 못 먹게 태어났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꾹 닫은 입으로 묵직한 신사가 되고,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으니 대신 나는  내 이야기를 떠든다. 호색한 남자들 틈에 끼지 않으니 다른 여자에 눈길을 주는 일도 없고,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일도 없다. 댄스교습소를 가보겠다고 뭉치돈을 숨겨두지도 않는다. 남이 침 튀기며 떠드는 애정사나 불합리한 관계에도 맞장구치며 가담하지 않는 남편 덕에 오늘도 나는 조기 퇴근을 해 김치찜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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