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책

by 여비

따스한 햇살이 늘어진 오후다. 나른함과 무료함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밀어두었던 창고방을 정리하게 되었다. 정리를 하다 보니 우연히 그 책을 발견했다. 켜켜이 누런 잡지책 사이로 나란하게 묶인 여러 권의 책인데 <중국차 향기 담은 77편의 수필>이 그것이다. 아버지의 소장 책들은 여러 권이었다. 카네기 자서전, 피천득 시집 생명, 시사 영어판의 Love Story...

77편의 수필들 중 맨 앞에 "주쯔칭의 '아버지의 뒷모습'수필"로 눈을 돌렸다.

실직한 아버지와 나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헤어진다. 아버지는 직장을 잡으러 난징으로 가고, 나는 공부를 하러 북경으로 떠나는 거다. 아버지는 스무 살이 넘은 아들을 혼자 보내기가 안타까워하시고 내가 타는 기차의 좌석을 태우러 배웅을 나온다. 떠나는 아들의 부족한 것이 있는지를 살피다가 아버지는 기차에서 내려 길 건너에 귤 가게로 향한다. 나는 찻길 너머로의 아버지 모습을 바라본다. 승강구의 높은 턱을 오르려는 무거운 몸의 아버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한 행동에 무엇하나 해 줄 것이 없는가 하는 등을 보게 된다. 자식사랑은 하늘도 부정 못하는가 보다.

나는 지방에서 학업에 자취를 했다. 따로 떨어져 있다 보니 나도 아버지도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나는 뜻은 없지만 대학을 다녔다. 편부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부족한 것 없이 간수하느라 아버지는 수업 준비를 대신해주는 일도 맡아하셨다. 쪽문의 문풍지도 당하지 못하는 추운 겨울밤에 콧물 달린 고드름을 안고 손에는 캐시밀론 이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셨다. 얼린 문지방을 박차고 이불만을 채어 덮고 좋다고 소란만 떨었다. 천리나 되는 길을 뒤뚱대며 오셨을 텐데 무심하게 말도 안 했다.

아버지의 밤낮 없는 술타령으로 남들 있는 엄마가 내겐 없으니 밉기만 했다. 영숙이 엄마가 고운 한복을 입고 담임선생님을 찾아오신 날에 우리 반애들의 째진 눈과 부러움의 환호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총총히 걷는 발치 위에 쪽머리 핀의 꽃장식이 파르르 흔들려 나는 두 눈을 꿈쩍 감았다.

아버지의 책을 읽다 보니 할머니의 지청구가 들린다. "거정 공부만 많이 배워오면 뭐하간? 사람 노릇을 해야 디..." 하늘도 울고 갈 자식사랑에 일본으로 유학시키시며 숱한 눈물의 비가 내렸다.

기찻길 너머의 아버지 뒷모습 속에도 꽁꽁 언 손에 들고 온 캐시밀론 이불에도 햇살보다 따스한 그리움이 주마 등되어 멀어져 간다.

흐린 기억 속에 마주한 아버지의 책으로 회한이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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