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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상 Oct 23. 2020

페스트를 읽고나서-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코로나와 우리를 생각하며

코로나 바이러스 # 페스트# 알베르 까뮈# 인간의 힘# 인간군상# 휴머니즘#

알베르트 까뮈의 작품인 <페스트>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지난한 시간들의 기록을 적은 작가의 글은 담담했다. 하지만 페스트라는 절대절명의 사건을 겪어내는 인간군상의 역동적인 시간들은 지금 코로나시국과 맞물려 책을 읽는 내내 두려움과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게 하였다. 까뮈는 가상의 상상으로 글을 썼지만 전염병의 창궐은 인류 역사상 계속 되어 온 반복된 일이기도 하거니와, 코로나가 온 지구를 덮은 현 상황과는 슬프게도 닮아있었다.

이야기는  쥐들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징조인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사실을 정확히 하고 대처하는 과정은 감정이 아닌 사무적인 조처였다. 의사 리유의 말처럼 인정하고 두려움의 그림자를 빨리 쫓아보내는 대책을 세워야만이 비로소 페스트는 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막연한 희망을 주거나 미루지 않고  빠른 대책을 세웠던 것은 그런 의미와 맞는 모양새라는 생각이 든다.

페스트는 거대한 추상이었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눈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실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시가 봉쇄되고 죽음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공평한 일이 되면서 그것은 각자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거대한 두려움이 되어간다. 각자의 인간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가치관들에 따라 페스트를 바라보는 다양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페스트의 배경이 된 오랑시는 초기에는 겉으로는 변화가 없는듯이 보이며 유행병이 금세 지나갈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폐쇄되어 운명공동체의 신세가 된 시민들은 사적인 감정을 내밀 수 없게 되고 각자 내면적인 고독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의 신세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위기 앞에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을 다하면서도 각자를 지키고 돌보아야 하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주로 가정 안에서 칩거하는 모양새로 그 시간을 버티는 동안 세삼 우리가 세상과 많은 교류를 하며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거 같다.

오랑시민은 봉쇄의 지경에 이르러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절망까지 더해지자 최대한 무심한 마음으로 고통에 무관하려 애쓰기도 한다. 격리된 시민들의 모습에서 마치 오랜 휴가를 맞이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는 묘사에서 너무 큰 고통을 전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버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막연한 기다림과 낙관의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쓴 것이것이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오랑시가 거의 일년만에 종식 파티를 한 것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끝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적 팬데믹의 상황이다. 우리나라가 예외적으로 완화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랑의 시민들은 견디는 시간들 속에서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남은 가족은 이별을 경험하고, 환자의 가족은 격리되고, 의료진들의 피곤함이 누적되고, 조금씩 견디는 시간들이 버거워져 우울감에 사로잡히고, 옛시절을 그리워하다 방종함에 빠지기도 하고, 조심성을 잃고 부주의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련의 시간들 속에서 종국에는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할까?'하는 물음을 생각하게 된다.

외지인이었던 신문기자 랑베르는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사랑만이 의미있는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랑베르가 겪었던 스페인내전을 빗대어 영웅주의와 사상은 오히려 더 쉬운 것이었고 살인적이었다고 말한다. 시청서기인 그랑은 자신만의 은밀한 즐거움-책의 집필-이라는 도피처를 통해 현실의 힘겨움을 이기고 오히려 발전하려 애쓴다. 늙은 의사인 카스텔은 혈청을 개발하기 위해 애쓰며 아내와의 사랑은 더 깊어진다. 그리고 세균이란 매번 다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것이며 산다는 것이 바로 페스트라고 말한다. 고난의 시간은 늘상 우리들 삶 안에 있는 것인데도 어쩌면 페스트라는 이름으로, 코로나19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면 우리는 쉽게 휘둘리고 쉽게 나를 내어주는 지도 모른다.

절대절명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좌절의 시간은 우리의 한계와 나약함을 절감하게 하지만, 그 시간을 넘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인간들은 고독한 자신의 삶을 살아내며 새삼 자신이 이제껏 누린 것들을 감사하고 이제부터 붙잡고 살아야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도 전쟁이나 유행병의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은 의식의 진화를 이루어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극명한 의식의 변화는 종교에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 정국에서 한국 교회가 보여준 많은 모습이 그렇했던 것 같다. 파늘루신부로 대변되는 종교계의 모습은 이러한 재앙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반성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향한 외침을 계속하며 기독교적인 희망을 잃지 말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소녀의 죽음을 지켜본 후 파늘루 신부는 '여러분'이라는 호칭에서 우리는'이라는 표현으로 호칭을 바꾸고 신의 자비를 청하자는 완곡한 연설을 하게된다. 고난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신과.기독교의 본질을 고민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 제도나 형식이나 건물이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짜 신을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을 선물하신 신의 뜻을 깊게 고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맹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강요된 믿음과 억지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술자인 리유는 그랑의 성실성을 이유로 시대의 영웅이라고 했다. 그의 모습처럼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성실성만이 페스트와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한데 내가 주목하게 된 인물은 타루이다. 적극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싸웠을 뿐 아니라 페스트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타루의 이야기에서 작가인 까뮈는 인간의 존재가 그 누구에게도 침해되지 않고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든다.

법관인 아버지가 사회라는 이름으로 어리석고 선량한 시민에게 쏟아내는 법의 심판을 보고 난 후, 그는 스스로도 관습이나 제도, 가치관이라는 페스트에 감염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형벌하는 살인행위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난 후 사상이나 이념의 대립이 가져온 인간가치의 파괴를 거부하는 까뮈의 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타루는 혈청주사를 맞는 걸 소홀히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  타루의 죽음이 마치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죽음에 이른 예수님을 생각하게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여  죄인에게 연민을 느꼈던 타루, 페스트라는 공포에 과감히 맞서 삶을 지키려했던 타루, 이젠 모든 걸 이루었다고 안도하며 세상과 이별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과 다름없는 사랑의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코로나를 이겨내는 해방의 순간이 찾아올 것을 믿는다. 오랑이라는 가상의 도시 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시련을 이겨내는 힘겨운 투쟁을 해왔고 이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마지막에 언급한 것처럼 '환희는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페스트균은 결국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구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미래에 대한 겸손함과 재앙 안에서도 꿋꿋할 수 있는 강인함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페스트가 삶을 온통 덮어버린 순간에 절망과 두려움과 무심함과 막연한 희망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존재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져야했던 오랑시민들의 모습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과 고뇌의 파편들이 각자의 이야기와 세상을 이어주며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겪고있는 코로나와의 힘겨운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본질을 만나게 될까? 진짜 중요하고도 아름답고 버릴 수 없는 그리하여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붙잡고 있겠다 마음 먹게되는 그것 하나를 만난다면 힘겨운 이 시간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고통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해주며 그리하여 우리 각자를 서로 사랑으로 끌어 안을 수 있는 세상으로 이끌어주지는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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