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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상 Nov 08. 2022

글을 쓰며 나를 찾기

치유글쓰기법과 칼 융의 적극적 상상

글쓰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항상 글을 쓰고 싶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차 한잔과 곁글인 글이 아니라 가슴 속 답답함을 발산하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불쑥 불쑥 올라오는 화 덩어리와 슬픔과 어지러운 생각들을 종이 위에 갈기듯 마구 쓰고 싶은 마음이 많다. 한데도 글을 쓰려면 잘 정제시키고  다듬어진 모양새이어야 하지 않나하는 강박이 있다.


내가 자서전쓰기 수업을 가르칠 때의 글쓰기 방법은 치유글쓰기, 자동기술법이다. 즉 문학적인 표현을 위한 문장의 완성도나 어법을 맞추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떠오르는대로 발산하듯이 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서전은 문학의 한 장르이기에 과거의 일을 순차적으로 차분히 돌아보며 정제된 글을 쓴다는 방식과 다르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해 자신 안의 기억의 모양새를 경험하는 글쓰기를 유도하였다.


이런 글쓰기를 권유하였지만 나의 글쓰기는 별반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글쓰기를 할 만큼의 정신머리가 있어야 하고, 어떤 정리가 되어진 것에 대해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내 성격도 영향이 있겠고 좋은 글을 보여야 한다는 욕심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그리고 사회가 원하는 양식있는 글을 써야한다는 관념도 있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나는 뿌연 안갯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고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다. 명상이나 기도를 계속하고 평정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차분하게 머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을 할 뿐 아니라, 무의식에는 두려움과 불쾌함들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있고,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감정과 생각들로 의식도 어지럽다. 특히 요즘처럼 국가적인 불안 요소와 슬픔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발산하는 글쓰기의 첫 구절은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오늘 내가 첫번째로 쓴 문장은 '글쓰기가 쉽지만은 않다.'였다. 그랬다. 글을 쓰고 싶었는데, 무언가 나를 드러내고, 발산하고, 정리하고 싶었는데 선뜻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중간한 감정으로 뭉뚱그려진 상태로 우울했다. 무엇이든 넘치면 비워지는 것 같다. 답답함과 모호함들에 싸여있던 상태가 나를 극도로 힘들게 하자 결국 그것들을 확 비워버리려 한다. 그리고 빨리 민낯의 마음에 닿고 싶어한다. 글쓰기가 나와 만나는 소통창구 역할을 해주고 있다.


글쓰기의 치유적인 효과는 임상적으로 이미 검증이 되었다. 실증적인 미국의 저널학파에 의해 보자면 정서적, 육체적, 사회적인 영역 모두에서 글쓰기는 유용하였다. 줄리아 카메론이나 나탈리 골드버그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은 글쓰기로 자신을 치유하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의 나도 거칠고 솔직한 생각들을 밖으로 내보내 글로 표현할 때, 의식과 무의식과 연결되고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최근 칼 융이 만든 '적극적 상상' 이라는 명상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밖으로 내보내 의식과 통합하고 전체성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그림그리기나 예술적 창작의 방법도 가능하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되는것처럼 말이다.  물론 치료자에 의한 유도가 있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자신 안의 무의식에 매몰될 우려가 있는 나약한 사람이나 성찰을 하지 못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가능하다 한다. 먼저 자신에게 조용히 침잠한 후, 떠오르는 심상을 만난다. 심상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인격화하고 대화를 한다. 압박감을 느끼거나 힘들어도 대화를 계속한다면 언젠가 변해있는 심상을 보게된다. 계속 명상을 하면 다른 심상이 나타나는데 그때는 새로운 심상과 다시 대화를 하게 된다. 어느 시점에 자신에게 성찰이 오고 체화되면 명상을 마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비슷하게 차용해서 글쓰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머물며 생각을 걷어낸 자리에 나에게 떠오른 심상은 러시아 인형이었다. 겹겹이 싸여 숨막히게 갇혀있는 인형을 보았다. 그런데 나는 가장 가운데 있는 인형을 실체로 보는 것 같았다. 그 아이를 그려보니 눈과 입술 꼬리가 내려간 울상이었다. 이름을 나나라고 짓고 글쓰기로 대화를 했다. 나나는 미래가 두렵고 세상이 두려워 겹겹이 보호를 해주는 그 안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한데 막상 자신이 만든 세상이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고 했다. 나는 사실 대단한 말을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저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힘들어도 자신을 바꾸라고 했다. 그러면 나나를 감싼 여러 겹의 껍질도 억압이 아닌 보호가 될 거라고 했다. 먼저 힘을 내고 심플하게 바라보라고 충고했다.


대화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지만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지도 하나를 엿보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음이 답답하구나, 마음이 두려워 하는구나, 마음이 화가 났구나, 마음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하는 모양새를 아니 이상하게도 가벼움을 느끼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아주어 안도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아도 정돈된 느낌이 되었다.


글쓰기에는 힘이 있다. 나를 평화롭게 하고 정돈되게 하는 그런 힘이 있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미루게 된다. 잘 써야 하고, 말이 되야 하고,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런 틀을 벗어나기가 참 힘들다. 오랫동안의 교육과 성격과 강박이 나를 누른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무얼 하라고 지시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설령 그런다해도 그걸 부응해줄 이유는 없다. 자유로운 글쓰기를 꿈꿔본다. 말이 안되는 이상한 글을 당당히 연재하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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