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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상 Oct 09. 2022

관계에 감사한다.

불교의 연기론에 기대어 위로받는 새벽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어제처럼 아무리 자보려해도 잠은 오지 않고 몸이 더 아파오는 새벽이면 내가 뭘하고 있지하는 의아한 마음이 든다. 제대로 잘 살고 있나? 무엇을 바라며 몸이 아픈 걸 감수하고 사는 것일까? 대단하지 않아도 죽는 순간 아쉽지 않을 무엇 하나를 성취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불면이 불러오는 허허로움에 젖어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들여다보니 나라는 존재가 참 공허하게 여겨졌다. 아무것도 채워져있지 않고 전혀 풍요롭지 못한 허허벌판같았다. 몸 마음에 대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지만 할수록 모르는 부분이 커지는 기분이다. 절대적 진리는 모른다쳐도 만나는 학문들 모두 나에게는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의 연기론은 모든 사물의 본질은 공한 것이며 그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 의미지어질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변의 환경에 따라 나라는 본질도 바뀐다고 한다. 처음 불교교리를 접했을 때는 와 닿지 않는 이야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불교는 공부할수록  현실을 집요하게 탐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론만 해도 그렇다. 잠 못드는 새벽 마주친 내가 조금이라도 실체로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의 나이니 말이다.


김광규시인의 <나>라는 시 속의 나는 누구의 아버지고, 삼촌이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형이고, 동생이다. 그 외에도 이웃집 사람이고, 사회 안의 일원이고, 국가를 이루는 국민, 나아가 우주시민까지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존재와의 관계나 도움이 나를 존재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관계와 영향이 있기에 텅 비어있는 나라는 존재가 그나마 가능할 수 있는 것만 같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비어있는 나에게 기댈 존재 하나가 없다면 쉽게 내가 해체될 것 같다는 두려움, 공황상태까지 가능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구에 의지하는 내가 아닌 진짜 나는 누구인지 물으며 시를 끝내고 있다. 하지만 불교교리 대로라면 나는 연기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 본질인 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나는 늘 그럴듯한 나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별 볼 것 없는 나를 직면하게 될 때면 허망함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어제 새벽의 나처럼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집착하는 것에서 고통은 시작되니 집착을 버린 비워진 내가 되라고 하신다. 나를 텅 비우고 나에게 주어진 인연들과 환경에 최선을 다하여 내가 저지른 업을 씻고 도에 이르라 하신다.


그러니 무언가 이루고 성취해야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관계 속 나로 살아간다면 무상하고 변화하는 순리대로 살아지지 않을까? 나를 이루는 무엇도 와 닿지 않아 허망하고 외로울지라도 나와 함께 해주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주어진 직장과 가정을 생각하며 머물 곳에 감사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는 변화하는 생명체임에 감사하지 않을까?


나를 존재하게 해준 관계들에 기대어 힘을 내본다. 불면의 새벽시간 공허함으로 가득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 한다. 나를 둘러싼 존재들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더 비울수록 세계는 더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며 좋은 방향으로 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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