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려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이 고백은 평생을 독서인으로 지낸 연암 박지원의 것이다. 책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를 읽고 연암에게 많이 배우고,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었다.
운동신경이 많이 부족한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활동적이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는 탓에 어른이 된 지금도 책을 읽는다. 내 책 읽기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약 3~4년 전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소설이었다. 너무 편협하게 읽은 탓에 인문서를 읽으려 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 손을 놓게 됐었다. 내가 겪은 과오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여러 학부모 강연을 찾아다녔다.
교육 지원청에서 하는 한 학부모 교육에 갔었다. 목적은 초등 저학년에서 벗어나는 쌍둥이 아들에게 글 밥이 많은 책, 여러 분야의 책을 읽히고 싶어 그 방법을 구하는 것이었다. 세 번에 걸친 강연이 끝나고 마지막 강연에서 사회자가 ‘엄마들을 위한 책모임’을 꾸릴 계획이니 희망자들은 신청하라고 했다. 혼자서 강연에 갔던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낯가리는 성격에 혼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모임에 가기 위해 나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서 참여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책 모임을 시작했다. <책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2017년 6월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나는 여러 분야의 책을 즐기며 읽게 되었다. 편협한 내 관심사 안에서만 읽던 책이 그 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또 베스트셀러이든 고전이든 절판된 책이든 멤버들의 생각이 하나로 일치한 적이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없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여러 권의 책을 머리에 마음에 담고 돌아간다.
여럿이 함께 읽는 즐거움에 젖어 있을 때, 우연히 글쓰기 강연을 듣게 되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끝난 일, 친구 집으로 파자마 파티에 간 아이들, 딱 그날에 있던 강연. 온 지구가 ‘너는 글을 써야 해.’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일회성 강연이 5개월의 수업으로, 수업을 마치고도 모임이 구성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글이라고 할 수 없는 문장의 나열이 점차 구색을 맞춰 갈수록 나는 내 삶을 진정으로 살게 되었다.
글을 잘 쓰고 싶을수록 책을 더 읽게 된다. 글쓰기를 배우기 전에는 책을 읽으면 마냥 좋았다. 지금은 책을 읽으면 책 속의 문장이 짜임이 부럽다. 내 손에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그것들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 별에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나는 필사를 시작했다. 혼자서 책 한 권을 오롯이 적어본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에세이 쓰기 모임에 나 말고도 필사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했다. 이미 책 읽기, 글쓰기를 같이 해본 경험들이 있는 우리다. 혼자서 외롭게 필사를 하다가 함께 할 이들이 생기니 당장이라도 별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얼마 전부터 아이들도 필사를 같이 한다. 오늘 내 곁에서 같이 필사하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나도 엄마처럼 글을 쓸 거야. 내가 책을 쓰고 다른 사람이 내 책을 필사하면 정말 좋을 거 같아.”
내 글은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데 책을 쓰고 싶은 열망은 자꾸만 자란다. 내 글을 읽어주는 아이들이 그 열망을 더 뜨겁게 해 준다. 에세이 쓰기 선생님들과 같이 하기로 한 ‘독립출판’은 내 열망에 기름을 부어준다. 활활 타오르는 열망을 가슴에 간직하며 글을 모아 어디라도 두드려 볼 날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