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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사람들

사람이 꽃인가보다.

혜숙이를 찾았다.

지금은 혜숙이가 아니라 막달레나 수녀님이지만^^;;;

나에게 혜숙이는 고유명사같은 존재라서 글에서는 혜숙이로 쓰고 싶다.

세례명 막달레나

종신서원 하기 전에는 안투사가 세례명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안투사라는 세례명으로 살고 있고 혜숙이는 막달레나수녀님이 되었다.


내가 세례를 받으면서 다섯살, 두살, 한 살이었던 아이들도

함께 유아세례를 받았고 그 때 우리 아이들의 세례명은 

혜숙이가 지어서 편지로 보내왔었다.

1999년 4월 칠곡성당 세례식

벽돌같은 핸드폰이 이미 있었을 때였지만 내것이 아니었으니

아마 혜숙이랑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던것같다.

수도자 생활을 하고 있던 수녀님이라 전화 주고 받는 시간도

불편했던지 우리의 통신 수단은 편지였었다.


내 자식 이름 지을려고 해도 옥편도 뒤져보고 뜻풀이도 하면서

평생 쓸 이름, 잘 지어줘야지 고민하는게 작명인데

혜숙이는 친구 아이들 세례명을 지으면서 얼마나 고심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미안한 부탁이었고, 평생 고마워 할 일이다.


1999년 대구 칠곡 성당에서 예비신자 반에 있을 때

세례명을 무얼로 할까 생각했었다.

세례받을 날이 가까워질수록 고민하고 혜숙이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카타리나,안젤라,세실리아, 소피아,데레사,수산나,헬레나

딱 듣기에 예쁜 이름들을 체쳐두고

나는 Anthusa(안투사)를 나의 세례명으로 쓰기로 했다.


"처음 들어보는 세례명입니다"

내 세례명을 말하면 신부님도, 수녀님도, 신자들도 대체 반응이 그랬다.

친구에게서 받아 온 소중한 세례명을 신자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수도자분들도 처음 들어 본다 하셔서 수도회에 따로 문의를 해 본적도 있었다.

 8월 22일이 축일인 성녀 안투사는 귀족이었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도 살아남아 23년을 더 살다 순교하신 성녀셨다.

귀족이었으며, 운까지 좋았던 성녀 안투사

나는 혜숙이가 쓰던 안투사라는 세례명을 1999년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고

천주교 신자로 죽을 것이니 죽음까지 함께 가지고 갈 이름이 Anthusa(안투사)일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못만나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산다.

제주도까지 다닌 이사, 세 아이 육아와 서른 셋에 다시 다닌 학교, 예체능하는 아이들

뒷바라지,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지나온 세월만큼 나이를 먹고 아이들은 이제 컸다.

늘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훅하고 등에서 가슴으로 바람같은게 지나갈 때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혜숙이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아이들이 출신 국민학교에 대해서 우월감 같은게

있었는데, 노란색 교복을 입고 다니던 군산의 사립 학교인 제일 국민학교와 

초록색 교복을 입었던 군산 부속 국민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그랬었다.

혜숙이는 부속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잘난체도 하지 않았고 털털했었다.


운동도 잘해서 구기대회 때 혜숙이가 공을 차면 다른 애들보다 더 멀리 날아갔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는 활발하고 목소리가 걸걸했던 여학생이라 마음까지 그럴거라

착각할 수 있으나, 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교복을 입었던 우리들이 간절기 교복을 입고 

운동장 조회를 섰을 때 백귀남 가정 선생님이 혜숙이를 조회대 위 단상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교복 치마가 너무 길다고 했었고 전교생 앞에서 

교복 지적을 당한 혜숙이가 교실에서 서럽게 울었던게 생각난다.


가정 선생님은 줄 서 있던 아이들 사이를 다니면서 두 명을 데리고 나갔는데

한 명은 치마 길이가 너무 짧다고, 혜숙이거는 너무 길다고 전교생 앞에서

조회대 위에 세워두고 말을 했으니

지금같으면 학생 인권침해이고 예민한 중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말도 안되는 선생님의 횡포였지만 그땐 그랬다.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입으라고 다들 교복을 크게 맞춰줄 때여서 내 교복도

헐렁거렸고 다들 그렇게 맞춰 입었는데 가정 선생님은 콕 집어서

지적했지만 3년을 입을 것 같았던 교복은 2학년 때 사복을 입고 사라졌다.


사복을 입으면서도 메이커 바람이 불어서 난리였지만

교복도 어디서 맞췄는지가 대단히 중요했던 군산여중 우리 반 애들은

수산나에서 맞췄냐, 미도양복점에서 맞췄냐가 중요해서 

겨울 동복은 나도 조르고 졸라 수산나에서 맞췄더니

망할놈의 교복 자율화로 두 해 겨울을 못 입고 말았다.



한 동네를 살아서 고등학교 때 함께 명산동 언덕배기를 넘어

학교를 갔고, 겨울 방학 때는 등용문 독서실에서 공부를 함께 했고

고 3때는 동네의 고려 독서실을 다니며 웃을 일을 나누고 함께 슬퍼할 일을

삼학동 가로등 아래에서 공유했던 친구다.


못보고 이십년이 지나갔어도 세월 중간중간에 한 번씩 생각나서

길에서 회색 수도복을 입고 수녀님이 지나가면 쳐다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한 번 볼수도 있겠지만 못보게 돼도 

내가 안투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니 이걸로 된 게 아닌가 마음을 토닥이기도 했다.


혜숙이를 찾았다.

멋진 수녀님으로 소임을 다하면서 살고 있는 걸 홈페이지에서 봤고 전화통화를 했다.

누군가 찾아줘서 번호를 받았고 여전히 목소리는 걸걸한 수녀님이다.

잠깐 울컥했고, 친구는 웃었다.

나는 올 가을이 섭섭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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