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나경오바짱교토유학이야기 May 7. 2020
"우리 큰 딸은 똑똑하니까, 뭐든 잘할 거다"
돌아가셨으니 뭐든지 미화가 되나
아직도 살아계셨다면 아마 짜증 나는 일 한가득일 우리 아버지
2014년 12월 16일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천년만년 그렇게 목소리 크고 짜증 나는 아버지로 우리 곁에서 사실 줄 알았는데!
심근경색으로 스탠트 시술을 받은 적도 있으시고 전립선암 초기로 수술도 받으셨고 당뇨도 있으셔서 아버지
이의 반은 임플란트였지만 새로 해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새 이빨로 맛있는 거 드시면서 우리랑
같이 오래 살 줄 알았다.
집에서 쓰러지신 지 딱 이주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고 인생이 허무했다.
2014년 12월, 둘째는 고 1, 셋째는 중 3, 큰애가 대학교 1학년 군대에 있을 때였다.
쓰러지시고 딱 2주 만에 본인의 성격대로 급하게 마무리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문안을
나는 세 번이나 갔나 싶다.
주말부부로 전주에서 지냈던 남편이 나보다 더 병원에 자주 갔고 임종도 남편이 지켰다.
분명히 긴 병이 아니었음에도 내 부모라 심리적으로 긴 병처럼 느껴지던 2주였고 마음이 괴로워서
장례식 3일은 하루가 길었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가장 친한 친구가 남편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데 친구를 보고도 "저 사람이 누구지" 치매환자처럼 얼굴을 잠시 분석하고 나서야 내 친구
희정 이인 줄 알았었다.
아버지 돌아가시던 2014년 큰 아이 승범이는 오래도록 붙들고 있던 바이올린으로 결국 중앙대학교 음악과에 합격을 해서 14학번 음대 오빠가 되었다.
공부만 해서 대학을 갔어도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에 쉽지 않은 입시는 없지만 공부는 공부대로 챙겨야 되고 실기는 실기대로 해야 되는 음대 입시!
악기 시키는 부모들은 자녀가 고3 현역일 때 한 번에 끝내주는 것만 해도 평생 받을 효도 다 받은 거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았어도 부모의 병치레는 2주도 길더니 자식의 뒷바라지는 길어도 긴 줄을
모르는 게 부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1년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아이들이 하는 작은 연주회를 보거나 할 때 아버지도 이걸 함께 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울고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만 나와도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살아계실 때는 짜증 나는 일 , 만 가지 더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리움이 오만가지였다.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나는 봉투에 저만큼 담아서 용돈 한 번 드리지 않았었는데 승범이 합격했다고
아버지한테 받았던 축하금 봉투다.
큰애가 중앙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참 좋아하셨는데 재수했던 둘째 서울대학교 합격하고 셋째가
전국체전 나가서 계주에서 금메달 땄다고 하면 내가 해야 할 효도는 우리 아이들이 다 해준 게 될 텐데
승범이 대학교 입학한 것까지만 보시고 쓰러지셨을 때 집으로 온 119 구급대원을 보고
"승범아"라고 말씀하신 게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하셨던 말씀의 전부였다.
그때 군인이었던 승범이와 정복을 입은 구급대원을 착각하셨던 것 같다.
딸이 넷, 아들이 하나
귀남이 후남이 구조가 될 법도 한 우리 집에서 딸이니까 저만치 서있어라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랐고
우리 아버지는 다른 집 아버지들하고는 달랐다.
"이제는 딸들도 사회생활하고 살 거고 법이 바뀌어서 딸들도 재산 상속받는 시대가 올 거다"
"우리 큰딸은 똑똑해서 뭐든지 잘할 거다"
큰 놈이 잘해야 동생들도 잘한다고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줘서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를 보고 온 날도 수험표 뒷 면에 답안지를 적어 오라고 해 저녁에 구해 온 정답을 맞혀보면서 "이래서 대학 가겠냐고" 고입을 본 딸에게 대입 걱정을 하면서 화를 내셨다.
체력장 20점 빼고 180점 만점에 156점을 맞았으니 못 본시험도 아니었는데
"수고했다"소리 한 번 못 듣고 혼을 내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체력장 합한 점수 176점과 그날의 아버지
악행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큰 딸은 똑똑해서 다 잘할 것이다"
"물문 다리 옆 논은 우리 큰 딸 몫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돈 두필지에 이후 엄마가 불린 많지 않은 우리 집 재산이지만
논이 들어앉은 자리가 가장 좋은 "물문 다리 옆 논"은 우리 큰 딸 거라고 내가 그 소리도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한테 백번도 넘게 들었지만 상속도 못 해주시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물문 다리 옆 논도 물 건너갔고 그걸 애써서 받고 싶은 마음도 없을 만큼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꼈다.
아버지도 급하게 돌아가시고 엄마도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도장 잘 찍어 주라고 딸들한테만 서둘러서
현금으로 상속을 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며칠이나 됐다고 엄마가 그러는 것도 싫고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받았다고 하기도 싫어서 딸들 중에서 나만 엄마 돈을 싫다고 안 받아버렸다.
많은 걸 받은 사람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를 만큼의 현금이었고 엄마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을
"현금 상속"이었다.
2014년 12월에 엄마가 딸들에게 준, 엄마에게는 컸고 딸들에게는 작았던 그 현금도 받기가
싫었을 정도로 아버지 돌아가신 게 우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단받지 않은 "우울증"을 그때 겪은 것 같다.
그랬으니 사실 현금이 가장 필요했던 집은 우리 집이었는데 돈을 싫다고 했으니 미쳤거나 우울했거나
둘 중 하나지 싶다.
레슨 비라는 건 카드라는 게 없다. 꼬박꼬박 현금으로 지급되는 거라 엄마가 주신다는 돈이 나야말로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없음 없는 대로 레슨 덜 보내면 되고
거울 자주 본다고 예뻐지고 레슨 자주 간다고 잘하겠냐
은진이만 잘하면 된다 생각했지만 전쟁터에서 총알 떨어지면 죽는 거고 거울도 자주 보는 놈이 예뻐진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018년도 4월 6일에 교토의 Ymca 국제 복지 전문학교 일본어과에 입학을 했다.
첫 시험을 치르고 반 아이들보다 일찍 답안지를 내고 카와라마치 산죠의 쇼핑가를 걸어오는데
클래식 음악이 크게 들려 왔다.
시험 준비를 하느라 스트레스 받았던 것과
한 달 가량 혼자서 생활하던 교토에서의 힘들었던 마음들이 엉켜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나왔고
아버지가 보셨으면 나를 자랑스러워하셨겠다 생각을 했다.
시아버지는 떠나는 날 비행기안에 있던 나에게 그렇게까지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너를 아무래도 이해 할 수가 없구나.애들 밥이나 잘 해주고 그럭저럭 살지
혼자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니 제 정신이냐"
그렇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라면
"나는 너를 이해한다.우리 큰 딸 어디서든 잘 하고 멋지게 살 것이다.나는 너를 응원한다"
"우리 큰 딸은 똑똑하니까"
그러셨을것같아서 혼자 그렇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