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 안의 열등감

내 안의 그대 "열등감"


1995년 내 아들 유승범이 전학으로 겪었던 감정은 "상실" "그리움" "아쉬움" 그런 감정이었다면

1969년생인 내가 전학으로 겪었던 감정은 "그리움" 이외에 "열등감"이었다.


지금은 스물여섯 살이 된 큰 아이 유승범 군의 고증 없이 내가 기억하는 대로만 2화"우리 승범이"를 쓰고 나서

뒤늦은 고증에 들어갔다.


"승범아, 엄마가 전학에 대해서 쓴 글 봤어?"

"응"

언제나 나는 길게 질문하고 아들의 대답은 한 음절이 기본이다.

"엄마가 네가 전학했을 때 힘들어했다고 썼는데 그때 네가 힘들어했던 거 맞지?"

어제 일도, 불과 서너 시간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진 지 오래된 나의 기억력이지만

오래전 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내가 아들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재차 확인 작업에 불과했다.

내 아들 유승범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에 대해서 힘들어했다는 나의 기억에 대한 확인 작업 같은 거였다.

"아니 내가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니 이런 망아지 같은 자식을 봤나

그때 엉엉 울기도 했었고 짜증도 많이 내서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었는데 이제 와서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랬었나"

어디선가 까마귀 날아가는 소리 "까아악 까아악"를 BGM으로 넣어 마땅한 아들과 엄마의 대화

하지만 서로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게 다를 수가 있나 싶어서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럴 수 도 있다 싶었다.


"너는 어떻게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 기억이 안 나"

그때 힘들었던 감정은 일시적이었을 뿐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한 줄 상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힘들었던 전학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나는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학"하면 떠오르는 연관 단어가 모두 부정적인 것이 된 것이고

승범이는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이후 차차 극복이 되었을 만큼 제주도는 온천지가 아이들의 놀 거리였다.

여름밤에 외출했다 돌아오면 깜깜한 집안에서 반딧불이가 미리 불을 켜고 깜빡거리고 있었고

날 좋은 날이면 도마뱀이 바위 위에서 몸을 말리던 해발 400 고지는 아이들에게 집 안팎이 모두 놀이터였다.

관사의 진입로에 노루가 뛰어다녔고 베란다 천장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지네조차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처럼

여겨지던 제주도의 생활이 전학의 힘듬을 잊게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 안의 불편했던 감정들이 "열등감"인 줄도 모르고 6학년을 마쳤다.

기를 쓰고 공부는 했지만 성적이 확확 회복이 되지는 않은 채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초등학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세계는 넓어졌다.

지방의 작은 도시의 6학년 때의 일 년 생활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만큼 중학생이 되고 나니

"세상이 이렇게 다양하구나"

"잘난 줄 알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 애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공부는 그럭저럭 뒤지지 않을 만큼 올라왔으나 음악 시간에 실기시험을 보는데 음악 선생님이

실기 시험으로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은 중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치지 못하던 내가 들어도 "참 못 친다"

라고 들렸던 실력 정도로 피아노를 떠듬거리면서 치던 아이들도 실기 시험으로 피아노를 치면 만점을 주었는데 리코더를 불었던 아이들은 아무리 잘 불어도 만점을 주지 않으셨다.

실기시험의 종류는 딱 두 가지였다.


"피아노"와 "리코더"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서 당차게 자기 말은 하던 은주라는 아이가 음악 선생님한테 따지듯이

질문을 했었다.

"선생님 피아노 치는 애들은 아무리 못 쳐도 만점을 주시고 왜 리코더 부는 애들은 점수를 안 좋게 주시나요"

1981년에 선생님한테 그런 질문을 한 다는 것은 맞을 것을 각오하고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던 음악 선생님의 평가에 은주는 자기 나름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질문을 한 것이다.


전학 오기 전까지 리코더도 불지 못했던 나는 전학 와서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에서 리코더 합주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를 노래 부르면서 손뼉 치는 게 아니라 리코더로 불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고 리코더조차 죽을 둥 살 둥 배워서 겨우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런 리코더를 무시하다니,

은주가 했던 질문이야말로 내가 했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피아노를 쳐서 음악 실기시험 점수를 잘 맞은 아이들은 당황했을 테지만 리코더를 잘 불고도 점수가 좋지

않았던 아이들은 은주를 멋진 아이 바라보듯 동경의 눈초리로 바라봤을 터이다.

하지만 1981년 3층에 있었던 음악실에서 아이들이 은주를 어떻게 봤었는지는 솔직히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음악 선생님의 유치하고도 황당한 답변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피아노를 배워"

은주의 당참보다 선생님의 유치함이 더 놀라웠고 열네 살이었던 내가 듣기에도 저걸 대답이라고 하냐 라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교사가 아이들을 건방지다며 아이들을 때려도 아무도 그걸 집에 가서 이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너네 집에 이거 없어?""갖고 싶으면 너도 너네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

어린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하나도 다르지 않을 법한 음악 교사와 중학교 1학년짜리 은주의 대화가

지금까지 기억이 나는 건 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세상이라는 게 이렇게 불공평한 거구나"라고 그때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좋게 말해 불공평함이고 뭐지 이런 더러운 기분은 아마 그쯤으로 표현해야 딱 맞을 표현일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으로 인해 세상에는 시골 초등학교와 도시의 초등학교가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면

중학생이 되어서는 사립 초등학교와 내가 졸업한 공립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분법이면 통하던 시절이었다.

도시 아이들과 촌 아이들

도시의 초등학교와 시골의 초등학교

잘 사는 집 아이들과 못 사는 집 아이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립 초등학교와 공립초등학교


사립초등학교와 공립 초등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모두가 잘난 아이들로 보였던 내가 졸업했던 초등학교의 아이들이 실상은 그저 그런 보통 집안의 아이들이었다는 걸 중학교 때 알았다.

사립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은 바이올린이나 현악기들을 연주할 줄 알았다.

피아노만 쳐도 음악 선생님한테 우대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니 세상 놀랄 일이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는 현악부가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아는 현악기는 모두 바이올린인 줄 알았다.

매일 아침 학습 부장이 칠판에 적어 놓은 아침 자습을 노트에 적고 풀 던 아침 시간

현악부 아이들은 모두 자기 악기를 들고 음악실에 모여서 연습을 했었다.

음악실은 3층이었고 우리 반은 1층이었지만 현악부 아이들이 연습하는 소리는 아침 자습 시간 내내 들려서

도무지 자습에 집중할 수 조차 없었다.

우리 학교는 1년에 한 번씩 시내에 있던 극장을 빌려서 학교의 행사를 했었는데 음악 선생님 지휘로 현악부가

연주하는 것으로 학교의 축제가 시작되었었다.

그걸 연습하느라 봄부터 현악부 아이들은 바빴었고 자습도 하지 않고 음악실에 올라갔다가 1교시 전에

허둥지둥 들어오던 현악부 아이들은 대부분 사립 초등학교 출신 아이 들었다.


그때까지 사립 초등학교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나는 친구가 알려줘서야 제일 국민학교라는 사립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은 노란색 교복을 입고 가방까지 모두 노란색이어서 병아리들이라고 놀린다는 것과 그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모두 한 가지의 악기는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악 선생님이 학기 초에 현악부를 뽑을 때 출신 초등학교를 왜 물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현악부를 뽑는 다면서 할 줄 아는 악기가 뭐야 라고 묻지 않고 여기 제일 국민학교 졸업한 사람 손들어봐 라고 했었는지를 말이다.


나는 음악 시험 시간에 리코더를 불어서 점수가 좋지 않았음에도 은주만큼 그 일이 부당하다고는 느끼지

못했지만 현악부 아이들의 연주 소리는 갈수록 듣기가 싫어졌다.

아이들이 연주를 못해서도 아니었다. 우리 학교 현악부는 악기 구성이 콘트라베이스까지 있어서 기본 구성이

되어 있던 현악 부였기 때문에 소리가 괜찮았었다.


내가 아이들의 소리를 듣기 싫어했던 것은 "질투심"때문이었다.

극장을 빌려서 하는 축제에서 현악부 아이들이 흰 블라우스를 입고 한 손으로 악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검정

치마를 질질 끌며 무대 앞으로 나 올 때 우리 반에서는 공부도 못하고 별 볼일 없어 뵈던 아이들이 굉장히

멋진 아이들처럼 보였다.

현악부는 별일 없으면 아침마다 모여서 연습을 일 년 내내 했었고 나중에는 음악실에서 연습을 하지 않고

운동장에 있던 가건물 같은 곳에서 했는데 교실이 있던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건물이었지만 소리는 여전히

잘 들려왔다.


현악부 아이들이 주로 연습하던 곡은 "모차르트의 작은 밤의 소야곡"이었다.

도입부 현악기의 정신없던 멜로디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세레나데 13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가 독일어의 제목이며 모차르트의 음악 중에서도 특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

음악 감상 시험에서 외우고 알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은주에게 "피아노"가 애증의 대상이었다면 모든 현악기는 바이올린으로 보였던

중학교 1학년 때의 나에게는 "바이올린"이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레슨 선생님 댁인 애월 납읍으로 가기 위해 파란색 세피아에 탈 때면 관사의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모두 우리 승범이를 쳐다봤다.

"승범이 형 바이올린 배운데" "승범이 들고 있는 게 바이올린이래"


소심한 성격이었던 우리 승범이가 조금은 우쭐거리면서 바이올린을 들고 차를 탔고 나는 30분씩 운전을 해서 납읍까지 가는 비포장 산길을 달려서 레슨 선생님 집에 일주일에 한 번 씩 갔다.


뭐든 가르쳐야지 저렇게 망아지처럼 놀게 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관사의 보통 엄마들처럼 문제집을 사다 풀렸어야지 이제 막 전학을 온 초등학교 2학년 큰 아이에게 상의 없이 바이올린을 들이밀었던 것은 바이올린에 대해서 근본적인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런치를 하면서 때로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와 마주하고 이후에는 중학교 1학년 때의 나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다.

승범이는 모를 것이다.

아홉 살 때 시작한 바이올린이 전공이 되어 스물여섯 살인 지금까지 전공도 하고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출발에는 엄마인 나의 열등감이 있었다는 것을,


"내 안의 그대 열등감" 을 말이다.












이전 02화10. 엄마도 유학 한 번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