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공부에는 때가 있더라.

'공부에 때가 없다' 는 고전같은 말씀이 맞지 않더라는 것을 "나미야 잡화점'을 읽으면서 알았다.

눈이 침침하고 글자가 안 보여서 보기가 불편한 단어는 사진으로 찍어서 확대해서 글자를 키워서 읽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공부에는 때가 있구나"


글자가 눈에 시원하게 들어올 때가 공부에 적합한 때였으며, 밤에 책을 봐도 글자가 퍼지지 않을 때가 그 때였음을, 뭐든 시원시원하게 보였던 나이에는 몰랐다.

전철에서 옆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걸 꺼려하는 일본인들의 메이와꾸 정신이 만들어 냈다는 문고판의 "나미야 잡화점"은 글자가 작고, 한자위에 친절하게 달려있는 후리가나는 더 작다.

결론은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술술 읽어가다가 막히는 단어는 사진으로 찍어서 확대해가면서 읽고 있는 중이다.


뭐든 시원하게 보였던 나이에 지금처럼 책을 열심히 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때는 책 말고도 세상에 보고 싶은게 너무 많았었고 나의 관심은 뭐든지 학교 밖에 있었다.

일문과를 다녔으니 1987년에 지금처럼 일본어에 빠져서 공부의 재미를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고, 설령 1987년 스무살의 일문과 학생이었을 때로 돌아가더라도 공부에 미친 여자애들이 몰려 있던 무서운 일문과에서 살아남기가 쉬운 일이었을까

아직도 기억난다. 전단지 뒷면에 교수의 말을 속기사처럼 쓰면서 수업 내용을 모조리 적던 우리과의 도 땡땡

물론 그런 애들만 있었 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 애들이 많은 과일수록 공부에 열 올리는 애들이 많은게 객관적인 현상이니 속차리고 1987년으로 돌아가도 탑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쁜 여자애들 좋아했던 지도교수, 나는 그 사람을 진짜 싫어했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결혼하고도 가끔 꿈을 꿨다. 능글맞은 그 웃음과 가끔은 우리 과 여자애들을 볼 때 학생으로 보는게 아니라 여자로 보는게 우리들의 눈에도 읽혔던 그 분을 정말 싫어해서 내가 일본어 공부가 싫었던 말도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분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대학동기인 희정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하하하 하고 웃을 일이지만.


2학년 때 중급 일본어 시험 보던 날, 초여름이던 5월에 시험에 늦어서 인문대 반 언덕배기를 뛰어가서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목덜미는 땀에 절어 있었고 마지막 자리에서 시험을 볼 때 그 분은 내 목덜미에 땀이 났다며 맨 손으로 쓱쓱 몇 번이고 왔다갔다 문질렀던 기분나쁜 일이 있었다.


공부도 하지 않다가 그때는 어쩐 일로 공부를 좀 해서 아는 단어가 나왔는데, 아마 그때 시험문제 중에 

港(みなと)- 항을 미나토라고 일본어로 써 넣는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남이야 목 덜미에 땀이 나든지 말든지 가만있을 일이지 중년의 교수가 스무살 언저리의 여학생 목덜미를 왜 닦아주고 지랄이었는지, 가뜩이나 생각이 날 듯 말듯 약올리는 문제들을 쥐어짜가면서 풀다가 얼마나 화가 나던지 시험 끝나고 교수실로 찾아가서 따졌었다.


허허 웃으면서 그게 그렇게 화 낼 일이냐며 어물쩡하게 넘어갔던 교수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이미 우리들끼리는 다 아는 이름이고 그 분은 은퇴해서 시골에서 여생을 잘 보내고 있을 것이며 유감스럽게도 내 남편과 이름이 두 글자나 같다.


그 양반이 지금 내가 일본어 소설을 읽는데 취미가 생긴걸 알면 혹시 돌아가셨다면 저승에서 한 번 쯤 돌아와서 확인하고 갈 지도 모를만큼 놀랄 일이지만, 요즘에는 꿈을 꾼 적 없으니 살아 계신게 틀림없다.


이렇게 재미있는게 그때는 재미없었다는게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다싶다.

다만 탐정처럼 둥근 돋보기로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게 웃기기는 하지만, 그래서 알게 된게 "공부에는 때가 있다" 라는 확실한 사실. 

공부 뿐만 아니라 뭐든지 때가 있더라. 

작가의 이전글 태풍과 잼버리, 우리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