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에 나눔으로 올렸던 피아노를 결국 18만 원을 주고서야 처분할 수 있었다. 1985년부터 2025년까지 41년 동안 함께 했던 영창 피아노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 피아노는 오늘 우리 집을 떠나갔다.
군산 영동 영창 피아노 악기사에서 아버지와 함께 당당하게 피아노를 고르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은 쉰여덟이 되었고 피아노는 마흔한 살이 되어 내 곁을 떠나갔다.
딸이 넷, 피아노 배우기 싫다던 둘째 여동생만 빼고 세 자매가 한 피아노집을 다녔다. 그때는 뭐 학원이 아니라 '피아노 집'이라고 부르던 때였다. 한 명 당 2만 원, 셋이 배웠으니 6만 원이었을 텐데 엄마는 셋을 보내니 깎아주셔야 한다고 나를 앞세우고 갔던 피아노 집에서 선생님에게 교습비를 흥정했고 나는 그게 너무 창피했었지만 엄마는 아버지 월급 날짜에 정확히 맞춰서 교습비를 보냈다. 빌려준 돈은 못 받았을망정 남에게 줄 돈은 손이 오그라져도 줘야 되는 게 우리 엄마였다.
세탁기 있는 사람, 칼라 텔레비젼 있는 사람, 그런 걸 공개적으로 묻던 1980년대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피아노는 묻기에도 벅찼는지 가정환경 조사 문항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음악실에 봤던 검은색 영창 피아노는 실기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질투의 화신이었다.
중학교 때 우리는 3층 볕 잘 들었던 음악실 창가에 있던 검은색 영창 피아노로 음악 실기 시험을 봤다. 같은 곡이라도 리코더라면 연주처럼 잘 불어도 어디서라도 점수를 빼서 만점을 주지 않았던 음악 선생님은 같은 곡을 피아노로 치면 무조건 점수를 잘 줬기 때문에 우리 반 은주는 음악 선생님께 당당하게 물었다.
"집에 돈이 없어서 피아노를 못 배웠는데 피아노로 실기 시험 못 본다고 점수까지 깎는 건 불공평하십니다"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당당하게 손 들고 대들듯이 말했지만 음악 선생님은 핀잔을 줬었다.
치사빤스 같은 말로 음악선생님은 은주를 혼냈고 안경 낀 은주가 우느라 안경을 들어 올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니 나는 은주가 음악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맞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1981년은 그런 해였다.
피아노 좀 친 아이들은 음악실에 일찍 올라가서 젓가락 행진곡을 치거나 지금 생각해 보면 잘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 실력으로 뭔가 조금이라도 피아노를 치려고 안달이었다.
내 인생에서 남이 치는 젓가락 행진곡을 가장 많이 들었던 때가 중학교 때 일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주유소 집 친구가 생일에 초대를 해서 갔더니 그 집 거실에 피아노가 있었다.
집도 새로 지어서 멋졌지만 거실에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가정집의 피아노는 그때 처음 본 것 같다.
음악실에서만 보던 피아노가 거실에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함께 갔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피아노를 쳤을 때 나만 못 쳤던 것은 음악 실기시험에서 리코더를 아무리 잘 불어도 피아노 치던 아이들보다 점수를 못 받던 부당함을 넘어서는 눈깔 튀어나올 만큼 쇼킹한 일이었다.
주유소 친구집에 초대받아 함께 놀러 갔던 전교 1등 새침데기 문 땡땡이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전교 1등처럼 치고, 덜렁이 주유소 집 딸 한 땡땡이도 뭘 치긴 쳤고 나만 박수를 치다 돌아왔으니 집에 와서 '엄마, 나도 피아노 배워야겠어. 내 친구들 다 치고 있더라고' 했지만 물론 한 번에 O.K가 나오지 않았고 학교 갈 때마다 문 쾅쾅 닫고, 갔다 와서는 입 내밀고 성질을 며칠 부리고 난 다음 '피아노집'에 다닐 수 있었고
내가 그렇게 삽질해서 길 만들어 놓은 덕분으로 여동생들은 편하게 피아노집을 다니게 되었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 피아노'는 피아노 배운 지 만 4년 만에 우리 집으로 왔다. 아버지는 영창 피아노를 사 주신 걸 내가 결혼할 때까지 남편에게 자랑을 하셨다. 바짓바람의 원조쯤 되는 분이셨던 것 같다.
1980년 중반 전이라 나는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피아노집을 다녔지만 동생들은 실증 나서 그만두고 선생님이 싫다고 그만뒀다. 나만 꾸준히 다녔고 피아노집에서 배우다 교습소라는 간판이 걸린 곳에서 피아노 인생은 끝났지만 간판만 교습소였지 가정집 방에 피아노가 있었고 체르니 40번 중간쯤 치다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피아노는 내가 가지고 나왔다.
남편 직장 발령으로 전주, 대전, 대구, 제주도. 춘천, 수원까지 할 수 있는 이사는 다 해 본 것 같다. 물론 피아노도 함께 가지고 다녔다. 우리 집 아이들 셋은 우리 집 피아노로 바이엘도 떼고 보통 여자애들이 치는 만큼은 칠 수 있도록 내가 가르쳐놨고 아들도 악보보고 간단한 곡은 칠 수도 있으니 우리 집 영창 피아노 참으로 열일, 백일 했다.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피아노가 참 힘든 물건이었다. 꺾이는 각이 좁아서 고집부리고 가지고 온 피아노는 결국 분해해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솜씨 좋은 피아노 업체를 만나 그렇게라도 올라올 수 있었지만 애써서 가지고 온 피아노를 이 집에 사는 10년 동안 몇 번 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피아노는 끝까지 함께 가고 싶었던 물건이었으나 41년이 되던 올 해에는 어떻게든 처분하고 싶은 물건으로 바뀌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살기, 중간에 정리를 한 번 해서 홀가분하게 살기. 그런 마음도 있었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정리대상 1호는 당연히 덩치 큰 영창 피아노였다.
결국 우리 집 피아노는 내가 업자에게 18만 원을 주고 험하게 끌려나가다시피 우리 집을 떠났다.
가는 걸 내가 안 봐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일하고 있는데 피아노 정리해 드립니다. 문자가 와서 바로 일이 진행되었고 대충 상황을 듣더니 견적이 18만 이래서 정리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했다.
고생은 남편이 했다. 입구가 좁아 피아노가 나갈 길이 없어 결국 톱질해서 분해가 되어 나갔다고 하니 뒷정리가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다.
"엄마, 아버지한테 미안하다고 말 해줘. 피아노 오늘 정리하기로 했어"
"괜찮아. 잘 했다. 오래 잘 가지고 있었다"
엄마랑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눈물이 핑 돌고 남편이 보내 온 피아노의 마지막 사진에 마음이 아팠다.
계단이 가파른 3층 주택에서 우리집 피아노가 나가기가 만만치가 않아서 잘리고 쪼개져서 끌려 나갔다.
내 눈으로 봤더라면 아마 울었을것이다.
오래갈 줄 알았던 마음이 반나절만에 정리가 되어서 퇴근하고 남편이 못 치운 나머지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피아노가 빠진 자리가 생각보다 넓어서 보너스 평수를 받은 것 처럼 좋기도 했다.
중학교 때 쳤던 소나티네 책이 아직도 집에 있다. 우리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과거형이 되어 버렸지만 즐거웠던 추억과 소리들과 소나티네 책이 남아 있으니 그걸로 됐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 가는 것. 피아노를 정리한 것은 물건의 정리, 중간정산이지 추억을 정산하는 일은 아니니 그걸로 됐다. 잘 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