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 - 카니발 - 옵티마 - 소나타 y20 - K5
토요일에 차를 계약하고 왔습니다. 결혼 생활 31년에 이사는 열 번이 뭐야^^;;; 스무 번도 더 다녔지만 차는 얌전 떨어 네 번 바꿨고 지금 타는 차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미아가 된 차를 우리가 가져온 거였으니 자발적 의지로는 세 번만 바꾼 것이 되니 이사에 변덕을 열두 번도 더 떨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차에는 얌전이 뭐냐. 새침도 그런 새침이 없었지만 마음이 있다고 해서 바꿔지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차에 돈을 쓸 여유가 우리 가족에게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 차는 세피아. 파란색. 번호판이 4936이었던가. 차 이름이 세피아였지만 내가 운전하고 다녔던 그 차를 우리 아이들은 '엄마 차'라고 불렀다.
남편은 면허가 없이 결혼을 했고 큰 아이를 낳고서야 면허를 땄다. 당연히 아이들은 내가 운전하고 다니는 것을 더 많이 봤고 그래서 '엄마 차'라고 불렀다.
큰 아이는 잘 토했기 때문에 안고 있다가 분유 토 쑈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될 때도 있었다. 그런 아이를 안고 서 너 시간 걸려서 시댁을 다니느니 운전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에 남편이 면허를 늦게 따서 운전을 하지 않았을 때도 나는 운전이 싫지 않았다. 아이 돌보는 것이 네 시간 운전보다 힘든 건 사실이니까^^
인간사 지속성이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면허를 딴 남편은 셋을 돌보던 아기 돌보미에서 운전하는 사람으로 승진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셋 다 우리 차를 '엄마 차'라고 불렀다.
결혼해서 10년 안까지는 일 년에 몇 번가지 않는 시댁이었지만 명절이나 생신에 빠지지 않고 아무리 먼 거리에 살았어도 가족이 모두 함께 다녔었다.
가을에 추석 지나 2주 후에 돌아오는 시아버지 생신에 어지간하면 안 가고 싶어 했던 내 마음과 달리 시댁에서는 오지 마라 소리를 하지 않으셨고 세 아이 합쳐 10살도 안된 어린것들을 세피아 뒤에 태우고 경부고속도로 호남 고속도로 바꿔 타고 시댁을 다녔는데 어느 날 뒷좌석에서 누군가 물병을 쏟고 싸이 흠뻑쑈를 해대는 것에 질렸던 우리 부부는 시댁의 허가 없이 남편만 다녀오는 시아버지 생신을 한 번 치르고 나서야 시댁 행사에서 모두 가야 된다는 공식을 깨뜨릴 수 있었다.
아마 큰 애였던 것 같다. '고맙다. 승범아'
차도 이사를 다니면서 번호판을 바꿔달던 시대여서 전주에서 출고받았던 차를 대구에서 번호판 바꿔달고 다시 전주로 왔다가 제주도까지 함께 이사 들어가서 춘천에서 우리는 세피아에서 카니발로 차를 바꿨다.
대구에서 번호판 교체하러 자동차 등록 사업소를 갈 때 네비도 없던 시절이라 갈 때는 어떻게 물어물어 갔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 파출소에 가서 물어봤더니 순경 아저씨가 '고속도로에 차를 얹으소'라고 하셨다.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던 전라북도 아주머니였지만 언어 감각이 있었고 눈치가 있었던지라 고속도로 타라'는 말로 변환시켜 알아들었고 무사히 칠곡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대구에서 다시 전주, 전주에서 제주도로 이사 가서 토요일 남편이 퇴근하면 우리는 협재 해수욕장, 곽지 해수욕장, 금릉 바닷가, 한담 바닷가로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바다 건너 본토에 시댁이 있다는 물리적이 거리감으로 우리 가족만 잘 놀면 되는 일상이었으니 세피아는 열일을 했던 자동차다. 고마웠어. 세피아^^
검정 카니발은 제주도에서 춘천으로 이사 나와 바꾼 차였다. 애들은 그 사이 점점 컸고 카니발이나 타야 애 셋이 감당이 되었다. 시댁 갈 때나 어디 움직일 때 누워서라도 가려면 딱 카니발이 적당했다. 중고로 사서 잘 탔지만 마음에 들면 재지 않고 덜컥 사버리는 내 성격 탓에 사서 여기저기 고친데도 많았다. '무조건 직진' 본능 탓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두 번 비교를 하지 않아 손해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5년 동안 카니발 타고 동해안 여행도 많이 했고 차 안에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으니 얘도 고마운 차다.
춘천에서 5년 살고 수원으로 이사를 올 때 카니발을 옵티마로 바꿨다. 검은색 카니발에서 옵티마로! 카니발이 가족을 위한 차였다면 옵티마는 나의 생계형 차였다. 초등학교와 문화센터의 강사였던 나는 옵티마로 용인 시골부터 경기도 인근 초등학교와 이마트 문화센터를 부지런히 타고 다녔다. 아이들 픽업도 옵티마가 주로 했다. 수원에서 분당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던 둘째는 출발하는 첫 코스 셔틀버스를 놓쳐서 내가 많이 데려다주었다. 용서고속도로 개통하는 걸 옵티마와 함께 봤다. 애들이 커가면서 함께 놀러 다니는 용도로 차를 쓰기보다는 학교에 데려다주고 태우러 가는 일에 더 많이 쓰게 됐던 반환점이 되었던 차가 '옵티마'였다.
아버지가 2014년에 돌아가시고 갑자기 친정에서 아버지 차가 미아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본인의 마지막 차라고 소나타를 2012년에 사셨다. 아버지 첫 차는 1993년 프레스토였고 생애 마지막 차는 소나타 Y20으로 끝났다. 아버지가 새 차를 살 때 아무 도움도 못 드렸으면서 '차가 너무 큰 거 아니냐, 뭐 하러 차에 그런 돈을 쓰느냐' 말을 더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 마지막 차가 될 걸 알았더라면 옵션 하나라도 더 추가해서 사게 하실걸, 아버지 돌아가시고 받아 온 소나타는 옵션이 기본만 들어가 있는 '깡통차'였다.
당신도 차 뽑는데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서 앞 열 시트 열선조차 없던 아버지 차.
아버지 돌아가시던 2014년 12월까지 차는 15,000킬로를 달리지 않았지만 군산에서 근교의 우리 논으로 농사를 지으러 다녔던 아버지의 소나타는 실내가 흙으로 짓이겨져 있어서 실내 세차를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차 안에 흙이 아무래도 안 지워지네요' 세차장에서 차를 받아올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울었다.
차를 가져왔어도 바로 탈 마음의 준비 그런 게 안 돼서 소나타는 남편이 타고 다녔고 나는 옵티마를 타고 다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울던 날들이 좀 지나고 나서야 옵티마는 팔고 소나타 한 대만 온전히 우리 차가 되었다. 아버지 차에 있던 방향제 플라스틱 곰돌이를 책상 위에 두고 보고 있다. 14년이 지난 곰돌이다.
향은 진작에 날아가고 플라스틱 인형만 남았다. 그리움도 향기와 같다.
남편이 퇴직을 했다. 퇴직을 해서 차를 바꾸는 게 아니라 차가 한 대 더 필요해서 우리는 어제 k5를 계약하고 왔다. 아들이 일을 시작하니 우리가 타던 소나타를 주고 새 차를 계약했다. 앞으로 10년은 더 차가 필요할 것 같으니 안 살 수도 없고 중고차와 신차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의 단계를 거쳐 현대차와 기아차의 실질적인 고민 끝에 우리는 기아의 K5로 결정했다. 검은색 K5는 남자의 차처럼 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계약자는 내 이름이고 얘도 '엄마 차'가 될 것이다.
K5로 졸업을 할지 다시 바꾸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허세 부리면서 차에 욕심을 내는 거에 비하면 남편과 결정한 k5는 우리 형편에도 마음에도 딱 알맞은 차라는 생각이다.
아버지가 타던 차는 우리를 거쳐서 아버지가 가장 예뻐했던 큰손자 우리 큰아이에게까지 갔으니 소나타도 섭섭하지 않을 것이고 첫 차 세피아만 새 차였고 그동안 계속 중고차를 타다가 새 차를 출고하니 남편도 섭섭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만 역사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했던 승용차도 스토리와 역사가 있으니 어제 계약을 하고 와서 오늘 이런 글을 쓸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