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바지락 장사를 시작했다.

"바지락 커밍아웃"

자식을 낳고 특히 큰 아이의 경우, 하루가 특별했고 같은 날이 있었던가 싶다.

꼬물거리는 작고 뭉뚱 한 생명체가 사람처럼 커 나가는 과정이 신기했고 그 아이로 인해 모성애를 배웠다.

어린이집에서 처음 배워 온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 둘째와 셋째에게서는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큰 아이에게는 있다.

"간다 간다. 골목길로... 랄랄랄라. 자동차" 그런 가사의 노래였는데 남편은 흥에 겨워서 그 노래를 아이보다 열심히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MBTI로 보면 ISFJ인 아들은 얼르고 사정해야 유치원에서 배워 온 노래를 집에서 한 번 간신히 불러줄 뿐 밖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아이가 아니었다.

겁도 많고 소심해서 귀 옆에서 들리는 바리깡 소리는 천둥 치는 것처럼 무서워해서 미장원 가는 일도 힘들었고 전화기에서 들리는 할아버지 목소리에도 귀를 옆으로 휙 돌리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엄마에게 "아줌마,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던 우리 큰 아이의 모습이 충격이었을 만큼 놀랐던 것은 우리 애가 남을 보고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아이였구나 라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남편은 소심한 편이지만 나는 갔던 길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길로 집에 오는 모험주의자에 독고다이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 남편을 닮아 그런가 했지만 아들은 남편보다 더한 극소심 기질로 태어났으니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큰 애가 사회에 적응해야 했던 첫 번째 시험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전학이었다.

전주 아중 초등학교에서 제주도 장전 초등학교로 바다 건너 비행기 타고 전학을 갔으니 거리도 그랬지만 육지와 제주도의 지역색이라는 것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우리 아이는 첫 한 학기에 노아라는 힘센 친구에게 은근한 괴롭힘을 당해 결국 우리 부부가 노아를 만나서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해"라고 운동장에서 말하고 온 적도 있었다.


극소심 성향의 사람이 낯선 장소와 익숙했던 것들을 떠나는 일이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였을지 미안한 일이었지만 남편의 직업 특성상 우리는 이후로도 수많은 이사와 전학을 거쳐서 지금 사는 곳에 정착을 했다.

지금은 나도 성격이 바뀌긴 했지만 호기심 천국과 행동대장 기질이 강한 나는 남편이 발령 났다고 하는 순간부터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고 큰 애는 '우리 이사 간다' 하는 순간부터 한숨이 나왔을 거다.


제주도에 살면서 전주로 갈 일이 있었을 때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큰 애는 자기가 다녔던 아중 초등학교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었다. 병설 유치원부터 다녔던 학교라서 2학년 때 전학이었지만 3년을 다녔던 학교였으니 서운했을것이다. 그리고 집 앞에 있던 돼지갈비집 '아참' 그곳의 돼지갈비와 냉면을 좋아했던 큰 애는 나는 좋아서 웃으면서 이사갔던 제주도가 몹시 싫었을테지만 제주도 이사들어가서 태권도 대신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게 우리 아이의 전공이 되었다.


'소년과 바이올린'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길리 숲속 관사에서 도마뱀이 바위에서 몸을 말리는 걸 보다가 노란색 통학이(관사 아이들은 통학버스를 통학이라고 불렀다)를 타고 산 아래 초등학교를 다녀야 되는 해발 400고지의 우리 마을은 자장면도 배달이 안되고 너구리 라면 한 봉지를 살래도 운전해서 아랫마을로 내려가야 되는 동네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맥시카나 치킨을 배달시켜 먹었던 아파트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할게 없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되었고 옆 동네 납읍리에 살던 제주 시향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게 대학교 전공까지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부자여서, 우리가 돈이 많아서 악기를 배운게 아니었고 전학에 적응하지 못했던 극소심의 초등학생이 마음붙일곳이 바이올린 밖에 없어서였다.


지금 서른 살이 된 아들은 두 달전부터 지방에 내려가서 바지락 사업하는 지인 밑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면서 바지락 손질부터 배달까지 악기 할 때는 전혀 쓰지 않던 손근육을 쓰면서 돈을 벌고 있다.

내가 시켜보니 우리나라에서 악기 전공자가 먹고 살려면 집이 아주 부자이거나 본인이 천재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되지 전공생에 비해 일자리가 구비되어져 있는 환경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음악 전공자가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살기는 너무 어렵다.


돌고 돌아 아들은 지금의 일에 정착을 했고 잘 할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를 응원하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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