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더니 딸애 방문 앞에 커다란 메모가 있었다.
"오늘도 저를 8:15에 깨워주세요" 지난주부터 이런 메모가 어느 날은 식탁 위에 어느 날은 자기 방문 앞에 보물찾기 종이처럼 있었다. 보물찾기 종이는 찾기라도 어렵지, 이건 제발 봐줘야만 한다는 강한 느낌을 가지고 깔아 놓은 거라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종이들이었다.
보물 찾기라. 나는 그걸 한 번도 못 찾아봤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아이들 걸음으로는 참으로 멀리도 갔던 소풍에서 보물이 적인 종이 한 장을 못 찾고 빈털터리로 집에 온 게 나다.
다른 아이들은 잘도 찾고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고 방방 뛰면서 좋아했지만 내 눈에는 안 보였던 보물종이들.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이 귀했던 1970년대에 문구점도 귀했던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녔으니 아이들이 연필 한 자루라고 써진 보물종이를 발견하면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보물이 적힌 종이는 돌멩이 아래나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져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정직하게 눈으로 보이는 곳들만 찾아다녔으니 6년 동안 보물 한 번 찾지 못했던 게 당연한 일이다.
보물은 찾지 못했어도 엄마가 소풍 간다고 싸 주신 삶은 계란은 돌아올 때까지 남아 있어서 여동생이랑 그걸 까먹으면서 집에 왔었고 보물은 다른 애들이 찾는 거, 말 그래도 보물, 나랑은 관계없는 종이쪼가리였다.
그게 없어진 게 6학년 때 소풍부터였다. 시골에서 5학년때까지 다니다 6학년 때 전학 온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갔던 소풍에서는 보물 찾기가 없었다. 대신 보물보다 더 귀한 '바나나'가 등장했다.
바나나 껍질을 바닥에 깔아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걸 보고 웃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바나나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부자라고 했던 여자아이가 소풍에서 바나나를 까먹는 걸 직접 본 것이다.
아이들이 수군댔었다. '저게 하나에 5백 원이래' '큰 건 7백 원이래' 그때 5백 원 7백 원이면 여름에 동네 풀장에 가서 하루 종일 등이 다 벗겨지도록 놀 수 있는 돈이었다.
새로 생긴 우리 동네 풀장 입장료가 3백 원이었는데 엄마는 여름에 딱 한 번만 거길 보내주셨고 두 번은 안 되는 입장이었다. 여름에 한 번만 갈 수 있던 수영장이라서 동네 애들뿐만 아니라 군산의 모든 아이들이 거기에서 노느라 사실 수영장물은 오줌물 똥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없이 좋았던 풀장에 자식이 다섯이었던 엄마는 한 아이당 한 번씩 3백 원 이상은 안 쓰셨고 5남매 여름 나기에 1,500원 이상은 쓰질 않으셨는데 살짝 뚱뚱했던 그 애는 바나나를 얄밉게도 까먹고 있었다.
한 개에 오백 원, 두 개째에 천 원. 그 애가 먹어 치운 건 바나나가 아니라 우리의 여름이었다.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이 시골에 살던 내 친구들처럼 귀한 물건이 아니었던 도시여서 그랬을까. 보물찾기는 6학년 때 이후로는 해 보질 못 했다.
아침에 딸을 8시 15분에 깨웠지만 어느 자식이 한 번에 일어나겠는가. 두 번 쯤 깨우고 일어나서 아침에 싸놓은 김밥 한 알을 먹는 걸 보고 나왔다. 먹고 싶어서 먹는게 아니라 뭘 씹으면 잠이 깨겠다는 아이의 의지가 전해져서 안심이 되었고 자기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느라 새벽에 들어오고 조금 자고 다시 나가느라 깨워달라는 쪽지를 써 놓고 자는 게 웃음도 나고 새벽에 들어와 서 너 시간밖에 못 자고 다시 나가는 젊음이 보물보다 반짝거린다 생각했다.
한 번도 못 찾아본 보물찾기를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