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는 브런치를 낳고 일기는 책이 되었다.
1. 2017년 9월에 Daum에 나경 아줌마 이런저런 이야기 블로그를 쓰기 시작할 때
내 직업은 우쿨렐레 강사였다.
문화센터 회원들에게 "제가 블로그를 시작했으니까 들어와서 보세요
우쿨렐레 카테고리도 있으니까 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말을 했더니
어떤 회원분이 그러셨다.
저는 "다음 안 쓰는데, 선생님 왜 네이버로 하지 않으셨어요?"
보기 불편하다고 하시면서도 블로그를 찾아와서 방명록에 댓글을 남겨 주셨다.
무엇이 불편한지, 나는 모르고 그저 인터넷으로 시작하는 최초의 컴퓨터 생활이 2000년부터였고 시작이 다음 포털이었기 때문에 쭉 이어져 온 게 Daum이었다.
블로그를 만든다고 해서 다시 네이버로 갈아타야 되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이 그냥 그날그날 일기 쓰듯이
블로그에 내 하루의 일들을 적고 2017년을 견뎠다.
블로그를 하지 않았더라면 2017년을 그렇게 잘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음대생 입시는 불규칙한 생활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악기 특성상 실기 시험대도 오전이고 콩쿠르 시간대도 오전이라 (누가 정했는지 진심, 멱살 잡고 싶다)
새벽에 하루를 마감하고 새벽에 시작하는 생활이 많았다.
모든 입시생 부모는 다 고생이지만 아이도 힘들었을 재수 생활이었다.
1968년에 태어났을 때부터 밤에 잠이 드는 게 힘들었는지 밤마다 울어대서 스물다섯에 준비 안된
아버지였던 우리 아버지가 밤마다 울었던 나를, 엄마한테 저런 아기는 갖다 버리라고 했다는
무시무시한 아동학대에 버금가는 이야기를 엄마한테 이미 들었을 때부터
나는 밤잠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00년, 밀레니엄으로 기억할 세기의 변화에도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육아에 지친 엄마였다.
그때 우리 세 아이들이 여섯 살, 세 살, 두 살이었다.
둘째는 이른 저녁에 잠이 들어 정확히 12시면 잠이 깼다.
기저귀를 차고 뒤뚱거리면서 "노벨과 개미"라는 스티커 학습지를 들고 오면서 "엄마 꽁 부하자"그랬다.
"노벨과 개미"가 아니라"노벨과 악마" 학습지였다.
하지만 그걸 남편이 시켰을 리도 없고 내가 자초한 일, 자업자득, 결자해지라 나는 졸린 눈을 뒤집 어까 가면서
둘째랑 함께 스티커를 붙여주고 놀았다.
애초에 세 살짜리한테 그런 학습지를 시켰던 내가 미친 엄마였던 것 같다.
태어난 해부터 밤잠과 인연이 없었던 나는 세기가 변한다며 사람들이
환호하던 밀레니엄의 시기에도 밤 잠을 못 잤다.
2. 우면산 터널 긴 끝을 지나면 서초동 연습실이었다.
재수라는 터널을 지나 서초동에서부터 쭉쭉 뻗은 서울의 어느 대학이라도 들어가 준다면 나는 하느님께
내 생명이라도 드릴 것처럼, 순교라도 할 것처럼 손에 묵주를 쥐고 다녔다.
자면서도 묵주를 손에 쥐고 자던, 그 당시 묵주는 나에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잡고 싶어 한다는 지푸라기와도
같은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삼수도 아니고 어찌 보면 남들 다 하는 재수에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들어했던 것은 오래된 예체능 뒷바라지에 나 혼자 나가떨어진 결과였다.
그래서 둘째가 재수할 때 그건 6,25 전쟁으로 치자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 낙동강 고지 같은 거였다.
힘든 마음을 꾹꾹 눌러서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내가 나에게 주는 말없는 위로였다.
3.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육아 일기 쓰듯이 차곡차곡 쓰기 시작 한 블로그는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았다.
구약성서 창세기 편처럼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자꾸만 이야기를 낳았다.
일본 유학 준비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는 실제 교토 생활로 이어져서 교토 일기라는 카테고리를 낳았고
서귀포 한 달 살기는 서귀포 일기라는 카테고리를 낳았으며
매일 해 먹는 밥 이야기는 고식당이라는 카테고리로 연결이 되었다.
아줌마 혼자 씩씩하게 다녀온 교토 유학 이야기는 브런치 글쓰기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주었고
일기장 들춰보듯이 뒤져보면서 내 글에 내가 고증을 해가면서 브런치를 쓰기도 한다.
기록이 있어서 가능한 일들이다.
팔순이 넘으신 큰아버지는 칠순에 본인 일기를 모아서 회고록을 내셨다.
큰아버지가 칠순 때 책을 내시면서 나한테 그러셨다.
"네 아버지도 나중에 책 낸다고 그럴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큰 아버지와 열 살도 넘게 떨어진 나이인 우리 아버지는 일기만 열심히 쓰시고
일흔두 살에 돌아가셨다.
읽어보면 별 내용도 없다.
어느 해의 7월 일기를 읽어봤더니,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심심했다.
연금을 찾아서 엄마한테 돈을 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왔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이었을 일상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게, 뒷 장까지 볼펜 자국이 선명했다.
서너 줄로 정리될 만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만을 기록해두고 돌아가셨다.
그래도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본인에게는 따뜻한 위로였을 것이다.
우리 승범이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일기를 썼다.
졸업식 날 내가 그걸 인쇄소에 맡겨서 책처럼 만들어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기를 읽어봤더니 어느 날은 피아노 왕이 되고 싶고 어느 날은 오목 왕이 되고 싶다가
또 어느 날은 축구 왕이 되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자기가 되고 싶은 것에 무조건 뒷글자는 "왕" 이 붙어 있었다.
"바이올린 왕" 이 되고 싶다는 말은 일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승범이는 가장 되고 싶지 않은 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린 왕" 이 되고 싶지 않았던 "바이올린 "전공 남학생이 된 것이다.
블로그에서 시작된 글쓰기가 브런치로 이어져서 나는 다른 사람의 브런치도 잘 읽어본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4. 김유정 선생님의 브런치
승범이가 고 3 입시 직전에 레슨을 받았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유정 선생님의 브런치를 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부진 구석없는 승범이를 꽉 붙들어서 재수없이 합격을 시킨 합격 원인 제공자였다.
음악사와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를 쓰는 카테고리란에 "남편이 죽었다"라는 여섯 글자의 제목에 눈이 얼어붙고
그분이 선생님 이야기라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얼어붙었다.
한 글자도 버릴 수 없는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았다.
"브런치를 하고 마음이 많이 편해지셨다고" 선생님도 답글을 달아 주셨다.
나도 그랬다.
힘든 시기에 블로그를 쓰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가끔은 나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해졌다 했으며 교토에서 혼자 열심히 사는 걸 보고는 살짝 우울증이 왔던 어떤 이는 벤츠 끌고 나가서 학습지 선생님 면접을 보고 왔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도 큰 아버지도 어린 시절의 승범이도 지금의 나도
글을 쓰면서 마음이 편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