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도 전학이 힘들었었다.

나도 전학이 힘들었었다.


내가 오십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일이

세 아이를 모두 예체능 교육을 시키느라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 같은

거라고 했지만 아이들이 "엄마 나 바이올린 배우고 싶어요"라든가 "엄마 나 클라리넷 배우고 싶어요"

"엄마 나 운동하고 싶어요"라고 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생애 첫 전학으로 불안했던 정서를 음악으로 메꿔주고 싶었다고 한 것은 내가 멋대로 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승범이가 첫 전학으로 굉장히 힘들어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는 하나 승범이는 전학이 싫으니

다시 전주로 이사 가자고 졸랐지 전학 온 게 싫으니 바이올린이라도 배우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주도가 아무리 자연이 아름답고 집에서 이십 분만 내려가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아이가

그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부모의 착각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전주에서 "용무 태권도" 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가는 수영장이 더 좋았을 테고 전화하면 바로 치킨 배달이 왔던 전주의 아파트가 훨씬 좋았을 것이다.

피자도 치킨도 배달이 되지 않고 놀러 갈 친구 집도 없던 제주도의 생활이 좋았을 리가 없다.


아빠와 애착관계가 나보다 더 잘 형성되어있었던 승범이었지만 전학이 힘들다고 징징 대는 것은

아빠한테 하지 않고 나한테 주로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경험했던 나도 승범이의 기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아이에게 눈을 맞춰서 초등학교 2학년 짜리의 힘듬을 잘 들어주었다.

"엄마도 니 기분 알아 왜냐면 엄마도 6학년 때 전학을 갔었거든, 그래서 엄마도 초등학교 친구가 한 명도 없어"

정말 힘들었어 라고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로 돌아가서 2학년 짜리 아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래 힘들 거야 엄마는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때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슬픈데, 승범아 미안해"

전학을 시킨 일에 대해서 승범이한테 사과도 했었다.


나도 정말 "전학"이라면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한 학년에 세 반 밖에 없던 시골 학교였지만 나름 똑똑하기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던 나는

6학년 때 전교 어린이 부회장 선거에도 나가서 나름대로 공약을 내 걸고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 되었다.

"제가 어린이 부회장이 된다면 우리 학교를 유리창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하겠습니다"

그때 그 말을 하면서도 이런 유치한 말을 하고 어린이 부회장이 되어야 한다니 정말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낯부끄러운 연설문을 다리 후들후들 떨어가면서 발표했던 보람도 없이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

되자마자 시골 초등학교에서 군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의 중학교에 입학을 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아버지의

확고한 주장 아래 전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라서 군산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고 월초가 되면

어린이 잡지를 사다 주실 만큼 나름 깨어 있는 아버지였다.

나는 윤유선을 텔레비전에서 먼저 본 게 아니라 소년중앙 표지모델로 먼저 봤었다.

극성스러웠던 아버지 덕분에 시골 우리 마을에서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두 권을 정기 구독하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활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아버지가 사다 주신 "해님 그림책"이다.

노란색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해님 그림책"을 어깨에 메고 걸어오시던 아버지가 생각나고

나는 너무 좋아했었다.

교육에 대한 욕심이 요즘 스카이캐슬 부모 못지않았던 아버지가 시골 중학교에 내가 입학하는 꼴은 못 봤을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학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시골의 우리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를 정말 잘하는 줄 알았던 나는 전학 가자마자 군산의 초등학교에서

처음 봤던 시험에서 충격을 받았다.


초록색 잔디밭에 빨간색 장미꽃이 피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대비라고 할까요 라는 미술 시험 문제와

그 문제의 정답이 "보색 대비"라는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던 문제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미술 시험뿐이 아니라 나한테는 전부 어려웠던 시험 문제들

맹세코 "보색 대비"를 배운 적이 없는데 시험 문제에 나왔고 그런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내 소개를 하면서 "시골에서 전학을 왔지만 아주 공부를 잘하는 친구입니다"라고

소개를 해서 공부 잘하 던 아이들이 긴장을 하고 나를 경계했던 게 부끄럽게 될 만 큼 시험을 엉망으로 봤다.

내가 전교 어린이 부회장까지 했다는 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공부를 잘하는 어린이라는 것도 거짓말이 된 것이다.


시골의 우리 학교에서는 양호 선생님이 나만 보면 이름 대신 "똑똑이"라고 불렀었는데 전학 와서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보색 대비"따위는 정답으로 쓰지 않아도 되었던 미술 시험지가 있던 우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향수병에 걸려서 밤마다 이 방 저 방 잠옷을 입은 채 돌아다니던 하이디의 심정을 알 것 같았던 6학년 여름

그동안 나는 똑똑한 아이인 줄 알고 자존심도 꽤나 있는 아이였는데 전학 와서 보니 공부도 못하고

시골에서 전학 온 촌뜨기 아이가 돼 버린 거다.

그래서 나는 승범이의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서 잘 들어줄 수 있었다.


2002년 여름 "엄마 나는 제주도가 싫어 다시 전주로 이사 가자, 전학이 싫어"라고 나한테 울면서

이야기를 했을 때 1980년 3월 친구들과 울면서 헤어졌던 내 모습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나도 전학이 힘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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