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한중원의 자장면

나도 못먹고, 엄마도 못 먹어 본 외갓집의 자장면

"엄마, 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갓집 중국집 했었지?"

"그때 그 중국집 이름이 한중원이었지?"

"너는 기억도 잘헌다"

"근데 엄마 나 거기서 아저씨가 수타로 면뽑는건 봤는데, 자장면은 못 먹어봤어!, 왜 그랬을까"

"왜는 왜여, 먹어 볼 새도 없이 금방 망했으니까 그렇지, 내가 차려주고 나도 못 먹어봤다"


주말에 수인선을 타고 인천의 차이나타운으로 자장면을 먹으러 다녀 온 김에 엄마한테 옛날일을 물어보러 전화했다가, 외갓집 말만 하면 버럭 하시는 엄마가 또 버럭하시면서 외할머니의 만행에 대해서

한바탕 울분을 토해냈다.


외갓집에는 딸이 셋, 아들이 하나

우리 엄마가 둘째다.

엄마말에 의하면, 그리고 내가 본 것에 의한면 큰이모는 뭔가 자기 잇속은 확실하고 분명하고 차리고, 자기 가족외의 가족은 모두 남으로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그말은 곧, 자기 친정도 남인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모는 결혼에 실패하고 자기 살기도 바빠서 외할머니의 등꼴을 오랫동안 빼먹었다.

금전적으로 등꼴을 뺀게 아니라 외할머니는 셋째 이모의 아이들을 내가 알기로도 아기 때부터 키워줬고

이모는 아기들을 맡겨놓고 돈을 벌러 다녔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돈벌이는 아니었던것같다.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보험을 팔러 온 이모를 본 적도 있었다.

깜짝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이모는 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한 적도 있었고 이후로는 다방을 했다.

다방 뿐만 아니라, 물에 관련된 다른 장사도 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양계장을 하는 이모부를 만나

새벽부터 달걀을 줍고 지금도 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 엄마만, 그나마 외갓집 딸들 중에서 외갓집에 도움이 된 사람이었다.

외삼촌은 나보다 여섯살 밖에는 더 많지 않으니 엄마가 외갓집에 한참 돈을 보탤 때

외삼촌은 돈을 쓸 나이였고 집에 놀러 갔을 때 아직 어린 외삼촌이랑 싸운 적도 있었다.


나는 시골에 살고 있었고, 외갓집은 김제시였으니 시골에 산다고 나를 은근히 무시했었다.

도시의 문물로 나를 기죽였던 최초의 것은 파스텔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었을 때 중학생이었던 삼촌은 파스텔을 가지고 있었고 나한테 그걸 보여주면서

"너네는 시골이라 이런것도 없지" 약올리면서 깐족거렸었다.

시골이라서 없던 게 아니라 당시 국민학생이 파스텔을 쓸 일이 있었겠는가, 분필은 칠판에나 쓰는거지

저걸로 그림을 그린다니 그게 더 웃긴 일이었고, 친구들은 남의 것 빌려서 색칠할 때 나는 당당하게 왕자파스

꺼내놓고 색칠하던 있는 집 딸이었는데 나를 무시하다니, 짜증이 나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외삼촌이 깐족거리면서 보여 주던 파스텔은 기어이 한 번 칠해보고 싶은 신문물이었다.


외갓집 바로 앞에는 슈퍼가 있었다.

걸어서 몇 발짝 안 떨어진곳에 슈퍼가 있다는 것부터 사실 외갓집은 환상의 동네였다.

시골 우리집에서 슈퍼에 갈려면 한정거장 정도는 걸어서 가야 했는데 외갓집은 바로 옆 집이 슈퍼였으니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골 우리 마을에서는 슈퍼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고 "또세네집"이라고 불렀었다.


"엄마, 우리 살던 시골에서 과자 팔던집, 그집을 왜 또새네집이라고 불렀어?" 물어봤더니

"왜는 왜여, 자꾸 뒤에다 대고 또 오세요 또오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줄여서 또새네집이라고 했지"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줄 알았더니 또오세요의 줄임말이 또세가 된 거고 그래서 또세네집이 된 것이다.


그런 동네에서 살다가 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바로 옆집으로 과자를 사먹으로 간다는 게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그리고 시골 우리 동네 애들이 뚜껑달린 아이스께끼 통을 열고 하드를 먹을 때 나는 쭈쭈바를 먹어 봤다는 게 얼마나 큰 자랑거리인지, 국민학교 2학년 여자 아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았던 외할머니가 그걸 바로 사주지는 않았지만, 일단 슈퍼 앞에 있는 전봇대를 잡고 빙빙

몇 바퀴를 돌고 있으면 외할아버지든 외할머니든 누군가는 나와서 사주셨으니, 슈퍼 앞 전봇대를 잡고 돌면

쭈쭈바가 나온다는 공식을 잘 알고 있었던 나였다.


물론 그때도 삼촌은 170원하던 식빵을 사다가 먹으면서 이런 거 너네 동네에는 없지 약올리면서 먹었었다.

저런 빵 따위 얼마든지 아빠한테 사다 달라고 할테니 돈이 얼만지나 말해 봐

그런 오기에서 물어본게 170원이라는 대답이었고, 나도 오기가 머리 끝까지 차 있었던지, 식빵의 가격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참으로 치사하고 드러운 170원이었다.


하지만 식빵의 글루텐 냄새는 향기로웠고, 싸움을 했을 망정 외삼촌이랑 맨 식빵을 나누어 먹으면서

방학을 보냈다.


그랬는데, 외갓집의 자장면은 먹어도 못 보고 폐업을 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걸어 다니시는 모습보다 누워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봤기 때문에 외갓집 살림은 외할머니가 장사를

해서 하는 꾸려 나가는 거였고, 외갓집이 하던 장사의 간판이 바뀔 때마다 그게 다 우리 엄마의 돈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알았더라면 외삼촌이 잘난체를 하면서 자랑하던 파스텔도, 이런 거 너네 동네에는 없지 하면서 식빵을 들고 깐족거릴 때 "그거 다 우리 엄마 돈인것도 모르냐 바보 새끼야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외갓집은 자장면집을 하는 데 왜 나는 자장면을 못먹어봤나 그게 궁금증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한중원"이었다.

이름부터 뭔가 근사하고 멋진, 그동안 내가 봐왔던 외갓집의 그 어떤 간판보다도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김제집" "세종집" "한중원" 내가 기억하는 간판은 이렇게 세개지만 그 사이 더 많은 간판이 엄마 돈으로 올려 졌다가 내려졌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늘 원망하지만, 엄마가 유일하게 칭찬하는 게 있다면 딱 두가지다.

외갓집에 굉장히 잘했다는 것과, 우리들에게 지나치게 잘 한 아버지였다는 것

물론 그 대상에 엄마는 당연히 빠져 있다.


어느날 여름방학에 갔더니 외갓집은 중국집 안쪽에 있던 작은 방에 이모랑 할머니 외삼촌 셋이 한 방을 쓰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탕탕 소리와 함께 주방장이 수타로 면을 뽑고 있었다.

전봇대를 돌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가게로 가서 쭈쭈바를 사주시던 외할아버지는

내 기억속 한중원 중국집 골방에는 안계신다.

그때는 이미 돌아가신것 같다.

하지만,이번에는 쭈쭈바가 문제가 아니었다.


시골 우리 동네에서 자기 바로 눈 앞에서 자장면발이 수타로 쭉쭉 뽑아져서 만들어지는 걸 본 아이는 없을테니

방학이 끝나면 나는 또 우리 동네 애들 모아놓고 할 얘기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면발이 만들어 지는 것 까지만 봤고, 자장면은 못 먹어보고 외갓집의 짧은 한중원 시대는 끝이 났다.

장사도 안되었고, 주인이었지만 외할머니가 주방장에게 끌려 다니는 장사를 했기 때문에 외손녀에게 자장면 하나 만들어 주라 마라 못했을 거라는 게 엄마 말을 듣고 짐작해보는 내가 자장면을 못 먹은 이유이고,

방학 때만 갔던 외갓집이었으니, 여름방학 때 갔다가 겨울 방학때 갔을 때는 폐업하고 다른 간판을 달고 있을 때라 당연히 못먹어봤을 것이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한중원"


거짓말 하면 백만원 내놓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하던 시절에 주택복권의 당첨금이 천만원이라면서

중국집 골방에서 이모가 보여주던 주택복권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국민학교 2학년 때의 나에게 천만원이란

상상도 못할 돈이었고, 이모에게는 중국집 골방을 벗어 날 기회의 돈이었을테지만 이모는 주택복권에 당첨되지 못했는지 외갓집은 늘 방 하나를 함께 썼고 눈치없이 방학때마다 나는 외갓집 방한칸에 뭐가 좋은지 얹혀서

지냈다.


엄마도 못먹어보고 나도 못 먹어 본 한중원 수타 자장면은 어떤 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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