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35살 다시 대학생

힘들긴 힘들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집안에서 아이에게 예체능을 전공시켰다고 하면 이 말이 거의 자동반사다.

"차암 고생하셨겠어요"

"돈 많이 들었겠어요"

여기서 고생했다는 것은 아이의 고생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고생이며 돈이 많이 든 쪽도 물론

부모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를 시켜서 공부로 대학을 가는 아이들도 고생은 똑같이 하는 게 대한민국 입시의 현실이고 입시문제를

다뤘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보면 예체능은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만큼 그들만의 리그라는 게 있는데

사람들은 예체능 교육에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고생했을 것이다라고 생각들 한다.


내가 직접 시켜보니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애들에

비해 결코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고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그것도 모자라 과외받고 주말에도

학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은 게 대한민국 입시교육의 현실이니 어느 한쪽이 더 고생이다

아니다 할 수는 없다.


공부하는 아이도 고생, 예체능 하는 아이들도 고생이긴 하지만 고생, 돈 이런 걸 떠나서 우리 집 둘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중 입시를 보겠다고 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그러셨다.

"어머님 공부도 곧 잘하는 애를 왜 음악을 시키려고 하세요"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1984년 고교 내신 15등급제였던 1984년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우리 학교 3학년이었던 언니가 오보에를 불어서 연세대에 합격했다고 소문이 났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의사인데 그 언니가 공부를 못해서 오보에를 시작했고 악기도 잘 못 불었는데 15등급으로 연세대를

들어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연세대학교가 그 언니한테 빚진 게 있어서 학교 문 열어놓고 오라고 하지 않은 이상 합격을 위해서 오보에를

불었던 그 언니도 굉장한 노력을 했을 텐데도 그 언니가 학교에서 조그만 오보에 가방을 들고 왔다가 갔다 하면 아이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내신 15등급이래. 아빠가 의산데 공부 못해서 악기 시킨 거래. 저게 오보엔데 하프는 가지고 있기만 해도

서울대 간데"

1984년 나도 음악과 대학 입시의 관계를 그렇게 아이들의 말로 배웠다.


시간이 많이 흘러 2010년이 되었어도 우리 둘째의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말씀도 1984년 고등학교 복도에서 들었던 친구들의 수군거림과 별로 다르지 않게 들렸다.


음악이야 말로 치유의 학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수학 문제 푼다고 그걸 보고 감동받아서 우는 사람이 있으려나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니, 없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음악은 사람을 울리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 학문이다.

특별히 잘하는 음악가가 연주를 할 때 감동받아서 울고 웃고 하는 게 아니라 엄마와 아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는 게 음악이다.


우리 집 둘째의 계원예고 동기 남학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보에 개인 연주회를 할 때 성악을 전공한

자기 엄마와 마지막 피날레를 연주했었다.

전공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음악적으로는 성숙하지 않은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의 오보에 연주와 성악을

전공한 엄마의 앙상블이었다.

오보에를 불면서 엄마를 바라보던 애틋한 눈길과 아들의 오보에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모습에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학부모들이 울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오보에를 불고 있는 게 자기 자식 같고 저 아이가 무대에 서서 연주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싶어서 그걸 아니까 울었던 거다.

아들이 군대 가면 거리에 휴가 나온 군인들만 봐도 모두 내 아들 같은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그런 류의 애틋함이란 게 있다.


힘들고 고생스럽고 돈까지 많이 드는 사서 하는 고생길

하지만 한 자락 깔고 보는 시선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왜 나는 아이들과 그 길에 들어섰는지


제주도 이사가 단단히 한 몫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는데 아이 셋을 데리고 제주도로 이사 들어 간

2002년 7월

지금은 스물여섯 살인 큰 아이 승범이가 초등학교 2학년 밑으로 여동생 둘은 다섯 살 네 살

사방이 놀이터고 놀 것이 천지인 제주도에서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은 말처럼 뛰어놀고 지냈다.


애가 셋이고 둘째와 셋째가 다섯 살 네 살 아직 어렸었는데 제주도로 이사 한 지 반년 지나 2003년

차로 이십 분쯤 떨어져 있던 제주 관광대학 음악과에 입학을 했다.


동기는 단순했다.


7월 1일 자 발령이 나서 제주도로 들어 가 있던 남편이 아직 아이들과 전주에 남아 제주도 이사 준비에 바쁜

나에게 "관사 아줌마들이 당신 이사 오기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제주도 관사 아줌마들이 나를 왜 기다리는지는 이사 들어가고 알았다.


해발 400 고지

신제주인 노형과 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져 있는 우리 관사는 교육의 오지였다.

학습지 선생님도 오시지 않는 곳이었고 학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으면 부모가 직접

데려다줘야 된다고 했다.

한 동에 네 가구씩 거의 다섯 동 이십 가구에 한 집에 둘셋은 있었으니 작은 마을 단위쯤 되었지만

학습에 대한 혜택은 공교육 말고는 받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랬던 관사 마을에 새로 이사를 들어오는 집의 직원 부인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더라

그 사모님은 자기 아이들은 자기가 가르친다고 하더라

(물론 우리 승범이는 일곱 살에 학교 입학하면서부터 피아노를 나한테 배우기는 했다)

이렇게 소문이 나 있었고 이미 내가 이사를 들어가기 전부터 나한테 피아노를 배워야겠다는 집이 벌써 몇 집이

대기 상태라고 남편에게 전해 듣는 순간 황당했지만 이미 나는 관사의 아이들의 피아노를 책임져 줄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자발적 의지로만 흘러가지 않는 다.

이사 들어 가자 마자 제주도 관사 라동 101호 17평 우리 집 안방에 있던 피아노에 한 시간에 두 명씩

아이들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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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에 두 명씩 와서 한 명은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한 명은 피아노를 치던 안방의 풍경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옥이네 피아노 집에서 봤던 풍경이나 지금 생각해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가 전공자가 아니라고 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어느 피아노 학원이고 우리 관사에는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을 보내려면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야 되는데 왕복 한 시간씩 걸려서 그걸 할 수 있는 엄마들은 많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피아노 교육은 올스톱이

되었던 터라 아줌마들은 내가 이사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던 것이다.


전업주부였지만 이사 간 다음 날부터 짐 정리도 못하고 관사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까지 있었지만 대부분 초급 수준의 교재를 배우는 단계의 아이들이라서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이렇게 된 거 한 번 제대로 배워볼까 그런 생각을 했고

집에서 차로 삼십 분쯤 떨어져 있던 2년제 제주 관광대학 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2003년 다시 입학을 했다.


35살,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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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광령 제주 관광 대학교- 음악가가 폐과가 되어 있어 깜짝 놀랐지만 학교는 여전했다.

지하 1층에 있던 연습실에서 외워지지 않는 악보를 외우느라 고생 많이 했었다"


입학 동기는 매우 단순했으나 남들이 보기에 쉬워 보이는 2년제 음악대학교도 결코 쉽지 않았다는 걸

지켜 본 우리 남편은 잘 알고 있고 애들 셋 키우면서 다시 시작한 공부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싫어라고 할 만큼

차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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