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승범이 생애 첫 전학이 있었다.
"유학을 가고 싶다"라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테이프 컷팅을 했지만 가족들과 상의는 없었다.
"입시생 부자"편에서 보면 나의 우울감의 정체는 둘째의 재수와 셋째가 고3이라는 게 키워드 일 것 같지만
그게 100은 아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될 게 우리 집에는 아이가 셋이다.
아들 하나에 딸 둘
그리고 셋 다 예체능을 전공했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있는 편이 아이들이 전공을 할 확률도 높다.
아니면 부모가 음악을 너무 좋아하든지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다가 아이가 부모의 영향으로 재능까지 물려받아
전공을 하게 되는데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짱짱함까지 갖췄다면
트리플 액셀이 아니라 빙판에서 코끼리 코 열 바퀴라도 돌 고 똑바로 걸어가서 반환점을 돌아올 수 있는 게 예체능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너그럽게 넘겨주시기를 바란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의 재력 없음과 그다지 예리하지 않은 엄마의 정보력, 평범한 아빠가 우리 집 기반이었고 아이들이 영재성을 보일 만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집에는 그때 "전학"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승범이는 여덟 살이었지만 2학년이었다. 일곱 살에 입학을 시켰다.
아중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을 다니 던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아중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1학년 형아들이
되는데 우리 승범이만 빠른 2월생이라 아중 병설 유치원을 1년 더 다녀야 된다는 게 엄마인 내 마음에 걸려서
순전히 그 마음으로 같은 또래의 일곱 살보다 키도 한 뼘쯤 작았고 한글도 몰랐던 우리 승범이를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한글을 늦게 가르쳤던 것은 일곱 살에 입학시킬 생각이 처음부터 확고했던 게 아니라서였다.
아무리 일 년이 어리다고 해도 키가 또래 일곱 살보다도 훨씬 작았고 남의 집 아이들은 간판 읽다가 금방 뗀다는
한글도 쉽게 떼지지가 않아서 입학을 결정한 겨울에 구몬 선생님이 아무리 해도 안되던 한글 떼기를
내가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시켜서 간신히 한글을 깨치고 입학을 했다.
유치원 친구들이 많았긴 했지만 키 작은 일곱 살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세상 힘든 일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도 한 번 아프면 정말 무섭게 아프던 아이가 입학을 해서는 입술이 여기저기 물집이 생길 만큼
학교 생활이 힘들었다.
그냥 체력이 안 됐던 것 같았다.
나도 집에 있는 두 명의 아기들과 초등학교 1학년 승범이의 뒷 바라지가 힘들어서 승범이가 오른쪽 입술이 부르트면 내 입술도 오른쪽이 부르터 있고 입술에 물집을 둘이서 같은 자리에 달고 살았었다.
승범이는 심하게 물집이 난 적도 있어서 그중 한 개는 살짝 파인 흉터로 남았다.
그게 우리 승범이 초등학교 1학년의 역사라면 역사다.
그렇게 흉터가 질만큼 열심히 다녔던 아중 초등학교에서 2학년 여름에 전학을 했다.
남편이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완도에서 배를 타고 먼저 제주도로 가버렸다.
승범이는 전학 가는 게 싫다고 했다. 전주 아중 초등학교가 좋다고 집 앞에 있는 "아참"이라는 돼지갈빗집이 맛있다고 이사를 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2002년 7월 17일 군산에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여름 방학중이었던 7월을 마치고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장전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2학년 짜리가 날마다 나한테 징징 대면서 말했었다.
"다시 전주로 가고 싶어" "아참이 얼마나 맛있었는데 여기는 아참도 없고 친구도 없어"
("아참" - 승범이가 좋아하던 맛집이다. 아참에서 돼지갈비를 먹고 냉면을 먹는 마무리를 좋아했었다)
슬픈 얼굴과 짜증 나는 목소리로 진심을 다해 나한테 읍소를 했었다.
나도 승범이의 기분을 아는 게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도시의 초등학교로 6학년 때 전학을 했던 씁쓸했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어린아이에게 전학이란 자기의 모든 기반이 없어지는 상실감이다.
어느 날 눈 떠보니 자기가 좋아하던 모든 것이 없어진 거다. 변화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겁도 많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아이라서 마음은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적응을 해가면서 놀기도 잘 놀고 제주도에 적응을 해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전주가 그리웠을 우리 승범이가 안쓰럽기도 했고 제주도에 이사를 오고 나니 중산간 마을이라서 학원에 보낼 수가 없어서 하루하루 노는 게 일인 아이를 보는 것도 편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주에서 승범이 사교육을 많이 시킨 것도 아니고 아파트 상가에 있던 "용무 태권도"에 보낸 게 전부였었지만 어디를 보내고 싶어도 제주도 소길리 우리 관사는 학습지 선생님도 꺼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나는 2002년 7월에 이사를 들어가서 2003년에 관사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있었던 "제주 관광대학"
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2년제 음악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부전공으로 바이올린을 할 수 있었다.
배워보니 문득 매일 놀고먹은 우리 승범이 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이 강사로 와서 가르쳐줬는데 그분을 통해서 승범이의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제주 시향에 계시는 선생님이시다.
변화가 두렵고 사람과 만나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우리 승범이가 내가 바이올린 배워볼래 라고 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는지 애월 납읍리로 일주일에 한 번씩 바이올린
레슨을 가는 관사 최초의 바이올린 레슨 생이 되었다.
전학으로 아이 마음에 생겼을 빈 틈이,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으로 조금은 메꿔지기를 바랐었고
노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아이가 걱정스러웠던 마음으로 그렇게 시작된 바이올린 레슨이었다.
그때 시작했던 레슨을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하게 될 줄
그게 전공이 될 줄
그게 얼마나 돈이 드는 무서운 것인 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힘듬의 탄탄한 기초가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