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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함께 모여 만드는 타운

혼자는 자유, 둘은 위로

혼자는 자유, 둘은 위로


나 혼자 살 수도 있지만, 인간은 어디서나 공동체를 구성하고 한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다.

씨족 사회부터 집성촌까지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공동체 구성의 원칙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TOWN(타운)이라는 단어로 꽃을 피웠으니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있다는 차이나타운과 그에 못지않는 코리아타운

그리고 향남 알딸딸 고려인 타운


외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타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차이나타운이라고 한다.

인구가 많은 탓도 있지만, 중국인들은 모여서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기질이 강한 사람들 같았다.


살면서, 한꺼번에 각 지방의 중국 사투리를 실시간 중계로 들을 수 있었던 교토 ymca일본어 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면 교실에서 터지는 중국말의 잔치


50분 수업 내내 일본어로 귀가 따가웠졌다면, 쉬는 시간 10분은 중국말로 머리까지 아파지는 경험을 했다.

우루무치 중국 소수 민족이었던 에 상부터 사천 자장면의 본가 사천 출신 마상, 비교적 표준말에

가까운 상해 어를 썼던 진상까지, 대륙은 넓었고 언어는 제각각이었다.


중국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어도, 아이들이 하는 중국말이 사투리인지, 표준말인지가 구별이 됐다는 게

중국말에 관해서 내가 가졌던 촉이라면 촉이었다.


한국 학생은 나를 포함해 네 명이었지만 우리들은 쉬는 시간에 한국말로 열심히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중국 애들은 전당대회 수준의 중국말 잔치를 연 다음, 학교 옆에 있던 100엔 로손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저녁에 해 먹을 요리 재료까지 사 오는 무협 영화 수준의 내공을 보여 주는 애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뜻이 맞아도 둘이서 한 집을 얻어서 사는 일은 없었으나, 중국 애들은 한 집을 얻어놓고

월세를 공유하면서 사는 애들도 있었고, 내가 보기에도 중국과 한국은 기질이 다르긴 했다.


그러니 이민 사회에서 가장 먼저 생겨나는 타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게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TOWN(타운) 하면 생각나는 게 1980년 초, 중학교 친구가 살던 타운이라는 동네다.

군산에는 미군 비행장이 있었고 주변의 마을을 그 동네 사는 애들은 타운이라고 불렀었다.



타운에 理(리)를 붙인 타운리에, 내 친구도 살았고 타운리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버스 타고 한참 가야 되는 타운리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홍땡땡이네 집에

뭐하러 갔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그 애가 자기 집에서 몰래 보여준 언니 방은 잊을 수가 없다.


걔네 언니는 미군이랑 결혼을 해서 자기 집에서 함께 살았었는데 언니 방에 커다란 침대가 있다면서

언니 방을 보여줬었다.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던 커다란 침대와 분홍색 커튼이 창문마다 쳐져 있던 아직은 신혼이었을 언니의 방


타운리 하면 그 친구와 언니의 방이 함께 생각난다.


미군 비행장은 타운리를 만들었고, 내 친구에게는 미국 사람 형부를 주었으며 중학교 친구 은경이

엄마에게는 직장을 주었다.


중 2 때 내 친구 은경이네 엄마도 미군 부대에서 일하셨는데 은경이의 도시락 반찬은 베이컨이었다.


우리 엄마가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큰 맘먹고 뚱뚱이 진주 소시지를 부쳐서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줄 때  

은경이의 도시락 반찬은 기름에 바짝 튀겨진 베이컨이었다.

군산 우리 동네 슈퍼에서는 베이컨을 팔지도 않아서 우리들이 베이컨이라는 이름조차 모를 때

베이컨의 경이로운 실물을 영접하고 은경이에게 물었었다.


나 "은경아, 모양은 돼지고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반찬, 이름이 뭐야?"

은경 "베이커어언"


베이컨이 베이커어언인것을 1984년에 은경이한테 배웠고, 오렌지는 어우뤼인지인 것을

이명박 정권 때 알게 되었다.


한 손에 지팡이 같은 매를 들고 수업 시간에 들어오셨던 얼굴만 마주쳐도 무서웠던

영어 선생님이 매로 가르쳤던 영어 단어 발음은 귀에서 튕겨져 나갔지만, 짭조름한 맛을 보며 은경이의

발음으로 익혔던 "베이커어언"의 환상적인 발음은 첫 맛과 함께 아직도 기억난다.


은경이의 짝꿍이었고, 은경이랑 친해서 은경이는 질렸던 베이컨을 나는 중 3 때 실컷 먹었었다.


심지어 은경이의 생일 때 집으로 초대를 받아서 갔을 때는 은경이 엄마가 미군부대 PX에서

사 왔다는 커다란 버터크림 케이크를 질리도록 먹고 왔었다.

1980년대 중반, 우리 집도 생일 때는 케이크 정도는 아버지가 사 오셨지만, 아버지가 사 오시던 이성당 빵과

해태당 케이크는 명함도 못 내밀만한 커다란 크기의 미군부대의 버터크림 케이크는 환상적이었다.


알록달록한 꽃잎들과 이파리들이 얹힌 은경이의 미군 부대표 생일 케이크는 이 세상 어떤 직장보다도

은경이 엄마의 미군부대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뿜 뿜 묻어 나오는 증명이었다.


중학교 친구 은경이는 그후로 딱 3년뒤

대학교 합격자 발표를 해당 대학교에서 게시판으로만 확인이 가능하던 시절

내가 합격했던 대학교 앞에서 봤었다.


은경이 생일 때 케이크를 함께 먹고 트럼프를 쳤었던 은경이 오빠와 은경이는 나보다 먼저

합격자 발표를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내가 반가운 마음에 "은경아"하고 불렀는데도

둘 다 표정이 싸아해서 대답도 하지 않고 가는 걸 보고 나중에 알게 됐다.

은경이도 같은 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거고, 나보다 먼저 발표를 보고 돌아가는 길이 었을 것이다.


오십 넘고보니, 그때 대학교에 합격하지 않았어도 스무 살짜리가 갈 길은 얼마든지 많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1987년, 스무 살일 때는 대학교에 떨어지면 죽는 줄 알았고, 후기대학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이도 저도 다 떨어져서 전문대학에 가게 된다면 세상 쪽팔릴 일이었다.

실아보니 1987년에는 맞는 것 같았던 그 마음이 2021년 4월,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옳은 건 줄 알았다.


그때 나는 대학교에 떨어지고 뭔가 확실한 직업의 세계에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전문대학교에 입학했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지방의 4년제 국립 대학교에 합격했고 같은 대학교에

은경이는 떨어졌다.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가더라도 방학이면 한 번은 보게 되는 마법 같은 군산의 시내

중앙로에서도 은경이는 한 번을 볼 수 없었다.


중3 때 버터크림 케이크를 둥근 소반에 놓아주면서, 미국 이민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시던 

은경이 엄마 말처럼 은경이네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지도 모르겠다.




교토에도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코리아타운이 있다.

교토역 주변 9조부터 10조까지의 행정구역이 바로 코리아타운인데, 주로 재일교포 1,2세가 모여서

한국 식당을 하거나, 김치를 담가서 파는 곳들이 있다.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츠루하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교토의 코리아타운은

관광객들 조차 모르는 생소한 곳이다.

오히려 교토에 토박이처럼 살고 있는 현지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빵집에서 일할 때 오노(小野)상에게 듣고 교토의 코리아타운을 알게 되었다.

"고상, 교토역 뒤쪽에 가면 김치를 만들어서  파는  가게들이 있다고 해요" 그게 바로 교토 코리아타운이었다.


내가 살았던 최초의 타운은 월하리(月下里)였다.

뭔가 사연을 안고 제주도 본토를 떠나서 육지의 어느 마을에 달 밝은 밤에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월하리였고, 월하리는 고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나 혼자 산다" 프로그램도 있지만 혼자일때는 자유가 있지만, 둘이 있을 때는 위로가 된다.


그래서 타운을 이루고 사는 것 같다.




향남에 살면서 러시아어를 쓰고 있는 키릴이나, 아르튬의 아버지는 고려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현재의 러시아 및 구소련 지역(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등)

으로 이주한 이와 그 친족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인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인 ‘카레이츠(Корейцы)’라고도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참고*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조선족과 고려인은 다른데, 중국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조선족이고

러시아 근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차인표가 나왔던 드라마 "카레이스끼"가 바로 고려인들의 이주 이야기를 다루었던 mbc의 드라마였고

이제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향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알딸딸 근처의 빌라단지에서 타운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한국말이 거의 되지 않는 고려인 아이들 중에서 그나마 희선쌤 반의 아르튬은 짧은 반말투의 한국말로 소통은 되는 아이인데, 어디에 사는 지 자기 집을 설명할 때 나는 알딸딸 2층, 키릴이는 3층이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하필이면 "알딸딸" 이라는 가게의 윗 층에 살아서 아르튬이 익힌 한국말중에 하나가 알딸딸이지만

그 근처의 빌라에서 모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도 잘살아냈던 2018-2019년 교토였지만, 어쩌면 잠시였으니 괜찮았던거였고

인간은 어디에서건 타운을 이루고 산다.


혼자는 자유지만, 둘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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