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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2. 드립치며 커피드립하는 남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노란색 커피 믹스를 끊었다.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달달구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노란색 커피믹스

그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2014년 12월 초까지만 해도 나도 "달달구리"의 찐팬이었다.

달달한 그 맛과 향기에 잠시 5분은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이 나는 "달달구리"를 포기하고 살기에는

인생이 쓴 맛이라, 단 맛을 주던 "달달구리"는 내 인생의 옵션쯤이려니 하고

1일 3 달달구리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계시는 동안 나는 내 인생에서 "달달구리"를 정리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아버지의 최애 인생템 "달달구리"를 마시는 것을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의리가 발동해서, 효녀는 아니었으나 앞으로는 의리있는 딸이 되기로

결심하고 "달달구리"를 내 인생에서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어떤 의리를 보여줄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커피믹스라도 마시지 말아야 될 것 같았다.

그냥 마음이 막연히 그랬었다.


2014년 12월 엄마의 김장이 끝난 주말에 쓰러지셨고, 사흘 지나 화요일에 전북대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뇌경색의 휴유증으로 아버지는 들리지 않는다며 달력뒤에 글로 써가면서

답답함을 호소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가벼운 뇌경색일 뿐인데, 지금 잠시 귀가 들리지 않을 뿐인데

매정하고 인정머리없게 생긴 의사놈은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두 달 정도밖에 못 사실거라고 병원 복도에서

내게 말하고 그냥 지가 가던 길을 갔다.

사람이 쓰러진지 일주일이 안됐는데 의사놈은 앞으로 두 달 정도 사실거라고, 아마 그전에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어도 머리쪽으로 뇌경색이 진행이 많이 되었고 뇌 사진 결과 한쪽은 하얗다면서 일반병실에 계실게 아니라

중환자실로 가셔야 된다는 말까지 했다.

우리가 흔히 뭔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인 "머릿속이 새하얗다"는 그냥 쓰는 말이 아닌 의학적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늘 운전하고 다니는 길인데도, 어느 날 밤에는 아버지가 길을 못찾고 집까지 뺑뺑 돌아서 겨우겨우 찾아 왔다"

엄마의 증언이 이어졌다.




우리집에서건, 남의 집에서건 때와 장소를 묻지않고 식사후에는 노란색 커피라는 아버지의 룰은

병원에서 멈춰졌다.

아버지가 "달달구리"를 다시 마신 곳은 본인의 산소앞에서였다.


왼쪽에는 캔맥주 오른쪽에는 편의점 커피 믹스 더할 나위없이 아버지스러운 산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습관같은게 있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과, 식후에는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그리고 신문을 정독하며 보는 것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는 걸 좋아하셨다.

나도 아버지 덕분에 고등학생때부터 신문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있었고, 막 배달 된 신문에서

나던 잉크 냄새를 좋아했다.

야구도 좋아하셨기 때문에,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쭉 데리고 군산에서 전주까지

프로야구를 보러 데리고 가 주신 적도 있었다.

홈런콘을 먹고 그 안에 들어있던 야구 선수 스티커를 선수단 별로 추려가면서 모으던 중 2때,

나도 아버지만큼 야구를 좋아했었다.

삼미슈퍼스타즈가 꼴찌를 하고 김봉연이 홈런왕일때였다.

직접 야구장에서 해태 선수들을 볼 수 있다는 몹시 흥분 된 마음은 경기 중간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와

홈경기에서 져버린 해태의 패배로 찝찝함만 남은 채 끝나버렸지만, 아버지는 늘, 그때 한 번 데리고 가주셨던 걸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 하면서 좋아하셨다.

"내가 이런 아버지였다" 라고 생색내는 걸 좋아하는 전형적인 "라떼와 꼰대"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엄마에게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아버지도 엄마보다 "달달구리"와 탈렌트 원미경을 더 좋아했었다.




내가 확실하게 "달달구리"를 정리한 날은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면회하고 친정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은 후였다.

남편이 밥을 먹은 후에 자연스럽게 커피를 찾았고 엄마는 벌써 물을 끓이고 있을때

내가 심통이 난 것 처럼 "당신 커피 마시지마" 그랬고 엄마는 그런 나를 어이없어하며

"마시게 두지 왜 그러냐며" 나를 나무랬다.

평소에 즐겨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고 온 오늘 날 같은 날,마실려고 하는

남편도 싫었고 마시게 두지 왜 그러냐면서 나한테만 싫은 소리를 하는 엄마도 미웠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던 아버지는 이미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서 몹시 낯설었었고,

효녀의 마음이든, 의리의 마음이든 마음이 복잡해서 누구와도 핑계만 있다면 한 판 붙을 수 있는 그런 마음

그게, 내가 남편에게 마시지 말라는 이유였었지만 엄마와 사위는 마셨고 나는 그날 "달달구리"와 손절했다.


남편도 그 날 친정에서 내 눈치를 보고 마신 "달달구리"를 끝으로 내가 보는 앞에서 떳떳하고  

공식적으로 "달달구리"를 마시는 일은 없었고, 당신 마음도 몰라주고 그 날 커피를 마셨다면서

굳이 사과 할 일이 아님에도 사과를 했다.


커피 믹스 하나로 나는 아버지에게, 남편은 나에게 의리를 맹세한 셈이다.


그래서 지금은 커피를 마시지 않냐고? 아니 지금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커피와 손절은 어려운 일이다.

2018년 교토에 가면서 수원집에서부터 커피 드리퍼를 챙겨갔었다.



일본어 학교 가기 전 커피부터 내리는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곱게 싸서 가지고 갔던 도자기 드리퍼는 다시 곱게 싸서 수원으로 돌아왔고 1년동안 교토에서 나랑같이

열일하면서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전날 빵집에서 얻어 온, 영어로는 crust  일본어로는 食パンの耳, '식빵'라고 부르는 식빵의

옆 면 구워진 부분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드리퍼로 커피를 내려 학교에 가는 게 공부만큼 중요한

내 일과였다.


지금은 남편이 저 드리퍼를 쓰면서 주말이면 드립을 치면서 커피를 드립한다.

"여름 커피는 산미가 있어야 좋은 맛이난대" "물을 내릴 때는 손목을 꺽어서 물을 흘려보내야 돼"

"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다시 부어야지, 물을 마구 내리면 그건 커피가 아니라 원두 목욕시킨 물이다"

"내가 내려주는 커피 마시다가 스타벅스 건 못마실껄"


회사에 커피를 잘 아는 여직원에게 혼나가면서 배워 온 드립 실력으로 주말이면

야매 바리스타가 되어서 커피를 내린다.

남편은 커피보다 말하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에, 커피가 드립되는 동안 남편의 드립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커피는 내릴수록 늘고, 말은 할수록 느는지, 커피는 점점 맛있어지고, 남편의 드립은 가끔 마음을 움직인다.

"아아, 얼른 아침이 됐으면 좋겠다. 당신한테 커피 내려주고 싶어서"


이름도 귀여운 "달달구리"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나에게 "달달구리" 마실거냐고 처음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노란색 커피 믹스를 끊었어요.

"그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라고 속으로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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