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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취직하다.

しゅうかつ  [就活]

우리나라에서는 취업준비 활동하는 걸 취준(就準)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취직활동이라는 단어를

줄여서 취활(就活) - しゅうかつ 슈우카츠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취업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검은색 검정 정장을 입고 다니는 걸 많이 보게 되는데

취직 활동 중인 대학생들이다.

언뜻 보면 "도를 아십니까"의 일본 버전으로 보이나 "도를 아십니까 NONO 직장을 아십니까"


한 손에 기업 설명 자료가 들어있는 종이백을 들고 여자애들이나 남자애들이나 비슷해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다.

교토에서 처음 그런 모습을 봤을 때 이상해 보였는데, 그게 바로  しゅうかつ 슈우카츠였다.

우리나라보다 취업률이 훨씬 높고 이미 내정되어 있는 학생들도 많기 때문에 취직 스트레스가 덜하고

학점도 우리나라 기준만큼 허들이 높지 않다.

실제로 교토의 헤이안 진구 앞에 있는 스벅 앞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취활 중인 대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불쌍하다는 걸 알게 됐다.


"오사카에 있는 회사 면접보고 왔는데 학점이 너무 좋지 않은데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갈 수 있어. 걱정 마"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걱정은 찐 걱정이 아닌 그냥 하는 말로 들렸고 우리나라 대학생들보다는

학점이나 스펙관리에 있어서 스트레스가 덜 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나라나 일자리 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보다는 어쨌든 고생스럽지 않고

취업률도 높다,


알바를 구하는 것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리도 많았고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선뜻 일자리는 내주는 곳이

또한 일본이다.

물론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할머니들도 건강하기만 하면 편의점에서 알바가 가능한 곳이 일본이다.

아직도 생각난다.


헤이안 진구 앞 편의점에 계시던 할머니 아르바이트생

물론 내가 살 던 동네 훼미리마트에도 할머니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보로니아 빵집에서는 빵 자르기의 달인 사토우상 할아버지가 계셨고

배송일을 하시던 아라시 할아버지도 계셨다.

노인 어벤저스들이 당당하게 앞치마를 입고 일하던 곳, 그곳이 일본이다.

일자리를 나이로 차별하지 않고 성별로 구분하지 않았고 외국인 내국인 차이를 두지 않았었다.

내가 겪은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내가 일했던 곳에서는 그랬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에서의 돈벌이가 한국보다 나았다.

내 경우에는 정말 그랬다.




2009년 3월에 초등학교에서 돌봄 전담사 일을 했었다.

6시간 근무로 석 달을 일하다가 8시간으로 바뀐 시간으로 만 4년을 일하고 그만뒀다.

그때만 해도 교육공무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고 비정규직 2년을 일하고 나면 학교장 재량으로 정규직으로

올라갈 때였다.

학교에 취직하기 전까지 누구에게 내세울만한 직업이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내가 을(乙)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을중의 을이란 생각을 했다.

지금은 계약서 양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갑(甲)과 을(乙)이 등장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었다.


갑옷갑甲과 새을 乙

지금은 계약서에 나오지 않는 말이 됐지만, 갑옷과 새라니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다른 갑과 이다.

"교문밖에서 보던 학교와 안에서 보는 학교가 이렇게 다르구나

여기 나가서 어디서 일해도 이보단 낫겠지, 아니 누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는 않겠지"

많든 작든 정해진 날에 입금되는 돈의 맛에 만 4년을 다녔고 더는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찼을 때 교문밖으로 나온 게 2013년 2월 28일이다.


돈이 되는 일은 불법과 비윤리적인 일 빼놓고는 다했다.

남보기에 든든한 남편이 있었어도 바이올린 하는 큰 애와 예중 다니면서 클라리넷 하는 둘째가 있다는 건

노름하는 남편 둔 것보다 더 무서운 돈 쓰는 귀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체육 하는 셋째에게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될 때였다.



재취업은 힘들고도 서글펐다.

오십에 다녀온 만 일 년의 교토살이는 일본어 레벨과 내 삶의 만족도를 등업 시켜줬지만

취업에서는 큰 도움이 못됐다.

중학교에서 학부모 대상 평생교육 일본어 강사를 잠시 했지만 교육청의 한시적 지원사업이라서

오래가지 못했고, 생협 점장으로 칠 개월 일했지만 영업 실적에 대한 압박감은 끔찍한 공황장애를 겪고

끝을 봤다.


돌아 돌아, 더럽고 치사해서 다니기 싫었던 학교로 돌아갔다.

내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학교장 면접만 잘 보면 들어갈 수 있었고 돌봄 전담사 취직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데, 교육 공무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후로 얻기가 어려운 자리가 돼버렸다.


올 해 3월부터 꾸준히 돌봄 전담사 대체 근무를 했다.

교육청에서는 2월과 7월 정식 공고가 나서 인원을 뽑을 때 외에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이 한 둘은 있기 때문에, 사람을 뽑았다.

3월 말에 한 명을 뽑을 때 서류는 통과했기 때문에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다.

1차 통과자 12명중에 면접에서 한 명만 뽑았는데 떨어지고 정신을 좀 차리긴 했다.

셋이 한 조로 들어간 면접에서 앞 번호 사람이 말을 조리있게 하는 데 정신이 휘둘렸고, 면접관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야 됐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신있게 했다.


떨어졌다.


5월지나서 또 한 명 채용공고가 났다.

이번에는 처음처럼 실패하기 싫어서 준비를 했다.

예상 질문지를 만들어서 입에 붙게 읽어보고, 면접 준비를 첫번째 때보다 열심히 했다.

한 명 뽑는데 인원은 첫 번째 때랑 비슷하게 왔고 나는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면접관 의도대로 말을 잘한것 같았지만, 네 가지 질문을 받는 동안 한가지 답변은 산으로 가고 있는 걸

간신히 수습해서 끌어내리느라 힘들었다.


떨어졌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 자신감도 자존감도 함께 떨어졌다.




일은 계속하고 있었다. 어쨌든 대체 전담사 수요는 부족한것이 현실이라 여기저기 다니면서 며칠씩

한달씩 일할 곳은 있었지만 울타리없는 집에서 사는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들지 않는것이 대체 근무자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재미있게,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즐길 것


빚쟁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교육청 공고를 매일 보다가 지지난주 3명의 전담사를 뽑는 공고를 봤다.

짧은 시간동안 지원서 작성하고 예상 질문지 만들어서 면접 연습을 했다.

문장을 고품격으로 다듬고, 답변이 산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문장에 울타리를 쳐가면서 짧지만 임팩트있는

답안을 연구했다.

아버지 제사 지내고 올라오면서 구미에 들러서 막내 짐을 빼서 김포시청 선수단 숙소에 내려주고 수원 집에 돌아오기까지 남편은 열두시간을 운전했고 나는 짐처럼 실려오면서 면접 연습을 했다.



"다 디졌어"

월요일 면접, 떠느라 말을 놓치면 얼마나 억울해

음대생들이 실기전에 먹는 인데놀 한 알을 한시간 전에 먹고 갔다.


네가지 질문중에 예상 질문 셋, 번외 질문 하나가 있었으니 예상 질문은 연습한 대로 조리있게 끊어서 답하고

번외 질문은 면접관이 듣고 싶은 말을 답으로 했다.

앞 사람 답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면접볼 때 앞사람 말에 정신이 휘둘리면 꽝이다)

책에서 봤던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답변의 첫 문장으로 인용하기도 하면서 면접관들의 눈길을 확 잡았다.

(내 생각이지만^^)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없다"

이 말로 먼저 말을 시작하고 풀어서 답변을 했을 때 면접관들 모두 나를 쳐다봤다.

질문에 답을 하느라 풀어낸 말이기도 했지만 합격하고싶은 내 마음을 간절히 담아

답변과 연결한 말이기도했다.


면접준비를 하면서 알았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내가 떨어지게끔 면접을 봤구나. 면접관들 탓할게 아니라 내 탓이었던거다.


합격했다.

아줌마 취활(就活) - しゅうかつ 슈우카츠 성공이다.

전에 함께 일했던 선생님 한 분은 화분을 선물해줬다.

화분 선물로 갑자기 임용고시붙은 것 처럼 됐다며 웃었지만 따뜻한 한마디 말에 화분 선물은

새로 시작하는 곳에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잘해보고 싶은 용기를 주는 향수처럼 느껴진다.


희망사항에 정년퇴직이라고 쓸 수 있는 아줌마가 된 첫 출근날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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