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깨닫는 즐거움
어릴적, 누구나 한번 쯤은 나르시즘에 빠져 보지 않았을가 싶다.
그때는 무엇이든 잘 하고 있고 잘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거 같다.
작고 사소한 성취를 이루어 낼 때 마다 어머니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에 걸맞는 감당할 수 있는 일들만 주어졌었고,
피곤한 가난이 우리 가족을 자주 궁핍 속에 몰아 넣었지만, 내 차례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게 내게 주어진 고난의 전부였다.
시간은 나를 어른으로, 남편으로, 아빠로, 수석으로, 팀장으로, 연구소장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허무함을 느끼던 어떤 순간에,
세월이 빨리도 가는구나 하고 탄식하던 순간에, 비루한 깨달음이 오고야 말았다.
손에 쥐어진 것은 노벨상이나 상장이 아닌 신용카드와 가장이라는 무거운 손수레의 손잡이 라는것.
현실로 돌아와 희끗 희끗한 새치를 염색하며, 꾸역꾸역 이력서를 집어넣고서야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다. 임원을 달 나이에 스타트업 회사에 지원했다.
직급은 없고 직무만 있는 스타트업. 대표도 아닌 직원으로 들어갔다.
대표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지만, 염색을 하고 젊은 옷을 걸쳤다.
간만에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쿨한 자태를 하면서 자기최면을 했다.
나는 아직 젊잖아. 할만 해. 이정도 쯤이야 하면서...
글을 쓰다가, 그동안 뭐 했는지 떠올려 본다.
대기업에서 16년을 지겹도록 부대끼며 회사 욕만 하다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회사 소속이 바뀌면서 또 한번 회사 욕을 하다가,
저물어 가는 회사로 옮겨서 불씨 붙이다가 화딱지 나서 대표랑 싸우다가,
결국 스타트업으로 왔다.
기회는 숱하게 지나갔는데, 왜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을까.
깨달음이 느리면, 맘이 고생한다.
그리고,
배움이 많은곳은, 몸이 고생한다.
이젠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단지 상대적인 속도의 문제일 뿐,
스스로 원하는 길로 잘 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