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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May 29. 2021

관성과 감수성

쏴버린 탄환은 일단 사람의 손을 떠난 것이다.

화약이 터지자 마자 강력한 불꽃이 구리 탄환을 밀어낸다.

총신의 안쪽에 새겨진 나선형 홈은 탄환에 마찰을 일으킨다.

일정한 곡률이 만들어내는, 약하지만 지속적인 마찰력은 탄환을 회전시키고,

탄환은 겨눔 자에 의해 설계된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한다.

바람이 약간의 변수로 작용한다. 지속적으로 부는 바람은 애초에 설계된 포물선의 궤도를 바꿔 놓는다.

지속적으로 부는 측면 바람은 1km 넘게 날아가는 탄환에게는 총신 내부의 나선형 홈과 근본적으로 같다.



새로운 곳에서 생활한 지 두달이 되었다.


이곳은 기술력이 뛰어난 곳이고, 대부분이 엘리트 개발자들인 그런 곳이다. 

성수동 핫플레이스에 인접해 있고 실리콘밸리의 오피스에 온 착각이 들 만한 인테리어의 사무실이다.

나만 운 좋게 들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회사에 들어온지 3주가 지나서 알게 되었다.

강한 관성의 탄환이 쏘아졌고, 표적에 닿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는 것!


내가 일하는 회사는 랩으로 시작했다. 돈벌이에 급급하기 보다는 기술로 정면승부 하겠다는 의미에서 랩이었다. 많은 투자가 있었고 기술스타트업으로 충분히 엑시트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던거 같다. 그래서 한껏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습득했다. 하지만 원천기술을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글로벌 톱 기업이 오픈소스를 공개하면, 그것을 활용하는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근래의 인공지능 기술들이 그렇지만, 원천기술을 개발하려면 엄청난 자금력이 필요하다. 그런 자금이 없는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기업의 공개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타 경쟁사와 평준화된 기술환경에서, 얼마나 차별화된 솔루션을 제공해 줄 것인지가 더 중요해 졌다. 


원천 기술도 아니고 차별화된 솔루션도 아닌 어중간한 포지션 에서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미 탄환은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쏴 올려 졌고 궤적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었다. C레벨 분들과 다섯차례 가량의 1:1 미팅이 이어졌고, 빠르게 반응하고 대응해야 할 시점에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골몰히 생각했다. 어중간한 방향으로 벗어나 버린 궤도를 되돌릴 좋은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애초에 타깃을 잘못 잡았다는것!


지금과 같은 때 늦은 시점에서 경영자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까?

경영자가 스스로 다시 타깃을 다시 잡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성공 방정식과 관성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들소처럼, 폭주하는 기관차 처럼 빠르게 달린다. 성취지향형 인간들을 멈추거나 쉬어가게 하기는 쉽지 않다.


100개의 스타트업 중 5년을 버티는 회사는 27개, 10년을 버티는 회사는 8개 정도다.

가장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고,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내 스스로 생경한 장면일 뿐이었다.

조직의 크기와 상관 없고, 그저 감수성의 문제였다.


문제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문제는 알지만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 문제를 일단 덥어두고 나중으로 미루는 것... 세가지 문제적 상황을 동시에 발견했다. 이런 문제점들은 감수성의 부재라는 동일한 원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입사 한 지 한달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까칠한 충고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더 이상은 어떠한 조언도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스스로의 경솔한 선택을 탓하며 회사를 그만 두기로 마음 먹었다.

씁쓸함 때문인지 며칠 통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두달 만에 맥 없이 퇴사한다.


웃지 못할 촌극을 마음 속에 묻어두고

오늘도 늦은 밤까지 잠못 이루고

몇 글자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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