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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Dec 24. 2021

난민들과 배우는 스웨덴어

늦은 나이에 뭔가를 배운다는 건 쉽지 않다. 하다못해 늙은 개에게 새로운 트릭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서양의 한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 속담을 현재의 나에게 적용시키면, 오래된 개는 나이고 새로운 트릭은 스웨덴어에 해당한다. 지금 나는 이민자를 위한 스웨덴어 기초 과정을 반년 넘게 다니고 있다. 그 전에는 1년 넘게 왕기초 과정을 마쳤다. 왕기초 과정에 다닐 때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외계어 같은 스웨덴어였다. 이게 정말 언젠가 알아먹을 수 있는 언어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심각하게 들었다. 그랬던 스웨덴어도 이제는 어느 정도 들리기 시작한다. 이젠 간단한 대화로 일상도 가능하다. 늙은 개도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새로운 트릭을 배울 수 있는 셈이다.  

스웨덴어를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당연히 없다. 늘 영어만 마스터하면 내 언어 습득의 과정은 끝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난데없이 생소한, 그리고 많은 인구가 쓰지도 않는 언어를 배우게 된 것은 이제 이곳에 정착하고 싶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참 영어를 잘한다.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들도 기초적인 영어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스웨덴 TV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늘 미국 프로그램을 어려서부터 봐서 그래.'라는 자조적인 대답을 듣게 된다. 그건 맞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 스웨덴 TV 프로그램은 정말 재미가 없다. 따라서 TV로 스웨덴어를 연습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차라리 뉴스나 듣는 게 더 재미있을 지경이다. 사실 뉴스는 유익하기도 하다. (물론 괜찮은 프로그램도 있다. 과장을 더했다.)

영어를 잘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커뮤니티에 속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서 스웨덴어는 필수다. 물론 스톡홀름과 같은 대도시는 예외다. 국제적인 기업이 많고 업무 자체가 영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대도시가 아닌 이상 스웨덴어를 모르면 취업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스웨덴어가 이렇게 장벽이 되는 건, 스웨덴 사람들은 언어로 뭉쳐진 소속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티를 내면서 이민자를 배척하지는 않지만 스웨덴어를 쓰지 않으면 왠지 다가갈 수는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웨덴에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그들이 내게서 느끼는 이민자들의 거리감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요즘 스웨덴어를 몇 년째 배우고 있다. 모든 과정이 무료로 진행된다. 반년 전에는 영주권까지 나와서 아주 적은 돈이긴 하지만, 공부하는 학생에게 주어지는 정부 지원금도 매달 들어오고 있다. 이건 장학금과는 달리, 스웨덴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신청하면 그냥 주어진다. 원하면 저금리로 융자까지 받을 수도 있지만, 빚내는 걸 극도록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것까지 신청하지는 않았다. 


힘들게 스웨덴어를 배우고 있지만, 상당히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우리 반 학생 대부분이 난민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대부분이 시리아 난민들이다. 우리 반에는 나 혼자 아시아인이다. 

난민들 속에 섞여서 공부를 하다 보면, 생경한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된다. 그들 대부분이 영어를 할 줄 모르고 고등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대부분 넉넉하지 못한 사정을 가지고 있다. 

쉬는 시간에 가끔 수다를 떠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는 중학교를 간 적이 없어서...'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최대한 표정의 변화 없이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어느 날은 PPT로 발표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학생 대부분이 PPT를 사용해 본 경험이 없었다. 우리가 자주 쓰는 구글에 대한 개념도 없었으며, 워드 문서 작성도 경험이 없었으며, 크라우드에 문서를 저장하는 방법이나 메일로 과제를 파일로 첨부하는 간단한 방법도 수업시간에 전부 교사가 알려줘야 할 처지다. 

PPT 발표 과제가 주어지자 많은 학생들이 당황하는 눈치였고, 반 친구들은 내게 PPT 작성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느라 내가 바빠졌다. 아주 간단한 사진 첨부도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파워포인트 사용법을 가르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비해 난 얼마나 혜택을 누리고 살았는가?'

어느 날은 여성과 남성의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이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낮았다. 그들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남성인 나와 스웨덴 교사가 나서서 여성과 남성은 모든 면에서 동등할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설명할 정도였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쓰던 만년필을 처음 보는 학생은 도대체 이 펜은 신기술로 만든 것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녀에게 이건 오히려 오래된 방법으로 만들어진 펜이라고 말해줘야 했다.)

난민들 속에 있으면서 내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구나?를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 사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가난하다. 어쩌면 난민에게 주어지는 정부 보조금으로 그들의 경제적 상황은 나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평소 궁상맞다고 싶을 정도로 절약을 몸에 밴 경제적 가난을 실천하고 있는 나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틈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내가 마치 엄청난 교육을 받고 엄청난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해지는 걸 느낀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하셨다.

"아들아! 너보다 잘 사는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너보다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을 봐라."

물론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은 늘 비교만 하며 불행한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위치에 늘 만족만 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단계로 발전하기 힘들다. 또 그렇다고 너무 앞만 보고 달리면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놓치게 된다. '지금에 만족하느냐, 혹은 불만족하면서 더 나은 발전을 이룰 것이냐' 사이에서 사람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 중간의 어느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지혜로 자신의 정신 건강과 발전하는 나의 모습 어느 시점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스웨덴 명문 대학 석사학위를 마친 나는 종종 그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그들과 같은 출발점에 선 사람일 뿐이다. 스웨덴어 기초라는 출발점에서 내가 더 배웠다고 스웨덴어를 더 잘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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