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토타 비치클럽 호텔
코코넛 수영장
'벤토타 비치 호텔'을 가기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지난 번에 잠시 들렀던 호텔의 수영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나서기로 했다. 그 수영장 사이로 빼백이 들어찬 코코넛 나무도 좋았다. 그 코코넛 사잇길을 걸으면서, 다음에는 꼭 수영복을 챙겨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간편해야할 여행 가방에는 수영복과 읽을 책, 땀에 젖어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갈아입을 여벌 티셔츠가 들어가더니 빵빵해져 버렸다. 가방 속 물건들을 다시 땅바닥에 쏟아내곤 잠시 고민을 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은 제외하고 다시 가방에 담았다. 편안한 형태로 돌아온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여행,
상대적인 일상
넉넉지 않은 돈으로 지내는 스리랑카의 생활이라, 호텔이라는 호사는 자주 찾아오는 이벤트가 아니다. 여전히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갈 형편은 안 된고, 그저 호텔에서 제공되는 점심 뷔페나 실컷 먹고, 야자수의 그늘 반과 햇빛 반을 섞어 놓은 야외 수영장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고 싶었다. 뷔페와 수영장 이용료는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이 조금 되지 않는다. 한국의 물가를 생각하면 싼 가격이고, 이 나라의 물가를 생각하면 친하게 지내는 현지 친구들에게 말 못할 정도로 비싼 가격이다. 언제나 상대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싸구려 버스는
땀 냄새를 품고 달린다
버스를 타고 땀이 나는 몸을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콜롬보에서 골 로드를 따라 약 2시간을 넘게 달렸다. 도시를 벗어나 달리는 버스는 점점 투명하고 푸른 바다 위에, 더 하얗고 풍성한 하얀 크림을 얹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로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큰 도시가 주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매료되어 건축과 도시를 공부했지만, 알면 알수록 인간과 가까운 스케일이 더욱 좋아진다. 그렇게 도시 밖의 매력을 알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인가, 조금은 멜랑꼴리한 생각도 든다.
싸구려 버스는 에어컨이 당연 없다. 최대한 열어 놓은 창을 통해 인도양 건넌 바람이 들어온다. 덥고 습도가 높고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다. 그나마 버스가 멈추면 그 바람도 멈춘다. 얇은 티셔츠 안, 척추 골을 따라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창 밖, 저 멀리 파도 위에는 멋지게 균형잡고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인다. 길에는 티셔츠를 벗어 어깨에 걸친 유럽인들이 짧은 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렇게 벤토타에 도착했다.
작고 평범한 스리랑카의 어촌,
벤토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이곳 '벤토타'에는 몇 개의 작은 상점과 현지인들이 사는 허름한 집들이 전부다. 그저 작고 평범한 스리랑카의 어촌마을이다. 할 일 없는 현지인이 멀뚱멀뚱 외국인을 신기한 눈에는 이런 질문을 담고 있다.
"이 작은 마을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들 몰려 오는 거요?"
이제야 알 거 같다. 날 것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말이다. 원래 모습 그대로 자연은 아름답지만, 자꾸 사람들은 거기에다 뭔가를 보태려고 든다. 이곳에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작은 고급 리조트들로 속속히 들어서고 있었다. 4~5년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면 참 안타까워진다.) 유럽의 눈먼 투자가 유입되던 말든 별다른 이득이 없는 지역주민은 그저 이곳의 개발현황을 거리를 둔 채 그저 바라볼 뿐이다. 아직 돈 맛을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저들도 곧 사납게 돈에 달려드는 사람으로 변해 버릴까?
여행자로서,
우리의 잘못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 여행자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비행기를 이용해 기후변화를 적극 앞당기고 있고, 우리가 방문하는 곳에 경쟁적으로 건물이 들어서게 만들고, 현지 물가를 비현실적으로 올리고,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고, 현지인에게 돈 맛을 알게 만든다. 이뿐인가? 의식하지 못한채 현지인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건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식민주의의 변형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렇게 세상을 휘집고 다니고 있다. 그러니 조금은 우리의 잘못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무엇이 '해가 덜 되는 여행'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자연 뒤에 간직한
끔찍한 내전의 역사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이렇다 할 건축가가 없었던 스리랑카는 관광산업의 개발을 위해 지어진 1960-90년대의 호텔 프로젝트들을 바와에게 많이 맡겼다. 바와의 건축물에 유독 호텔이 많은 이유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개발된 지역과 바와의 건물이 분포한 지역을 살펴보면, 콜롬보를 기준으로 서남부 쪽에 몰려있고 중부지역에 약간 있는 프로젝트가 전부다. 북쪽과 동쪽지역에는 바와의 건축물도 없을 뿐더러 개발된 흔적도 역사도 없다. 바와의 건물도 그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과 내전기간과 맞물리면서 주로 서/남부지역에 분포하게 된 것이다. 내전은 2009년도 말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1965년에 시작된 타밀인들의 독립운동으로 시작된 내전은 1983년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에서 정부군 몇 명이 타밀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사건 후 결성된 무장 반군과 정부군 간의 길고긴 살육의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약 26년 동안 8만 여명이 사망하고 26만이 넘는 난민을 발생시켰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트라우마로 몰아간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왜곡시키고 만다. 소년병들은 아직 여물지도 않았을 이념으로 화약과 총을 들어야 했다. 오랜 내전은 사람들을 광적으로 몰아갔다. 죽음 앞에 무감각해진 군인들이 사체를 쌓아놓고는 광인이 미소를 지으며 기념촬영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전쟁이 낳은 광인들이었다.
바와의 수작 중 하나,
벤토타 비치클럽 호텔
벤토타 비치클럽 호텔은 제프리 바와의 호텔 프로젝트 중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호텔 건물이 아름다운 건 건물 혼자만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바와의 건축이 아름답고 놀라운 건, 그가 자연환경에 기대어 건물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감각때문이다. 이 호텔 건물도 아름다운 벤토타의 풍경과 만나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가 즐겨 사용하는 다듬지 않은 바위를 적절한 곳에서 노출시키면서 건축물이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드는 그의 기법이 이곳에서도 보인다.
호텔 건물이 아름다운 건
건물 혼자만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다수의 호텔을 지은 제프리 바와는, 건축가가 되기로 결정하기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느꼈던 점을 설계에 반영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 했던 가치는 스리랑카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속적 경험과 추억을 제공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오랜 내전으로 불안정했던 치안으로부터 안전한 건물, 여행자들이 열대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현대적 건물에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그럼에도 그의 건물에는 전통적 요소를 어설프게 반영하거나 베껴놓지 않고 독창적으로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바와는 마치 잃어버린 고대장소의 흔적, 중세시대의 스타일과 분위기, 식민지 시대의 건축 양식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게 만든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리랑카 전통건축물 및 유적지, 식민지시대의 건축물을 방문하고 연구한 결과다. 이러한 과거를 더듬는 손길이 현대를 여행하는 이에게도 여전히 어필하고 있다.
코코넛 나무로 둘러싸인
호텔
그가 만들어낸, 혹은 벤토타 해변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효과는 훌륭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모래톱 위에 지어진 호텔 앞 모래사장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야자수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저 멀리 인도양의 바다는 암초에 부딪쳐 하얀 거품을 연거푸 만들어내곤 이내 다시 고요해지길 반복한다. 초기의 계획안은 거대한 공공 공간과 30개의 객실이 전부였다. 바와는 자연을 압도하지 않을 규모의 작은 호텔을 원했다. 그러나 설계가 진행되면서, 20개의 객실이 있는 북쪽 동이 추가되고, 40개의 객실을 위한 남쪽 동이 추가되었다.
호텔로
들어가보자
거친 쇄석으로 마감이 된 건물 하부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성벽을 모방한 것이다. 스리랑카 골(Galle)이나 마타라(Matara)에 있는 포트(Port)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래된 성벽 같은 외벽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쇼핑 아케이드와 주차장 그리고 위층 로비로 향하는 돌계단이 있다. 다소 작고 어둑어둑한 곳을 지나 로비로 들어가니, 분위기는 반전된다.
중정을 향해 과감하게 열린 왼쪽 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의 느낌이 좋다. 화려한 색과 문양으로 장식된 천장은 지역 바틱(Batik, 촛농으로 문양을 만들고 염료를 발라 염색하는 공예)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다. 내전으로 공사자재와 가구, 조명, 장식품 등을 수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시절이라 이렇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를 주로 사용하고, 되도록이면 지역 예술가의 도움을 받아 건축물 내부를 꾸몄다.
정신을 쏙 빼 놓은
중정
이때까지 살면서 세상에서 본 중정 중에 이렇게 내 정신을 쏙 빼어 놓았던 중정은 없었다. 중정의 연못에는 나무가 자라는 세 개의 작은 섬이 있다. 섬 위의 큰 나무는 마치 물위를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물 표면에서 반사되는 나무의 복잡한 줄기와 하늘이 중정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섬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가 만드는 잔잔한 물결이 수면에 반사된 풍경을 일그러트린다.
각 객실의 발코니는 낯선 나라의 열대풍경을 바라보기에 최적화된 장소다. 야자수는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산란시켜 준다. 무서울 정도로 푹푹 찌는 더위에도 금방 어두워져 비를 쏟아내는 하늘이 신기해 쳐다보면, 선명한 번개가 바다 수평선 위로 떨어진다. 해질녘에는 태양의 주황색 광선이 바다의 물결에 반사되어 수 만개의 파편으로 반짝거린다. 스리랑카의 노을은 참 아름답다.
살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좋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음식을 먹고, 야외수영장으로 내려갔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비치베드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나무 그늘 밑에 누워 하늘을 보고 등을 눕히자 코코넛 나무 사이로 스리랑카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맨살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좋다. 저 멀리서 시끄럽지 않은 대화의 소리가 들린다. 내 옆에는 작은 다람쥐가 먹을 것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다. 광활한 평원에 누워있는 듯 조용하고 약간은 고립된 느낌을 주는 평화가 느껴진다. 누워서 책을 읽으려 했지만, 정작 그 편안한 풍경 속에서 머리마저 생각하기를 멈춰 버렸다. 그저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몸의 근육은 긴장하기를 멈춘다. 잠시 잠이 들었나 보다.
갑자기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천둥소리에 이끌려 바닷가로 갔다. 먼 하늘의 시커먼 구름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구름 밑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저 신기한 자연현상을 또 정신을 놓고 만다. 그 비 구름은 점점 호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호텔 마당이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