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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강 (3)

스리랑카 건축여행기 #5

by 안종현
루누강가
인간의 손을 더한, 원시림의 정원


나는 왜

건축을 포기했을까?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국에서 유명한 건축가 한 분이 교수님으로 오셨다. 꽤나 멋진 건축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로 건축을 공부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그런 분이셨다. 그 당시 건축과 학생들은 유명한 건축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된 사실에, 흥분하거나 감격에 빠져 있었다. 학교는 흥분으로 어수선했고. 도대체 그 분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올까?라는 기대로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분의 강의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club-house-gallery-schmidt-hammer-lassen-architects_dezeen_1568_0.jpg 본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출처: Schmidt Hammer Lassen Architects)



그는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멋진 모습으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강의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뭐랄까? 이제껏 보지 못 했던 새로운 방식의 뭔가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건축을 하려면 이 정도 규범을 가볍게 무시하는 게 멋이어 보이는 법이야.'라고 말하는 듯해 보였고,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우리는 그의 행동이 그저 멋있어 보였을 뿐이다.

'역시 유명한 건축가는 이런 작은 행동조차도 남 다르구나...'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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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검정색 톤을 맞춰서 옷을 입은 걸 좋아했다. 마치 수도승처럼 무채색 계열의 옷만 입었다. 그날도 낡아 보이는 검정색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오늘 말야. 프로젝트 현장에 공구리(콘크리트로 집의 형태를 잡는 작업)를 치는 날이었거든. 중요한 날이라 직접 현장에 갔다가 오는 바람에 늦었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그리곤 콘크리트 똥이 군데군데 뭍은 코트를 벗어, 한 학생에서 밖에서 좀 털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그 학생에게 들은 바로는 그가 입었던 건 아르마니 코트였다고 했다. 건축가란, 막노동을 하는 순간까지도 멋을 즐길 줄 아는 존재인 걸 그때 알았다.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서울대학교를 다니는 사람?"

그러니까 내가 다니던 학교는 분명 서울대가 아니었다. 서울대 학생이 여기서 청강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그분의 명성이라면 가능했을 일이지만), 서울대 학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는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아무도 손을 드는 학생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자기가 돈 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

물론 학생 중에는 잘 사는 집안 출신의 자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누가 부자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나는 부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렵게 서울로 왔기 때문에 빠듯한 살림살이는 나의 유학으로 더 빠듯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자신의 부를 과시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들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을 안하는구나. 그럼 자신의 부인이 잘 사는 사람?"

음... 이분은 수업시간에 왜 자꾸 이런 곤란한 질문만 던지는 것일까? 그러니까 대학생 3학년이 일찍 결혼을 할 수도 있다. 뭐 애기가 생겼거나, 겁나게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는 인생목표를 설정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직업도 가지지 않은 학생이 결혼을 했을 리가 없었고, 나도 결혼을 한 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곤란하고 황당한 3가지 질문을 끝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너네들은 건축 하지마라."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파랗게 젊은 열정으로 건축가가 되려고 이곳에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선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얼핏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건축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몰랐다. 우리는 그저 멋진 건물을 설계하고픈 마음만 있었다. 한 마디로 아직까지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순진한 학생일뿐이었다.

그가 말하는 건축가의 자격은 건축 설계 디자인을 잘 하는 능력을 우선을 뽑지도 않았다. 건축가로써 자신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건 돈이 아니면 인맥이라는 말이었다. 돈도 없고, 훌륭한 인맥을 줄 학벌도 없다면 건축가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그는 어떤 것으로 성공한 건축가였을까? 돈이었을까? 인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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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의 건축가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비겁하다. 불평만할뿐, 사회적 책임감도 없고 직업적 사명감도 없다. 그래서 그저 돈 많고 학벌로 인맥팔이나 하는 건축가들에게 늘 뒤쳐지면서도 능력으로 보기 좋게 뭉개줄 생각조차 안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나이에 난 건축가 되는 게 두려웠다. 충분히 가난을 경험했기에 두 번 다시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건축가가 되길 포기한 첫번째 이유는 바로, 가난하게 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스리랑카라는 못 사는 나라에 가서 돈이 없이도 훌륭한 건축물을 짓는 그들의 실력을 내 눈으로 봤고, 내가 어렸을 때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겁쟁이였을 뿐이었다. 내가 싫어했던 한국의 건축가들처럼 비겁했다는 것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한국에는 바와와 같은

건축가가 없을까?


'바와 같은 건축가가 한국에는 왜 없는 걸까?'

스리랑카에서 살던 2년 동안 바와의 건축은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리고 느낀 점은 안타까움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건축가를 가지지 못했을까? 도대체 그 이유는 뭘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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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파라다이스,


바와는 이곳에서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즐겼으며, 그러한 흔적은 정원과 건축물 곳곳에 남겨져 있다. 건축과 예술계의 만남은 그 당시 열악했던 스리랑카의 문화활동을 고려하면 획기적인 시도였다. 사실 바와가 세상을 떠나고, 스리랑카의 건추계는 물론이거니와 예술계 또한 그 화려했던 시절은 끝이 났으며, 끝없이 성잘할 것 같았던 성장세도 숨을 멈추고 말았다. 한 사람의 죽음이었지만, 그가 스리랑카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주말이 되면 바와의 친구들이 이곳으로 몰려 들었다. 정원에서는 강이 내려다 보였다. 자신들의 이상을 공유하고, 웃고, 떠들고, 차를 마시던 정원. 이제는 오래된 흑백 사진으로만 그날의 즐거움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루누강가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천재 건축가의 파라다이스이자, 그들만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지금의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어딜 가더라도 소란하고 복잡했던 스리랑카의 길거리가 무색할 정도다. 이곳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다. 열대우림 속 공기는 마치 느리게 부유하는 먼지처럼 나의 폐 깊숙이 와서 닿았다가 빠져나간다. 그 공기 속 알갱이가 느껴질 정도로 습기가 가득하다. 빠르던 발걸음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속도를 늦춘다. 시선은 힘이 빠져 마치 약이라도 한 듯 멍해지다가 초점을 맞추길 반복한다. 숨을 쉬는 게 자연스럽다. 얍삽한 생각만 주로 하던 머리도 잠시 작동을 멈춘다.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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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공간을 걷다


그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의자가 비어있다. 그리고 그가 앉아서 식사를 하던 탁자도 비어있었다. 주인이 떠나자 그를 찾아오던 친구들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다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찾아오는 마니아들의 비밀스러운 명소가 되었다. 그는 떠나고 없지만, 그가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던 장소에서 그의 모습을 그려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곳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그저 그이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마치 차원이 다른 공간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1950년대 초반에 바와는 루누강가 정원 프로젝트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디자인을 완성하기에는 돈이 부족했고, 그가 명성을 더해가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밀려드는 프로젝트로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루누강가 프로젝트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의 건축작업은 콜롬보와 이곳 루누강가를 오가며 진행되었다.


루누강가1 (149).jpg 바와의 작업실이었던 <정원의 방>



타인의 취향 따위

고려하지 않은 곳


1983년도에 지어진 정원의 방(Garden Room)은 바와의 주된 작업실이었다. 입구를 통해 오솔길을 올라 방문객을 위해 지어진 2층 건물 밑을 지나면, 동쪽 테라스 근처에 위치한 곳에 바와의 작업실이 있다. 이곳에는 넓은 공간에 업무를 보던 긴 책상이 놓여 있고, 밖을 조망할 수 있는 창과 의자가 있다. 오로지 그 혼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혼자만 작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긴 책상, 혼자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의자가 남겨져 있다. 타인을 들일 계획이 없었기에, 타인의 취향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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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누강가1 (163).jpg <정원의 방> 바와의 책상


이렇게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이 낯선 나라, 이 가난한 나라에 있다니. 늘 공부하고, 늘 동경하던 건축이 있던 미국, 일본, 유럽이 아니라 인도 밑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에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눈을 뜨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제까지 공부를 해오던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미친듯이 미국을, 일본을 동경하며 살았던 것일까? 그 결과는 뭘까? 결국은 제프리바와와 같은 건축가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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