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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31. 2024

단테의 별 – 2권 1부 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

법무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구속된 83명 전원을 감형 또는 사면했다. 사회정화위원회가 청탁풍조배격 범국민운동을 무기한 전개키로 하였다.


학교에서도 신학기를 맞아 학부모촌지를 절대 사양한다는 가정통신문과 함께 성적표를 배포했다.

문일고등학교는 2학년을 새 학기 반배정부터 아예 우열반으로 편성하였다. 문이과 별로 1개 반씩 우수반과 열등반을 두었다. 3학년은 대학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눴고, 대학진학반 상위 50명이 심화반이었다.

문승협이 속한 1학년신입생들은 3월 월말고사결과로 선별했다.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2개 반을 우수반, 뒤에서 100등까지 2개 반을 열등반, 나머지 5개 반을 보통반으로 각각 우반, 열반, 평반이라 불렀다. 등하교와 일과시간수업은 원래 교실에서 하였으나, 방과 후 시간은 학습능력차이로 수업난이도를 달리 한 우열평반교실로 옮겨 다녀야 했다.

학교가 학생을 전교 100등까지는 우수학생으로, 나머지는 잉여학생으로 갈라버렸다. 점수로써 우열을 구분한 억압과 불평등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가르쳐야 할 학교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성적을 잣대로 될 아이와 안 될 아이로 구별한 못된 처사였으며, 학교가 행사하는 온갖 차별의 근원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우열반발표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특히 우수반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무력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학교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강박에 시달렸다. 자신의 지능과 공부능력을 자책하였다.

1학년학생들은 방과 후 수업시간에 교실을 옮기면서 친구들의 성적 수준을 가늠했다. 우수반에는 사리 분별없이 우쭐대는 아이가 있었고, 평반이나 열반에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드는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선생들이 열등반을 돌머리반이라 하여 ‘똘반이라고 폄하하였다. 열등반아이들은 다가 걸리거나 복장불량에라도 걸리면 ‘똘반놈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수시로 손찌검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성적에 따라 학업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을 모아놓은 거라지만, 그렇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청소년기학교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열등반은 보통반에, 보통반은 우수반을 목표로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으면서도, 열등반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는 부정적 문제가 상존했다.


방과 후 수업시작종이 울렸다. 문승협과 김용남은 우수반이라 1반에서 만났다. 김부일은 열등반이라 9반으로 옮겨갔다. 우열반편성 이후 김부일의 말수가 급속히 줄었다. 일과시간에 문승협을 기피하였다.

문승협은 이유를 알기에 김부일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이미 상한 자존심에 자칫 더 큰 상처를 줄까 봐 조심스러웠다. 어떻게든 도움 될 방법을 찾으면서 대화할 적당한 기회를 엿봤다.

며칠째 방과 후 수업 쉬는 시간마다 열등반교실이 어수선했다. 음주, 흡연, 폭력 등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도 있었기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

영훈중학교 싸움짱출신 우장일이 위세를 떨었다. 담배문제로 횡포를 부려 소란이 여러 번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순응하여 별 탈 없었다. 김부일이 행패를 보다 못해 한마디 하면서 사달이 났다.

우장일이 어수룩한 아이들을 골라 매일같이 담배심부름을 시켰다. 매번 원하는 담배를 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쌍욕을 하며 드잡이질 하였다. 김부일이 몇 번 지켜보다 지나치다는 생각에 말렸다.

“어이 우장일, 저 아그는 순진해갖고, 뭔 담배가 있는지도 몰라야. 맥없이 승질만 부리지 말고, 은하수믄 은하수 수정이믄 수정, 니가 원하는 담배이름을 확실히 말해. ”

“옴마 그라냐? 그라믄 니가 대신 담배 좀 사 올래?”

“나도 담배 안 핀께 모른디 으짜까? 그라고, 내가 누구 꼬붕은 안 해.”

“유도 좀 했다드만, 유도는 안 하고 입만 놀렸냐? 확 조동아리를 조사 불란께, 깝치지 마라잉.”

“쌈 좀 한다고 대접해 줄 때 얌전히 있어라잉, 괜히 불란 일으키지 말고.”

“뭣아, 싸가지없는 새끼 말하는 뽄대보소, 확 아구창을 돌려불란께.”

“어허, 아그들 앞에서 쪽팔리기 싫으믄 가만히 있으란께. 엄연히 학교에서 담배 금진디, 이것이 뭔 짓거리여? 하루가 멀다 아그들 괴롭히고, 시끄럽게 욕이나 해쌌고 말이어.”

“하, 저 씨발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해부렀네, 으나 디져부러라.”

우장일이 김부일에게 의자를 던지며 달려들었다. 둘이 엉겨 붙어 몸싸움과 주먹이 오갔다. 유도유단자인 김부일이 엎치락뒤치락하다 조르기를 했다. 우장일이 숨이 막혀 괴로워하자, 우장일패거리 네댓 명이 동시에 김부일에게 덤벼들었다. 조동구와 강덕구가 옆에서 지켜보다 김부일 편에 합세하였다. 순식간에 패싸움으로 변해 격렬하게 싸웠다. 교실이 난장판 된 가운데, 교련선생과 체육선생 등 학생부선생들이 들이닥쳤다.

김부일은 코피를 흘렸고, 조동구는 입가에서 피가 났으며, 강덕구는 이빨이 깨졌다. 우장일은 팔이 부러졌고 눈두덩에서 피가 흘렸으며, 우장일패거리도 얼굴에 피범벅에 온전한 아이가 없었다.

다음날 학부모들이 학교에 불려 왔다. 다행히 쌍방이 합의하고 학기 초라는 이유로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김부일과 조동구 등은 근신 1주, 우장일은 근신 4주, 우장일패거리들은 근신 2주였다.

이 싸움으로 문일고싸움서열이 대충 정리되었으나 계속 서로 으르렁거렸다. 우장일은 또래 중 싸움을 잘하고 깡이 좋아서 성인깡패들에 의해 키워지는 깡패유망주였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불가였다.

학교는 이들이 근신하는 동안 함께 있으면 또 싸울까 봐 근신장소를 달리하였다.

문승협이 빵과 우유를 사 들고 김부일과 조동구를 찾아갔다. 김부일은 콧등이 조금 부어 멍들었고, 조동구는 입가가 터져 반창고를 붙였으며, 강덕구는 오른쪽 눈이 멍들고 앞니 하나가 반쯤 깨져있었다.

“어때, 근신은 할만하냐?”

“아야, 꼭 감빵에 면회 온 거 같다잉.”

“감방은 가봤고?”

“허허, 경찰서는 가봤어도, 감빵은 아직 안 가봤제.”

“지랄, 곧 감방도 가볼 기세다? 동구야, 덕구 좀 정신 차리게 한 대 때려줘라.”

“빵은 아무나 간다냐, 이 시끼는 쫄보여서 감빵 근처도 못 가.”

“뭐 한디 왔냐?”

“너희들 보러 왔지, 부일이 넌 괜찮냐?”

“잉 괜찬해, 봤으믄 언능 가라, 쪽 팔리다야.”

“다친덴 없고?”

“잉 괜찮하단께, 괜찬한께 언능 가야.”

“알았어, 갈게. 또 올게.”

“승협아, 담에 올 때는 도나츠 좀 사 와라잉.”

“그래도, 근신한디 빵 사 온 놈은 니가 첨이다야.”

문승협이 불편해하는 김부일 때문에 군말 없이 돌아섰다. 강덕구와 조동구가 문승협뒤통수에 한 마디씩 했다.

“동구야, 니는 뭐 한디 내 편들어갖고 이 고생이냐?”

“니가 저 서울놈 친군께, 승협이 친구믄 내 친구여.”

“승협이를 언제부터 알았는디?”

“저놈이 서울서 전학 왔을 땐께, 3학년 때제.”

“승협이가 5학년 때 전학 왔는디 뭔 소리대?”

“덕구야, 내가 국민학교3학년 때 승협이를 첨 봤어.”


조동구가 국민학교 3학년때였다.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가 한동안 점심시간만 되면 학교동산에 올라와 울었다. 의아해서 지나가다 왜 우는지 물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면 엄마얼굴이 떠오르고, 엄마얼굴이 떠오르면 보고 싶어서 문물이 난다고 하였다. 조동구도 동생과 자신을 보육원에 맡긴 부모생각으로 힘들었던 터라 공감되어 인상에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사라졌다. 5학년때 몇 번 충돌한 후에야 그 아이가 다시 전학 온 문승협이란 사실을 알았다.


조동구는 문승협과 얽힌 추억을 더듬어 친구가 된 과정을 김부일에게 털어놓았다. 자기 동생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 것도 문승협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부일이 무슨 영향인지 되물었다.

동생 조남구가 국민학교2학년 때 고아원생이라는 이유로 급식빵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 편견 없이 하나하나 따져 누명을 벗겨준 아이가 문승협이라고 하였다. 그 덕에 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전교 1등을 한다며 빙긋이 웃었다.

김부일은 조동구이야기를 듣고도 문승협이 어떤 아이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나쁜 짓을 막을 용기 있는 친구, 먼저 배려하여 말을 안 해도 아는 친구로 느꼈다. 유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통한 것도 한몫했다. 이전에는 맛있는 떡볶이를 같이 먹으며, 같은 취미와 놀이에 별난 경험을 함께하는 것이 좋은 친구라고 여겼다. 문승협을 알면서 차츰 바뀌어갔다. 무엇보다도 좋은 친구 옆에서는 좋은 것을 배우고, 나쁜 친구 옆에서는 나쁜 것을 배우지만, 처음부터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에 대한 편견이 없는 아이가 문승협이었다.


부모들이 친구를 가려서 사귀고 좋은 친구를 가까이하라며 귀가 닳도록 말한다. 그럼에도 온전히 부모말뜻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없다. 그냥 주위친구들을 탐탁지 않아서 하는 잔소리인 줄로 안다. 부모들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친구형성과정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부모들은 성적과 행실에 따라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로 분류하고, 관찰의 시간을 갖은 뒤 좋은 친구를 선택하라며 강요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음 가는 데로 끼리끼리 먼저 친구가 되고 친구면면을 알아간다. 그렇게 형성된 친구관계를 부모기준에 따라 단칼에 단절할 수 없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고, 친구문제로 갈등과 고민이 늘 따라다녔다. 그만큼 청소년기에 공부이상 중요한 부분이 친구였다.


근신이 끝나는 날, 문승협이 도넛을 사들고 다시 찾아갔다. 강덕구가 농담으로 한말인데 흘려듣지 않았다며 감격스러워하였다.

“야, 감동은 넣어둬. 두부 사려면 교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못 나가니까 대신 사 온 거야.”

“우리가 출소하냐, 두부는 무슨.”

“하하, 장난으로 한 말이야, 맘 상했냐?”

“…….”

“아따 부일아, 그래도 우리 생각해서 도나츠도 사 왔는디, 인상 쓰믄 쓰냐.”

“…….”

“승협아, 냅둬부러. 부일이가 근신이 첨이라, 그럴 만도 해야.”

“아무튼 너희들 수고했다, 내일 교실에서 보자.”

문승협은 화난듯한 김부일을 뒤로하고 교실로 갔다. 김부일마음을 풀해법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막 출발하는 버스에 급히 오르다 앞선 승객에게 밀려 발을 헛디뎠다. 뒤로 넘어지는 순간 누군가 등을 받쳤다. 김부일이 부축해 주고 땅에 떨어진 문승협모자를 털어 건넸다. 둘은 아무 말없이 있다가 다음 버스를 같이 탔다.

“뭐야, 너 아직도 삐쳤냐?”

“내가 니냐, 삐지게? 뭐가 급하다고 서두냐 서둘긴, 그란께 넘어지제.”

“넘어지긴 누가 넘어져, 후방낙법으로 딱 모르냐?”

“그 후방낙법은 누구한테 배웠는디?”

“너다, 왜?”

“고맙단 말은 사양하께.”

“으이그, 속 좁게 굴기는.”

“아이고 미안하요, 밴댕이 소갈딱지멩키로 굴어서, 내가 아조 쪽 팔려서 그랬쏘.”

“그럼 내가 잘 못한 거네.”

“뭔 소리대?”

“그렇잖아, 내가 공부나 싸움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면, 네가 그렇게 쪽 팔렸겠어? 너를 쪽 팔리게 만든 게 나잖아, 그러니까 내가 잘 못한 거지.”

“야, 나 스스로가 못나보여서 그럴 수도 있잖애?”

“그래, 그걸 자존심이라고 해. 친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으니까, 내가 잘 못한 거라고.”

“뭔 소리까잉, 니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잖애, 이건 나 혼자 생각이란께?”

“맞아, 그렇게 생각하게 했니까 내 잘못이야. 야, 나는 네가 공부 잘하고 싸움 잘하고는 아무 상관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너를 친구라 생각한다고.”

“에이 모르겄다, 분명 다른디 묘하게 설득돼부네.”

“부일아, 틀린 게 아니라면, 다른 점은 인정해 주는 게 친구야.”

“알았어, 알았고, 부탁이 하나 있는디.”

“뭔데?”

“나 공부 좀 갈쳐주라.”

“오호, 기특한 녀석, 이제야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구나?”

김부일은 버스에서 내리는 문승협을 물끄러미 보았다. 얹혀있던 감정이 내려가면서 문승협에게 부끄럼이 없어졌다. 어느 친구보다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문승협과 김부일은 일단 4월 월말고사까지 같이 공부하기로 하였다. 평일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 구별 없었으며, 주말에는 시간을 맞추기로 했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재미있는 일도 생겼다. 100원으로 대폭 인상된 라면값을 체감하였다. 대부분 목욕비를 800백 원 받았으나 500원 받는 목욕탕도 알게 되었다. 특히 열등반에서 유행하는 버스회수권 10장을 잘라서 11장으로 늘리는 기술은 절묘했다.

사람들이 인쇄 질이 나쁜 일회용 버스회수권을 위조하기도 하였다. 대신 회수권을 낼 때마다 들킬까 봐 가슴 졸였다. 안내양이 바빠서 확인이 어려운 등하굣길과 출퇴근시간이 겹치는 시간에 주로 사용했다. 그에 비하면 11장으로 자른 회수권은 비교적 당당하게 냈다.


문승협이 고등학교에 들어와 보이스카우트연장대 첫 봉사활동을 나갔다. 선배보이스카우트들과 용당광장사거리와 문일고정문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였다. 교통봉사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박현선배가 토요일에 시간 비우라고 명령했다. 제원여고걸스카우트와 미팅이라지만 사실은 남강선배소개팅 들러리였다.

남강이 써니라는 제원여고2학년을 좋아하였다. 박현은 둘을 만나게 해 주려고 작전을 짰다. 문승협은 짝사랑 열병에 걸린 남강선배를 위하여 반드시 나가야 했다. 더구나 박현과 주선한 제원여고2학년이 문승협을 지명하여 피할 수 없었다. 자기가 예뻐하는 1학년후배를 데려가겠다며, 그 여학생파트너로 문승협을 콕 찍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문승협은 교실로 찾아온 두 선배에 이끌려 코롬방제과점 2층으로 갔다. 10여분 뒤 제원여고2학년 두 명이 왔다. 문승협은 들러리여도 첫 미팅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여고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곧이어 제원여고1학년 한 명이 1층에서 올라왔다. 정수리부터 점차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홍지아였다. 문승협은 적잖이 놀라 아는척해야 할지 망설였다. 홍지아는 안면몰수하고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둘 다 실수할까 싶어 얌전히 있었다. 주선자진행에 맞춰 자기소개를 하였다. 남강도 홍지아가 문승협친구임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박현의 계획에 따라 파트너를 선택하였으나, 주선자들을 빼면 1학년은 1학년끼리 이미 정해져 있어 형식적이었다. 남강과 써니에 이어 문승협과 홍지아가 자연스럽게 파트너가 되었다.

남강이 써니라 애칭 하는 제원여고2학년 황선희는 영화‘라붐’으로 유명한 배우‘소피마르소’를 닮은 이국적 이미지였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질문은 거의 없이 대답만 하였다. 주문한 빵과 우유도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남강이 홍지아를 제수씨라고 부르는 실수를 하자 궁금한 점을 꼬박꼬박 물었다. 남강이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초면에 제수씨라고 부르믄, 결례 아니여요? 아니믄, 서로 아는 사인가?”

“긍께, 수상한디, 둘이 아는 사이요?”

“아, 실은 중학교 때 같이 캠핑 갔어라우.”

“예? 둘이 캠핑을 갔다고요?”

“뭔 일이까잉, 그라믄서 소개팅해달라고 했으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덕일중하고 인혜여중이 캠핑 갔었고요, 여그 승협이랑 잘 알아라우.”

“지아야, 니는 문승협이 아냐?”

“예 언니.”

“제수씨라고 부를 정도믄, 보통사이가 아니잖애?”

“제가 중학교 때 좋아하는 티를 좀 냈어요.”

“오메, 그라믄 인연인갑다잉. 나는 둘 사이는 전혀 모르고, 둘이 잘 어울릴까 비 소개한 건디.”

“언니, 저도 여기 와서 놀랐어요, 문승협이 있어서.”

“근디 으째 아는 체끼도 안 했냐?”

“놀라기도 했지만, 미팅한다고 여기와 있는 거 보니까, 화가 좀 나더라고요.”

아무리 당돌한 홍지아라도 선배 앞이라 말수가 없었으나, 서로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색된 태도가 풀렸다. 마치 본색을 드러내듯 씩씩하게 할 말을 다 하였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문승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잠깐 오해가 풀리고, 파트너끼리 시간을 갖자며 자리를 옮겼다. 문승협과 홍지아는 선배들 시선에서 벗어나려 1층으로 갔다. 누가 볼까 싶어 구석자리를 찾았다. 뜻밖에 김부일이 여학생과 앉아있었다. 깜짝 놀란 건 오히려 문승협이었다. 김부일은 비밀을 발견했다는 듯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문승협과 홍지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문승협은 마땅한 자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김부일옆쪽테이블 하나 건너에 앉았다. 빵은 됐다는 홍지아에게 파인애플주스를 주문해 주었다. 자꾸 신경 쓰이는 김부일을 곁눈질로 봤다. 김부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홍지아가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문승협이 어색한 미소로 김부일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김부일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가볍게 목례하자, 여학생도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누구야?”

“아, 김부일이라고, 우리 반 친구.”

“근데, 왜 아는 척 안 했어?”

“여학생이랑 같이 있잖아.”

“쟨 너 아는 척했잖아.”

“응?”

“너 나랑 있는 게 창피해?”

“아 아니야, 그냥 좀 부끄러워서.”

“오메오메, 부끄러운 사람이 미팅에는 으째 나왔으까잉? 쟤는 안 부끄러운가 보다, 그지?”

“아이 참, 미팅은 선배 때문에 억지로 온 거야. 친구를 아는 체 안 한 건, 네가 불편할까 봐 그런 거고.”

“하나도 안 불편하거든.”

“하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투정 부리실까요.”

“너 말이야, 그만 좀 헤실헤실 웃고 다녀, 너 헤실이라고 별명 생겼어.”

“내가? 나 실없이 웃고 다닌 적 없는데?”

“등하굣길에 너 지나가면, 제원여중고학생들이 귀엽다고 호들갑 떨면서 난리야 난리.”

“난 몰라, 전혀 모르는 일이야.”

문승협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헤실이라고 불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어리둥절하여 홍지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부일이 불쑥 건너와 합석하자고 하였다. 홍지아가 문승협의 동의 없이 냉큼 책가방을 챙겨 자리를 옮겨갔다. 문승협은 별수 없이 홍지아와 나란히 앉아 동석했다. 김부일이 여자친구 채영이를 소개하고 통성명하였다. 홍지아가 스스로 자신을 밝혔다.

“저는 승협이랑 안 지 4년 됐어요, 제원여고 다니는 홍지아라고 합니다. 우린 국민학교6학년 때부터 만났는데, 영이씨네는 얼마나 됐어요?”

“중3겨울방학 때 만났은께, 1년 좀 넘었네요.”

“아, 둘이 사귀세요?”

“호호, 예.”

“지아씨, 우리 동갑인께 말 놓으까라우?”

“승협아, 부일씨가 말 놓자는데?”

“그래, 그러자.”

“우린 서예학원에서 붓글씨 배우다 처음 만났는데.”

“우린 주산학원에서 주판 놓다가 만났는디, 호호호.”

홍지아는 채영이와 이야기 나누면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먼저 사귀자고 한 사람이 김부일이라는 말에 문승협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국민학교 때부터 사귀었냐는 질문에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승협을 째려보았다. 남녀사귐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로 30분쯤 지나고, 남강이 계산했다면서 황선희와 먼저 나갔다. 홍지아는 그 뒤로도 30분 정도 더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는 문승협에게 입을 삐쭉 내밀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부일은 채영이를 집에 바래다주러 갔다. 문승협은 홍지아와 집으로 향하면서 10미터쯤 떨어져 걸었다. 홍지아가 집 앞에 다다라 문승협 옆에 바짝 다가섰다. 오늘 미팅상대로 자기가 아니었으면 어쩔 생각이었는지 물었다. 문승협이 너여서 감사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하자, 홍지아가 혀를 날름 내밀고 눈을 흘겼다.

“그러고 보니까, 채영이가 단아한 얼굴에 한복이 잘 어울리는 춘향이 같은 느낌이야.”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 부러운 거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채영이가 부러워.”

“지아야, 너도 엄청 예뻐, 뭐 그런 걸 부러워하냐?”

“누가 얼굴이 부럽다냐, 남자랑 사귄다는 게 부럽다는 거지.”

“너도 사귀어, 그럼 되잖아.”

“그럼 우리 사귈까?”

“아, 나 나는 아직 여자친구 사귈 맘 없어, 미 미안.”

“됐어, 꺼져.”

홍지아가 순간 울컥해 작별인사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자기 방에 곧장 가서 책상 위 남자아기천사인형을 밀어 넘어트리고 엎드렸다. 속상한 마음에 저절로 눈물이 났다. 저런 문승협태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새삼스레 왜 이러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남자아기천사인형을 일으켜 세워 여자아기천사인형을 바라보게 했지만, 여자아기천사인형은 등을 돌려놓아 외면하였다.

문승협은 홍지아의 거친 말보다 화내서 놀랐다. 집으로 가는 길에 슬퍼하는 홍지아모습이 상상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홍지아와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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