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
문현아가 중학생이 되어 인혜여중에 입학하였다.
“현아야, 입학식 잘하고 와, 덤벙대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강지영선생님 찾아가, 오빠이름 말하면 잘 도와주실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
문승협은 꼬맹이였던 문현아가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어 생소했다. 국민학교와는 또 다른 중학생활을 잘할지 오빠입장에서 걱정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떨린다 겁난다 불안해하더니, 이제 와서 잔소리한다며 큰소리치는 동생태도에 어이없었다. 그래도 잘 커가는 모습에 안도하였다.
“승협아, 혼자 가도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문승협은 중학교입학 때 불안함을 알기에, 엄마가 동생입학식에 가는 걸 당연히 동의했으나, 속으로는 엄마가 내 입학식에 온 적 있냐며 빈정댔다.
문승협도 검정교복옷깃에 새 고등학교배지를 달았다. 高자배지가 달린 검은색교모를 쓰고 입학식을 하러 등굣길에 나섰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지나가는 중학생들이 왠지 무척 어려 보여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하여 행여 중학생으로 어리게 볼까 봐 모자에 高자배지가 잘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버스회수권을 주면서 버스안내양과 눈을 마주치고 과시했지만, 고등학교 2∙3학년들이 버스 안에 가득해 얼른 눈을 깔았다. 그들 눈에는 어려 보이는 이제 고1이라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였다.
떨린 마음으로 문일고등학교교문을 들어섰다. 보이스카우트단복을 입는 남강선배가 신입생과 학부모들을 안내했다. 반갑게 다가가 인사하였으나, 자기 반을 찾아가라는 짧은 말이 돌아왔다. 임무 때문에 바빠서라고 이해하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아 조금 서운했다.
신입생인파에 휩쓸려 운동장으로 갔다. 먼저와 반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김부일을 발견하였다.
“야, 부일아.”
“왔냐, 우리 5반 이드라.”
“너도 5반이야?”
“잉, 교문에 붙은 거 본께, 니 이름도 있드라.”
“아야 서울놈, 문승협.”
“어, 용남아, 너도 문일고냐?”
“잉, 나는 니 문일고로 떨어진 거 폴쎄 알았어.”
“나는 철종이만 홍인고인 줄 알지, 다른 애들 소식은 하나도 몰라.”
“무심한 놈, 니가 전화 돌리믄 되제.”
“참, 둘이 인사해라. 애는 김부일이고, 애는 김용남.”
“아, 니가 김용남이냐?”
“잉, 니가 그 홍인중 유도부주장 김부일?”
“잉, 아따 반갑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하하, 얼굴은 첨 본디, 이름은 들어봤제.”
“너희들이 그렇게 유명해?”
“얌마, 니 이름도 웬만한 아그들은 들어봤을 거여.”
“어이, 서울놈.”
“뭐야, 조동구 너도 문일고야? 강덕구도?”
“잉, 무자게 오랜만이다잉,”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긍께, 한 3년쯤 된 거 같은디?”
“용남이랑은 문일중까지 같이 다녔으니 잘 알 테고, 여긴 내 친구 김부일이야, 인사해. 이쪽은 국민학교 동창 조동구하고 강덕구야.”
“홍인중 유도부 김부일?”
“잉, 반갑다, 니가 조동구냐?”
“잉, 반갑다.”
“나는 강덕구여, 별명은 깡다구고, 허허허.”
“너희들은 만난 적도 없으면서, 이름만 들어도 알다니 신기하다야.”
“다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 거 아니겄냐, 안 그냐?”
“음마, 그렇게 돼분가.”
“근데, 용남이하고 동구는 그동안 안 싸웠냐?”
“허허, 염병하네. 그때 국민학교 이후론 그럴 일 없다야, 우리 잘 지내.”
목포가 좁다면 좁지만 남자중학교만도 십여 개나 되는 꽤 큰 도시였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생판 모른 또래를 안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공부나 싸움 잘하는 아이들끼리 또는 특기생들끼리는 잘 알았다. 나름 그들만의 리그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문승협은 평소 관심 밖이라 알지 못했다.
부모들이 친구를 가려 사귀라거나 좋은 친구를 가까이하라는 말은 일리 있었다. 부모들이 생각하는 좋은 친구가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 공부 잘하는 아이로 국한되는 것이 문제였다. 청소년기에 좋은 친구조건은 공부도 싸움도 아니고, 가난도 부자도 아닐뿐더러, 그저 마음 통하는 친구가 제일이었다.
문승협은 아는 친구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면서 고등학교생활에 대한 긴장이 다소 누그러졌다. 오히려 기대가 새록새록하였다. 강덕구가 문일중에 다녀서 문일고를 잘 안다고 거들먹거렸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학교전경을 가리키며 이모저모 학교시설을 알려줬다.
스피커에서 ‘소속된 반에 줄 맞춰 서’라는 안내가 나왔다. 친구들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 반으로 갔다. 문승협은 김부일과 1학년 5반에, 김용남과 강덕구는 1학년 3반에, 조동구는 1학년 7반 줄에 섰다. 곧이어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1학년 담임과 교과담당선생소개를 끝으로 입학식을 마쳤다. 담임인솔에 따라 모두 교실로 들어갔다.
문승협의 담임이 각자 편한 자리에 앉으라더니, 칠판에 ‘全在成’이라고 한자를 썼다. 이름이 전재성이라면서 반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세 번 읽게 한 뒤 한문을 가르친다고 했다.
전재성선생이 반장이나 부반장 해본 사람 손들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마뜩잖아 가만히 있었다. 손을 든 청화중학교부회장출신 명성윤에게 일주일 뒤 반장선거까지 임시반장을 맡겼다. 학교역사로 시작하여 선배들이 육군해군공군사관학교에 많이 진출했다는 자랑으로 문일고소개를 마무리지었다. 종례가 간단하여 다른 반 보다 30분 정도 일찍 하교하였다.
문승협은 방향이 비슷한 김부일과 버스를 탔다. 김부일집이 서너 정거장 뒤라, 문승협이 먼저 내렸다.
집 가는 길에 여중고생들이 많아 의아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여학생무리가 늘어났다. 쑥스러워서 옆을 스쳐가는 여학생들을 피해 고개 숙이고 걸었다. 땅만 보고 가는데 여학생구두 여러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얼른 피해 가려고 옆으로 움직이자, 여학생구두가 똑같이 움직여 길을 막아섰다. 다시 옆으로 피했더니 또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당황스러워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땅에 돈 떨어졌냐, 뭐 한디 고개는 숙이고 다니냐?”
“어? 민주야, 여선아, 진숙이도 있네?”
“니 여학생들 많은께 부끄럼 타서 고개 숙인 거제?”
“긍께 말이어, 우리가 길을 막아 분께 어쩔 줄 몰라갖고는, 호호호.”
“야,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좀 조용히 말해라.”
“딴 사람들이 아니라, 딴 여학생들이겄제?”
“그래, 창피해서 그랬다, 됐냐?”
“집에 가냐?”
“응, 너희는?”
“우리도 인자 집에 가는 길이어, 입학식 끝나고.”
“그런데 왜 이리로 와?”
“아하, 제원여중고가 이짝으로 옮긴 지 모르그만?”
“우리 학교 이짝으로 이사 왔어야, 우리는 제원여고로 떨어졌고.”
“진짜? 그 학교건물 벌써 다지었구나, 난 몰랐어.”
“어이, 문일고 학생. 인자 아침저녁으로다가 마주칠 텐디, 부끄러워서 으짜스까?”
“야, 너희들만 이러지 않으면 돼.”
“그라믄 통행세라도 내든가, 꽁으로는 택도 없다잉.”
“그럼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다니면 되지 뭐.”
“그렇게 고생하든 말든 맘대로 하쑈, 이녁 맘인께.”
“아야, 저그 선생님 온다, 언능 가자. 무담시 걸려갖고 경치지 말잔께.”
“승협씨, 담에 또 봅시다잉, 호호호.”
문승협은 제원여중고가 이전한 줄 몰랐다. 등하굣길이 여중고생들과 겹친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앞으로 있을 등하굣길이 심란하였다. 여전히 하교하는 여학생들이 많아 다시 고개 숙이고 걸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 또 여학생구두 한 켤레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 지아야, 너도 제원여고야?”
“응, 누가 또 제원여고야?”
“아, 좀 전에 국민학교동창들 마주쳤거든.”
“그래서, 좋았어?”
“응, 그렇지 뭐.”
“호호, 부끄럼 많으신 승협씨가? 저 많은 여학생들이 있는데?”
“좀 그러긴 그랬어. 근데 오랜만이다, 잘 있었어?”
“응, 그냥저냥. 너는?”
“나도 뭐, 그냥저냥 그래.”
“문일고라며?”
“응. 넌 좋겠다, 학교 가까워서. 나는 학교가 멀어져서, 등교시간이 늘어나 걱정이야.”
“몇 시에 등교하는데?”
“보통 7시 반, 늦어도 8시에는 버스를 타야 해.”
“오호, 그 시간 언저리면, 지나가다 볼 수 있겠네?”
“혹시라도 마주치면 나 놀리지 마쑈잉. 나는 아는 체 못한께 이해하시고요.”
“호호, 어련하실까. 저기 너네 집 그대로지?”
“응.”
“그래,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나도 피아노교습 가야 해서.”
“그래, 조심히 가.”
문승협은 배시시 웃는 홍지아가 예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조신해지고 한층 성숙해 보였다. 가면서 뒤돌아 보는 홍지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문승협은 낯가림이 많아 등교 시 여학생인파를 통과하기가 여간 부끄러웠다. 때때로 장난기 많은 2∙3학년 여고생들이 등굣길을 막아서고 말을 걸어와 매번 난처했다. 이를 피하려다 보니 등교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전재성선생이 반장선거에 앞서 문승협을 호명하였다.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 부반장에 반장도 여러 번 했으면서, 지난번 임시반장을 지명하려 할 때 손들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문승협은 나서기 싫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하였다. 결국 명성윤과 문승협이 입후보했다. 투표결과 명성윤이 반장, 문승협이 부반장에 뽑혔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라 교무실을 오가는 일이 많아 바쁘게 움직였다.
“성윤아, 너 청화중 다녔니?”
“잉, 너는 덕일중 나왔다믄서?”
“응. 김일한이나 천영기 알아? 아, 이정주도 있구나.”
“다 알제, 일한이는 학생회장 했어, 영기는 선도부였고 정주는 기획부장. 왜야?”
“국민학교동창들이야.”
“근디, 너 서울말씨다잉.”
“아, 5학년 때 전학 왔는데, 아직도 익숙지 않네.”
문승협은 이방인이라는 선입견을 걱정해 사투리를 쓰려 노력하였다. 덕분에 사투리가 많이 늘어 친한 친구들과 편히 말했으나, 긴장하거나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과는 여전히 서울말투가 튀어나왔다. 서울놈이라는 별명도 계속 따라다녔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동아리에 가입시키려 빈번히 교실을 들락거렸다. 동아리가 농악, 문예, 독서, 축구, 농구, 복싱 등 중학교 때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였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기에 철학부도 있었다. 문승협은 남강과 박현 선배가 있는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했다. 중학교와 가장 다른 점은 남녀고등학교 모두 학도호국단과 교련수업이 있었다. 남자고등학생들은 교련수업을 위해 교련복과 각반, 요대 등을 갖췄다. 여자고등학생들 또한 교련복 또는 상응한 위생구호복장과 구급낭을 구비하였다. 교련수업은 주 2시간씩이었다. 남자고등학생들은 교련복장에 교모 끈을 턱에 내려 고정하고, 제식훈련을 비롯해 무거운 M1플라스틱소총으로 사격자세, 총검술 등을 익혔다. 여자고등학생들은 붕대를 이용한 응급처치법과 환자이송 등 구호구급법을 습득했다. 남녀공통적으로 분열식과 열병식을 배워 시찰 나온 영관급장교에게 사열을 받았다. 교련검열이 있을 때면 점심시간과 방과 후 연습은 당연지사에 불합격 시 재 검열을 받았다.
3월 월말고사성적을 토대로 우열반을 편성하겠다는 학교방침은 고등학생들을 공부지옥으로 몰아갔다. 문교부가 우열반편성허용을 발표한 지 불과 5개월 만이라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혼란을 주었다. 우등생은 우등생대로 열등생은 열등생대로 고민이었다.
정부의 우민화정책인 3S일환으로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변화가 일었다. 작년에 편성된 KBS‘젊음의 행진’에 이어, MBC에서 ‘토요일토요일 밤에’ 후속으로 ‘쇼 2000’과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첫 전파를 탔다. 많은 연예오락프로그램이 새롭게 편성되었다. 공부를 강요당하는 고교생들에게 TV시청은 언감생심이었다. 겨우 보더라도 어른들 눈치를 많이 보아야 했다.
제5공화국의 3S정책은 민심이반을 잠재우고 달래기 위해 기획되었다. 국민들 관심사를 쿠데타와 독재 같은 정치에서 스크린SCREEN, 섹스SEX, 스포츠SPORT인 3S로 돌리려는 목적이었다. 국민들 눈과 귀를 막아 어리석은 백성을 만든다 하여 우민화정책이었다.
스크린정책으로는 컬러 TV방송에 이어, 새로운 드라마와 각종 연예프로그램을 새로 편성해 방영하였다. 질보다 양적인 영화상영으로 동시상영관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다.
섹스정책으로는 성매매업소 등 윤락업소를 묵인해 급증하였다. VTR보급으로 포르노테이프유통과 에로영화시리즈가 허용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행금지해제가 급물살 탔다.
스포츠정책으로는 이미 88 올림픽과 86 아시안게임유치를 선언했다. 야구와 축구, 씨름과 농구 등 프로스포츠경기가 기획되었다. 이외에도 ‘국풍 81’이라는 이름으로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가요제 등 대형이벤트들이 줄줄이 예고하였다.
누군가가 4S라 칭한 스피치SPEECH정책으로는 언론통제를 위해 언론 폐간과 통폐합을 했다. 수많은 언론인이 해임되었다. 보도지침으로 일일이 간섭해 확인 후 기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땡전뉴스’라는 유행어도 생겼다. 저녁 9시 땡 하고 시보가 울림과 동시에 ‘전두환대통령께서는~’하며 그날 중요한 소식보다 대통령일상이 가장 먼저 뉴스에 나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유사한 우민화정책을 찾아보면, 대중의 불만을 잠재워 황제의 인기를 얻으려 열었던 로마시대 검투사경기가 있었고, 베를린올림픽을 독재정권의 힘으로 선전한 나치의 괴벨스가 있었다. 이는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을 필요로 하는 독재자들의 필수 통치수단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고교생들에게는 대중문화에 대한 호기심자극과 더불어, 교복과 두발 자유화로 관심사를 돌렸다. 우열반편성허용으로 통제했다. 국가가 국민을 세뇌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울대생 3백여 명은 ‘반파쇼 반민주투쟁선언’을 배포하고 교내시위를 벌였다.
내무부가 연좌제폐지와 전과기록말소지침을 발표하였다. 제11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선거개표결과 여당득표율은 35.6%로 그리 높지 않았다. 2인중선거구제와 전국구를 1당에게 2/3를 배분하는 다수당에 극도로 유리하게 짜여있었다. 지극히 여당에 유리한 선거제도에 따라 지역구에선 과반에 가까운 90석, 전국구 2/3인 61석을 더해 총 151석으로 과반 139석을 넘겼다. 관제야당인 민한당 81석 21.6%, 국민당 25석 13.3%, 군소관제정당인 민권당 2석 6.7%, 신정당 2석 4.1%, 민사당 2석 3.2%, 무소속 11석이었다. 신군부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했다.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면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막론하여 초선비율이 매우 높았다.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규제를 당하지 않은 신민당출신들이 민주한국당을, 민주공화당출신들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국군보안사령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창당자금을 제공하여 공천자명단과 당직임명까지 관여했다. 심지어 민정당에 공천을 신청하였더니 민한당에서 공천을 받았다는 사례가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상 북한과 다를 게 없는 일당제를 예고했다. 제11대 총선이 북한최고인민회의와 다를 게 없는 관제선거라는 악명을 얻지만, KBS에서 별개의 선거개표전산시스템을 갖춘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개표방송이 시작되었다는 의의가 있었다.
태선화학 박동후회장동생이자 문승협의 진외가작은할아버지인 박동일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박동일은 유신헌법최고기구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원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제5공화국개정헌법에 따라 폐지된 뒤 전국구에서 지역구국회의원으로 새로운 정치활동을 모색하였다.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구관리를 위한 조직운영과 정당공천 등에 사용할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박동후에게 태선화학성장에 공헌한 대가로 손을 벌렸다. 민정당후보로 국회의원선거를 치르면서 박동후회장의 자금과 인맥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태선화학에서도 전 직원과 직원 친인척들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정치활동규제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은 물론 구민주공화당계인사조차 출마를 금지당한 상태에서 여당과 관제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주사회당, 민주농민당)만으로 치러진 선거였기에 쉽게 당선했다.
입법회의가 154일 만에 활동을 종결하면서, 언론중재위원회와 방송심의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레이건미국대통령이 워싱턴힐튼호텔에서 괴한의 총에 맞았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레이건암살미수사건발생으로 박정희대통령 서거를 경험한 국민들이 한동안 술렁였다.
문승협은 우열반편성을 앞둔 3월 월말고사로 심히 압박받고, 부쩍 늘어난 부모다툼에 더욱 긴장하였다. 공부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부부싸움 중 들리는 아버지의 큰 소리에 매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버지와 같이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쁘기보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묘한 불안감이 엄습한 이유였다. 유년기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산 날이 많지 않은 어색함도 아니었고, 신이 주신 이데아를 찾는 청소년기 불안감은 더욱 아니었다. 그동안 자라면서 부모싸움을 봐온 트라우마였다. 문승협에게 아버지 문경준은 의지와 존경의 대상이면서 두려운 존재였다.
문경준이 두 차례 사업실패 이후, 주위평판에 의기소침해 말수가 줄고 자신감이 떨어져 당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었으며 본사근무도 잘 적응하였다. 하지만 태선화학부산사무소에 근무하는 셋째 문경철과 자의타의로 비교되면서 스트레스와 열등감이 쌓였다. 계장인 자신보다 동생 문경철이 두 직급 높은 과장이어서 불만과 갈등이 커졌다. 이를 아내 이항리에게 짜증으로 표출했다.
문경준은 엄마 박옥춘이 외갓집에 가서 확인 안 된 소문과 억측으로 아버지 문재환을 험담해 위상을 깎아내리고 출세를 막는 것이 제일 싫었다. 그런 엄마처럼 아내 이항리도 똑같은 행태를 보여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아내가 외삼촌 박동후회장집에 가서 자신을 뒷담화해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이 회사내외에 돌았다. 평판에서도 승진에서도 걸림돌이라 생각하였기에 화내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이항리가 기회 있을 때마다 박동후회장 집에 가서 하소연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집살이와 고부갈등문제, 문경준을 만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염문과 부부싸움 중에 있었던 몸싸움 등, 그동안 서운하거나 한스러운 일들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속에 담아놓기보다 말로써 털어놓고 가슴속 응어리를 풀자는 것이 점점 습관 되었다. 그런 행동이 남편에게 불이익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였다.
문경준은 잘 풀리지 않은 자기 문제를 아내에게서 찾으며 비아냥 섞인 잔소리와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었다. 이항리는 자존심 상한 나머지 목청 높여 대꾸했다. 싸우는 목소리도 한층 높아져갔다. 서로 감정에 골이 생기다 보니, 작은 일에도 자주 부딪혀 싸우는 횟수가 차츰 늘어났다. 높아진 목소리가 절정에 이르자, 분에 못 이겨 욕이 더해졌다. 어느새 거리낌 없는 욕에 몸싸움이 반복되고, 문경준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문경준이 화나서 이항리에게 갑자기 소리 지르면, 문승협의 심장이 싱크홀처럼 폭삭 꺼졌다. 문경준이 버럭 하여 이항리와 싸움을 시작하면, 문현아가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눈물 흘리는 문윤아와 함께 문승협방으로 피신오기 일쑤였다. 문승협은 놀라서 사시나무 떨듯하는 동생들을 얼른 껴안아 주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바빴다. 문승협은 불안해하는 동생들을 달래면서도 혹시나 자신들 때문에 싸울까 봐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다독였다. 부부싸움이 어서 끝나기만 애타게 기다렸다. 부부싸움 중에 욕이 나오면 동생들 귀를 막았고, 차라리 아빠가 분이 풀릴 때까지 엄마가 참아주길 바랐다. 친구들과 일상생활에서는 참견하며 잘잘못을 따져 중재했으나, 부부싸움은 아빠가 무서운 나머지 말릴 엄두를 못 냈다. 빈번해진 부부싸움이 점차 격렬해지면서 이혼하자는 말이 오갔다. 문승협남매들은 가정이 깨질까 하는 두려움에 숨죽여 울었다. 말로써 불행을 정의하지 못하였지만 괴로움만으로도 충분히 불행을 느꼈다. 부부싸움이 끝나더라도 며칠간은 눈치보기 급급했다. 충격에서 벗어나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였다. 망가진 감정에도 학교생활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밖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친구들과 잘 지내다가도, 집에 들어오면 눈치 보고 숨 막혀서 말이 없어졌다. 이중적인 태도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생활도 반복되면서 익숙해져 갔다.
문승협은 부모의 부부싸움여파로 고난주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우열반편성에 중요한 3월 월말고사를 열심히 준비하였다. 충분한 실력발휘를 못했으나 최선을 다해 치르고 시험결과를 기다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