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
다음날 오전, 문승협은 김부일과 약속을 지키려고 시립도서관에 갔다. 시립도서관은 넓은 남녀공용열람실이 있고, 남녀를 구분한 소규모열람실도 있었다. 학생들이 붐비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야외열람실을 개방하였다. 남녀가 어울리거나 떠드는 행위를 엄격히 제한했다. 적발되면 한차례 경고 후 곧장 퇴실조치하였다. 입장할 때 학생증 같은 신분증을 받고 원하는 자리를 우선배정했다.
김부일이 열람실에 들어서는 문승협에게 매점으로 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뒤따라 갔다. 채영이가 먼저 와있었다. 문승협이 앉자마자, 김부일과 채영이가 동시에 홍지아와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문승협은 홍지아를 알게 된 과정을 짧게 이야기했다. 잠깐 뜸 들이다 친구사이로 정의해 버렸다.
도서관매점에서 파는 때 이른 팥빙수를 먹으며, 김부일에게 추천한 성문기초영문법과 수학기본정석을 폈다. 가르쳐준 공부진도를 확인하고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채영이가 유심히 지켜보더니 같이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은행에 취직하길 바라는 아버지등살에 목원여상을 갔으나, 대학진학이 꿈이라고 하였다. 김부일이 고개를 끄떡이며 문승협의 답변을 기다렸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난 좋아. 복습도 되고, 내 공부도 되니까.”
“승협아, 고맙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뭔디야?”
“공부란 게 말이야, 공부한 만큼 비례해서 바로 성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공부도 지구력이 필요해. 다시 말하면, 당장 원하는 성적이 안 나와도 끈기 있게 계속해야 해.”
“알았어, 끈기 있게.”
“그래서 말인데, 둘이 만나면 놀지만 말고, 공부도 같이 하라고.”
“오메오메, 우리 압씨랑 똑같은 말을 한다잉.”
“부일아 가만있어야, 승협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디. 승협아, 니 말대로 그렇게 하께.”
“야, 벨꼴시럽다, 손 놔라. 감히 선생님 앞에서 남녀가 손을 잡다니.”
“하하하, 호호호.”
채영이와 김부일의 표정이 밝았다. 공부에 대한 부담보다는 앞으로 성과를 기대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둘이 손잡았다. 샘나서 질색하는 문승협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문승협은 둘을 남겨두고 열람실로 올라갔다.
점심시간 무렵, 김부일과 채영이가 집에서 공부하겠다며 시립도서관을 나갔다. 문승협은 매점에서 파는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바람 쐬러 야외열람실 쪽으로 가다 국민학교동창인 청화고 천영기를 만났다. 함께 있던 청화중동창인 홍인고 이담을 소개받았다. 셋은 각자 학교분위기를 이야기하며 졸음을 날렸다. 조금 지나 명성윤이 조운대와 왔다. 같은 중학교동창인 천영기와 이담을 반가워하였다. 잠시 뒤 생소한 아이까지 합류하자, 문승협이 어색해서 열람실로 들어가려 하였다. 처음 본 아이가 말을 걸었다.
“나 니 알아야, 니가 문승협이지.”
“아, 느그들 서로 모르냐? 내가 소개하께, 느그들은 청화중출신인께 다 알 거고. 여그는 문승협이라고, 우리 반 부반장이어, 다 같이 친구로 지내자잉.”
“잉, 나는 문일고 장기원이어.”
“그러고 보니 방과 후 수업 때 1반에서 본 거 같다.”
“니 제원여고서 별명이 헤실이라드라.”
“뭐?”
“울누나가 제원여고3학년인디, 니를 묻드라고.”
“아야, 헤실이가 뭐데?”
“헤실헤실 잘 웃는다고 지은 별명이란디, 제원여고가시나들이 귀여워서 디진단다야.”
“허허허, 가시나같이 헤실이가 뭐여, 차라리 그냥 서울놈이라고 해라.”
“야 명성윤.”
“니가 헤실헤실 웃은께 헤실이라고 하제, 서울놈은 인자 별명으로 식상해 부러.”
“천영기, 조용히 해라 진짜.”
“그라믄, 시방부터 승협이 별명은 헤실이어?”
“야 조운대, 너까지 그럴래?”
“제원여고가시나들이 지어준 별명인께, 제원여고에서 헤실이 하믄 문승협이어.”
“하하하, 허허허.”
문승협은 별명으로 안착되기 전에 막으려 했지만 다섯 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점점 별명이 헤실이로 굳혀졌다. 별명이면에 나쁜 의미로 숨어있는 지배와 무시가 아닌, 또래끼리 소속과 친근감으로 생각해 참아 넘겼다.
별명을 가십거리로 한바탕 웃었으나, 공부실력만큼 꿈과 진로에 나름 확고한 아이들이었다. 명성윤은 경찰대학, 조운대는 해군사관학교, 장기원은 육군사관학교, 천영기와 이담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 목표였다. 문승협은 아직 장래희망조차 찾지 못하였다. 부러우면서 배울게 많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삼성마이마이가 출시되어 출퇴근길이나 등하굣길 버스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겼다.
록음악에 레게를 접목해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자메이카가수 밥말리가 미국플로리다마이애미에서 사망하였다. 1976년 정치적으로 보이는 암살기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암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교황요한바오로 2세가 바티칸성베드로광장에서 괴한총격으로 부상을 입어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정부의 에너지절약시책에 따라 중단됐던 TV아침방송이 재개하였다. KBS와 MBC 아침방송이 8년 만에 부활했다. MBC 첫 어린이프로그램‘호랑이선생님’에 이어 ‘뽀뽀뽀’와 드라마‘포옹’이 아침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김부일은 4월 월말고사를 잘 치러 방과 후 수업 열등반에서 벗어나 보통반이 되었다. 내친김에 우수반까지 올라가겠다고 의욕에 불탔다. 공부를 도와준 문승협에게 한턱내겠다며 일요일에 석빙고빵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복으로 신경 써서 입고 나오라며 당부하였다.
문승협은 약속시간에 늦는 걸 싫어해서 5분 전에 도착했다. 김부일이 10분쯤 지나 채영이와 들어왔다. 음료수를 주문한 뒤 출입구를 계속 바라보았다. 채영이가 성적이야기로 문승협에게 공치사하는 사이, 김부일이 두리번거리는 여학생에게 손들었다. 한눈에 봐도 예뻐 보이는 여학생이 채영이 옆에 앉았다. 김부일은 문승협 옆으로 옮겨 앉았다. 문승협은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었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여학생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문승협을 잘 아는 사람처럼 대했다.
“안녕하세요, 승협이 오빠.”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 중2예요, 제원여중 채정이입니다.”
“영이 동생이여, 너한테 소개시켜줄라고 델고 왔어.”
“으짜냐, 이쁘지, 내 동생 모르겄냐?”
“어디선가 봤을 것인디, 기억 안 나냐?”
“그 글쎄,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나네.”
“아따, 니는 그 머리로 공부는 어뜩케 했냐, 학생잡지에서 안 봤어?”
“아 맞다, 여학생. 그 여학생 잡지에서 봤다, 미안해요 몰라봐서.”
“호호, 아니 예요, 모를 수도 있죠 뭐.”
“와, 학생잡지표지모델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러고 보니 영이씨랑 닮았네.”
“그란디, 처제는 승협이를 안가?”
“당연히 알죠, 제원여중고에서 유명해요. 오빠, 등하굣길에 여학생들이 괴롭혀서 힘들죠?”
“잘 피해 다니기는 하는데, 가끔 길을 막아서는 애들이 있어서 좀 창피해.”
“호호, 나도 몇 번 봤어요, 고개 푹 숙이고 땅만 보고 가는 거.”
“승협이가 뭐 한디 유명하대?”
“눈웃음이 귀엽고 예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오빠한테 붙인 별명이 헤실이에요.”
“뭣아, 헤실이?”
“네, 웃는 모습이 귀엽고 예쁘다고 해서. 여학생들한테 엄청 인기 많아요.”
“내 내가 요?”
“그럼요. 오빠, 말 놓으라니까요.”
“처제, 진짜여?”
“부일이 오빠, 처제라고 좀 부르지 마란께, 울 언니 앞길 막힌다고 몇 번을 말해.”
“하하하, 정이가 사투리 쓰니까 되게 귀엽다.”
“승협아, 너는 시방 웃음이 나오냐, 친구가 처제를 처제라 못 부른디?”
“연설하네 진짜, 아무 데서나 처제라 부른께 그라제, 나도 창피해 죽겄그만.”
“으째 이녁까지 그란가, 서운하네잉.”
“서운할 것도 쌨다, 아따 제발 채신 좀 지키란께.”
“허허, 알았네 알았어. 그건 그렇고, 승협아, 으째 나랑 동서 할 생각은 있냐?”
“무 무슨 소리야, 동서라니?”
“어허이, 영이랑 정이랑 자매잖애, 너랑 나랑 동서가 될라믄 으째야겄어?”
“하하, 너랑 동서 되는 건 좋은데, 너를 형님으로 부르는 건 끔찍하다.”
“뭐여, 정이는 맘에 든디, 내가 벨로란 것이어?”
“야, 정이를 싫다 할 사람이 있겠냐, 정이 맘에 드느냐가 문제지.”
“처제, 아니 정이는 으짜냐?”
“부일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냐? 그리고, 당사자 앞에서 물어보면 어떡해?”
“쇠뿔도 단김에 빼랬는디 뭐 으짠대, 남녀가 서로 호감 있으믄 그만이제.”
“정이가 아직 중2고, 모델하랴 공부하랴 바쁜데, 남자친구 사귈 시간이 어디 있어?”
“아니요, 저는 괜찮은데요?”
“아마, 부모님이 알면 실망하시거나 반대하실걸?”
“아뇨, 울 엄마아빤 괜찮아요. 영이 언니도 사귀는 거 허락하셨는데요 뭘.”
“남자 사귀면 여러 가지로 방해될 텐데, 나중에 대학 가서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호호, 내가 괜찮다니까요?”
“그 그래?”
“승협오빠 말은 나를 엄청 생각해서 걱정해 주는데, 이상하게 차인 느낌이 드네요?”
“하하, 미안. 그런 건 아니고, 정이 하는 일에 훼방꾼이 될까 봐서.”
“오빠,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나랑 사귀자고 쫓아다니는 남학생들이 한 트럭도 넘어요. 그런데도 다 싫다 하고 여기 나온 거란 말이에요.”
“하하, 그렇구나. 아무튼 정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좀 더 생각해 보자.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다.”
“좋아요, 자존심 상하지만, 시간을 좀 줄게요.”
“그래, 고맙다 정이야.”
“호호, 만약에 오빠가 그냥 사귀자고 했다면, 내가 싫다고 했을지도 몰라요.”
“그럼 내가 잘한 거네? 그래, 일단 오빠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거, 날 거절하는 말은 아니죠?”
“내가 어떻게 정이를 거절할 수 있겠어, 나중에 오빠동생사이도 싫단 말만은 마라.”
“흠, 여자자존심 세워줄 줄도 알고. 오빠매너 맘에 들어요, 호호호.”
김부일은 석빙고빵집에서 나와 영화관으로 앞장섰다. ‘록키 2와 취권’ 두 편 동시상영표를 샀다. 채영이자매가 가운데에, 문승협과 김부일은 양쪽 끝자리에 앉았다. 문승협이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나가더니, 영화 보면서 먹을 과자와 음료수를 사 왔다. 채정이는 새우깡과 오란씨를, 채영이는 포테토칩과 환타를 받아 들었다.
문승협은 록키 2를 보면서 최선경과 ‘록키 1’을 보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취권상영을 준비하는 쉬는 시간에, 채정이가 톡 쏘는 맛에 환타보다 오란씨를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또 최선경이 생각나서 착잡했다. 채정이가 어둑한 조명인데도 문승협표정을 읽었다.
“오빠, 왜 그래요?”
“응? 아 아니야.”
“오빠는 무슨 음료 좋아해요?”
“나도 음료수는 오란씨만 마셔, 없어서 못 먹지.”
“와, 우리 공통점이다.”
영화가 끝나고, 김부일계획에 따라 경양식식당 ‘초원의 집’으로 갔다. 채정이가 돈가스를 서툴게 자르자, 문승협이 자기 돈가스를 먹기 좋게 잘라 건넸다.
“정이야, 이거 먹어.”
“어머, 고마워요 오빠.”
“어이 부일씨, 승협이한테 좀 배우쑈, 혼자만 겁나게 먹기 바쁘요잉.”
“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그 손 뒀다가 어따 쓸래. 식으믄 맛없어야, 언능 묵어, 맛나다.”
“으메, 저걸 남자친구라고 둔 내가 미쳤는갑다.”
“아따, 담부터 승협이 멩키로 해주께, 여그서 승협이 따라 하믄 모냥 빠지잖애.”
“다음 기회는 누가 준다디? 시방이 마지막 일수도 있다잉.”
“영이야, 내가 부일이 보다 멋진 남자 소개해 줄까?”
“승협아, 그럼 부탁하께. 더도 덜도 말고, 딱 너 같은 남자로다가 소개해주라.”
“뭣이어, 처제 소개시켜주러 왔다가 마누라까지 뺏기는 거여?”
“염병, 또 처제 찾고 마누라 찾아 쌌네 참말로.”
“부일 오빠, 승협이 오빠한테 매너 좀 배워라.”
“왐마, 승협이 너 땜시, 내가 저 자매들한테 완전 쫑크 먹어 불구마잉.”
“승협이 탓 말고, 입가나 좀 닦고 묵어라.”
채영이가 말로는 김부일을 타박하였으나 입가에 묻은 돈가스소스를 닦아주었다. 김부일은 태연하게 입을 내밀었다. 문승협과 채정이는 둘 모습을 보고 마주 보며 웃었다.
문승협과 김부일이 채영이자매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김부일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채영이 부모에게 허락받은 과정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 채정이와 사귀면 거쳐야 할 과정이니 참고하라고 하였다.
“남자답게 탁 무릎 꿇고야, 따님을 좋아한께 사귀게 해 주십쑈.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믄 돼야, 알겄냐?”
“그 말 한마디에 허락해 주고 밥도 차려줬다고?”
“잉, 그랬단께. 장인어른이 껄껄 웃으믄서, 아따 사내답다잉 그라드라. 그래갖고 집에 들어오라 하드만, 우리 장모님이 밥을 딱 차려줘부렀어.”
“하하, 영이 바래다주다, 부모님한테 들킨 것이 오히려 잘된 거네. 나는 떨려서 너처럼 못할 거 같다야.”
“그란께 내가 이렇게 갈차주냐, 내가 하란 대로만 하믄 된단 말이시, 알았제?”
문승협은 채정이를 소개한 김부일말이라 호응했지만, 당장 홍지아를 어찌 대할지 난감한 상황에서 채정이까지 고민해야 하였다. 아직 여자친구를 사귈 의향이 없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김부일에게 미안했다.
며칠뒤 5월 중간고사를 치렀다. 시험이 끝나면 또 시험이 기다리는 시험의 반복이었다. 고등학교생활자체가 시험이었다. 손에서 책 놓을 틈 없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특히 영어는 회화보다 문법과 독해를 중시하였다. 수업시간마다 단어시험을 치러서 버스를 타면 단어장을 펴놓고 외우기에 바빴다. 국영수와 암기과목으로 분류할 만큼, 거의 모든 과목이 이해와 지식이라기보다는 암기가 목적이랄 정도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학교에서 극장단체관람문화행사로 ‘007 문레이커’를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영화를 보면서도 마냥 즐거워하지 못했다. 서울대생 김태훈씨가 5.18 희생자위령제도중 도서관건물에서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고 투신자살하였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다시금 5.18 광주민주항쟁당시 참혹하던 상황을 회상케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