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26 사태 직후 일어난 ‘서울의 봄’은 1980년 전두환보안사령관의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로 엄혹한 날을 맞이하였다. 대학교정에 전투경찰상주는 물론 시위진압용 가스차인 페퍼포그와 철창을 두른 속칭 ‘닭장차’라는 경찰버스가 수시로 출몰했다. 사복경찰체포조인 백골단의 무자비한 폭력과 최루탄이 난무하였다. 그럼에도 전두환신군부정권을 향한 대학생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참상을 경험한 80년대 학번들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70년대 학번들에 비해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크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마다 지하이념서클이 생기고 ‘러시아 혁명사, 세계철학사,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의 책을 읽으면서 사상무장에 나섰다. ‘독재타도, 민주쟁취’에 머물던 시위구호는 ‘반미, 반파쇼, 자주통일’로 확대되어 갔다. 학원자율화조치요구에 맞춰 총학생회가 부활하려 꿈틀댔으며, 전국적인 운동권학생조직을 결성하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전두환군사정권은 이러한 학원가저항을 잠재우려 몰두한 끝에, 전국대학생 민속국학 큰 잔치라는 주제로 ‘국풍81’을 기획하였다. 대규모 축제를 통해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5·18 광주민주항쟁 1주기에 쏠릴 국민적 관심을 잠재우면서, 정권반대세력을 무력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는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던 박정희정권의 통치전략을 모방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국풍81은 한국신문협회주최와 KBS한국방송공사주관으로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렸다. 민족문화계승과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아래 서울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문화축제였다. ‘새 역사歷史를 창조創造하는 것은 청년靑年의 열熱과 의지意志와 힘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행사기간 동안 야간통행금지 일시 해제와 여의도일대를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하여 5일간 밤낮없이 진행되었다. 대학생들 잔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서울시내 초중고생들과 전국 각지 관공서 공무원들이 어마어마하게 동원되었다.
행사에는 전국 198개 대학 6천여 명의 학생과 전통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하여 660여 회 공연을 벌였다.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해 민속문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대회·축제·장터 등이 진행되고 운영했다. 충무김밥과 춘천막국수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야간에 있었던 가요제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바람 이려오’를 불러 금상을 받은 가수 ‘이용’이 일약 스타덤에 올라 조용필에 필적하는 인기를 얻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여 명이었고, 5일간 행사를 보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인원은 주최 측 추산으로 무려 1천만 명에 달하였다.
이 행사는 전두환정권의 관제축제로 기획·홍보·시행까지 국가적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정권에서 치른다는 것은 반체제와 저항을 관제로 덮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국민적 관심사를 돌리려는 신군부정권의 3S(스크린·섹스·스포츠) 정책일환으로 대표적 우민화사례로 꼽혔다. 행사의 주대상이 젊은 층이라는 점에서, 5.18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젊은이들의 동요와 저항을 막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대학생들이 많았고, 젊은이들의 동요와 저항이 크다는 것을 전두환정권도 이미 파악하였다. 이를 잠재우고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의 그림자를 숨기며 세뇌시키려는 목적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두환정권의 행사조직에 허문도라는 인물이 있었다. 서울대학교농과대학출신의 조선일보기자였고,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메이지유신 관련 논문도 썼다. 군출신인 허삼수, 허화평과 더불어 전두환의 최측근인 이른바 ‘쓰리 허’의 일원이었다. 히틀러의 요제프괴벨스와 같은 역할을 하던 허문도가 신군부정권의 선전도구 겸 놀이판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가에서는 마당극, 탈춤, 풍물 등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상승했으며, 1980년대 초반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적 풍토와 결합된 민족민중예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하였다. ‘시인 김지하, 작곡가 김민기, 소리꾼 임진택’등이 그들의 리더였다. 이들 모두를 국풍81에 참가시켜서 제도권 내로 포섭하려고 애썼다. 심지어 행사보이콧을 주도하던 전국연합탈춤반(연탈)의 주축 멤버들은 물론, 임진택까지 청와대로 직접 불러서 회유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김지하를 회유하려 술까지 사들고 원주까지 직접 찾아갔다는 풍문도 있었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국풍이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첫째는 ‘시경’에서 따왔다는 설이었다. 원래 국풍國風이란 유교경전‘사서삼경’중 시경의 제1편의 제목으로서, 시경에 수록된 ‘지역 사회의 풍속을 담은 노래 가사’들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던 말이었다. 낯선 동양학의 전문용어가 엉뚱하게 군사정권의 관제 문화정책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본래 정통성이 결여된 권력들은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권위와 전통적 이미지를 차용하길 좋아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둘째는 ‘신풍’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일본‘카미카제神風’ 정신을 본떠 국풍國風이라고 했다는 의미다.
셋째는 ‘국풍문화’라는 용어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일본사를 보면 국풍이라는 단어가 헤이안시대의 용어인 국풍문화로 등장한다. 행사기획자로 볼 수 있는 허문도가 일본특파원이었던 경력이 있으니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당나라의 ‘당풍’에서 벗어난 자국 고유의 문화를 국풍이라 불렀다.
허문도의 경력에서 짐작되듯 국풍81도 원작은 일본 것으로 추측하였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반 일본정부가 전공투 세대 및 2차 안보투쟁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 1970세계박람회를 개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일본만국박람회(오사카엑스포)로 돌렸었다.
아울러 전두환정권은 연관선상에 있는 88서울올림픽유치결과가 9월 발표예정이어서, 국풍81을 통해 적극 홍보활동을 펼쳤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덮기 위하여 국민들 시선을 88서울올림픽유치에 쏠리도록 안간힘 썼다. 방송사와 광고계 등을 통해서 1988년 하계올림픽 서울유치희망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더욱이 올림픽유치 상대도시가 일본나고야였기에,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일본을 이기자는 민족자존심까지 내세웠다.
행사직후 언론사보도에서 대규모 군중집회허용과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고유문화원형보존 노력부족과 농번기행사로 시기선택부적절, 규모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질서유지가 어려웠던 문제를 비판하였다. 국회에서는 대학생들의 저조한 참여를 지적했다. 민속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민속을 파괴할 수 있는 모조민속으로 비평받았다. 문공부장관이 국회문공위에 출석해 국풍81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계속되는 학원소요를 어찌할 거냐는 질문에 강경대처로 극복하겠다고 답변해 논란을 빚었다. 고려대학교부설민족문화연구소가 후원하여 욕을 많이 먹었다. 전두환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 당연하였던 대학가 분위기에서, 대학이름이 관제축제에 올라가는 것부터가 학생들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삼성이 세운 유력 방송사 동양방송과 대형 경제언론사 서울경제신문조차도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단칼에 날아갈 정도였기에, 고려대학교부설민족문화연구소 입장에서도 국풍81에 협조를 안 했다가는 존립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왜 이런 실정은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인지, 정말 국민들은 전두환정권의 생각처럼 어리석은 것인지.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각성해야 할터인데, 권력에 동화되어 앞장서서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문승협은 종례시간에 받은 중간고사성적표를 책가방가운데에 찔러 넣고, 발걸음도 가볍게 버스정류소로 향하였다. 서둘러 탄 버스에서 국풍81 젊은이의 가요제수상곡이 흘러나왔다. 옥슨 81‘날개’에 이어 사랑의 듀엣이 부른 ‘나 어릴 적에’라는 노래가 동심을 자극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 조금 전 들었던 노래를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가사를 몰라 중독성 있는 후렴구만 작은 소리로 반복하였다. 하교하는 제원여중고학생들 몇몇이 그룹 지어 내려왔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달라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달라고~.”
“오빠.”
“어맛, 깜짝이야.”
“호호호, 앞을 보고 걸어야지 땅만 보고 걸으면 어떡해요?”
“아, 정이구나. 하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안녕하세요 헤실이 오빠, 호호호.”
“누 누구?”
“내 친구들이에요.”
“안녕하세요.”
채정이와 제원여중2학년친구들이었다. 얼마 전부터 제원여중고선생들이 등하굣길에 도로좌측통행을 지도했었다. 때문에 문승협은 더 이상 여학생들과 부닥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깜빡 잊고 우측통행을 했다. 채정이가 멀리서 걸어오는 문승협을 발견하고 길을 막아선 것이다.
늦은 시간 하굣길이라 여학생들이 많지 않았으나, 문승협과 채정이를 중심으로 여중생 여러 명이 둘러쌌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떤 아이는 문승협의 가방과 등을 만졌다.
“아야 정이야, 너 헤실이 오빠랑 아는 사이여?”
“그럼, 우리 사귈지도 몰라, 호호호.”
“뭣이어? 나쁜 가시나, 이 중차대한 사실을 숨기냐?”
“아 아니야, 농담이야.”
사귈지도 모른다는 말에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채정이가 주위반응에 당황하여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오빠, 아까 무슨 노래 부른 거예요?”
“노래? 아 제목은 잘 모르는데, 이번 국풍81에서 나온 노래야.”
“아야 정이야, 저그 꼰대들 내려온다, 걸려서 혼나기 전에 언능 가자.”
“오빠,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 조심히 가.”
여중생들이 때마침 내려오는 선생들을 보고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였다. 우르르 몰려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었다. 문승협은 여중생들을 잠깐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사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가 농담이라 하였던 채정이 말이 생각났다. 왠지 서운했지만, 사실도 아닌 데다 학생들 사이에 금세 퍼질 소문이어서 이해되었다.
집에 들어가니 엄마 이항리가 부엌에 있었다. 중간고사에서 전교 3등을 하였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알렸다. 안방에 있는 아버지 문경준에게까지 들릴 만큼 큰소리로 말했으나, 이항리와 문경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동생 문현아가 방문을 살며시 열더니,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문승협은 심상치 않는 집안분위기를 느끼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문현아가 뒤따라 와서 낮은 목소리로 엄마아빠의 싸움소식을 전하였다. 무슨 일로 싸웠는지 대답은 회피하고, 놀라서 울다 방금 잠들었다며 막냇동생 문윤아이야기로 대신했다. 도시락을 꺼내놓으라는 이항리의 성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자기 방으로 갔다.
문승협이 빈도시락을 부엌에 갖다 놓으러 가자, 이항리가 휑하니 문현아방으로 가버렸다. 문승협은 지나쳐가는 엄마입가에 난 상처를 얼핏 보았다. 무슨 일인지 걱정스러웠지만, 늘 그래왔듯이 엄마가 곧 찾아와 하소연할 것이기에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며 방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부자리에 누우려고 불을 끄려는데, 성적표를 보여달라는 빌미로 엄마가 방문을 열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가방가운데에 찔러 넣어둔 성적표를 꺼내려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항리는 아들성적표엔 관심 없었고, 곧바로 남편과 싸운 일을 꺼냈다.
요즘 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수소문해 찾아갔더니, 회사 근처 식당에서 도박하더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문경준이 식당에 들어선 이항리를 보고 전혀 뜻밖이어서 놀랐다. 어떤 이유에서든 회사동료 중에 부인이 찾아온 것이 처음이라 창피했다. 그럼에도 좋은 말로 조금만 더 놀다 갈 테니 먼저 가라고 하였다. 이항리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도박 운운하며 잔소리했다. 문경준은 회사직원들에게 무안해서 바로 일어나 집으로 갔다.
집에 와서도 화를 참아가며, 직원들과 심심해서 친 적은 금액이 오간 화투놀이일 뿐 도박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이항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미주알고주알 꼬박꼬박 따지며 대들었다. 문경준이 분에 겨워 욕설과 함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이항리가 격분해 덤벼들며 과거이야기까지 들먹였다. 결국 부부싸움이 확장되어 몸싸움으로 뒤엉켰다.
자기 방에 있던 문현아와 문윤아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꼼짝하지 못했다.
이항리입장에서는 민감한 남편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였다. 퇴근하면 일찍 오라며 가정을 중시해 달라고 했다. 나름 조심스럽게 여러 번 당부하였고, 몇 번을 참다못해 찾아갔기에 남편태도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상 모든 싸움에 각자 명분이 있듯이 부부싸움에도 당연시하는 서로의 이유가 있었다. 공감할 수 없는 자기주장에 몰입할수록 다툼이 반복되고, 그 상처는 본인과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에게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다.
이항리는 문승협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항상 본인이 불리한 부분을 빼거나 유리하게 덧붙여 하소연하였다. 문승협은 한참 들으면서 무감각한 자신을 보았다. 엄마한탄을 대하는 태도가 습관이 돼버린 것처럼 너무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엄마가 눈치채고 서운해할까 봐 마지못해 대꾸했다.
“엄마는 거길 왜 찾아간 거야? 그냥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그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늦으니까 그랬지. 찾아갔더니만 글쎄, 회사직원들 앞에서 남편 망신 주러 왔냐며 버럭 화를 내더라, 참 어이없어갖고.”
“남자들은 부인이 회사에 찾아오는 거 싫어하잖아요, 더구나 좋은 일도 아니고.”
“그럼 맨날 도박해서 늦는데, 내버려 두란 말이야?”
“도박은 맞아요? 회사직원들이라며, 회사직원들하고 재미 삼아 화투 친 거 아냐?”
“그렇다고 몇 날 며칠을 그런데, 적당히 해야지.”
“엄마는 아빠성격 뻔히 알면서. 엄마가 찾아가면 아빠가 화낼 줄 몰랐어요?”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까지 날 무시하냐?”
“엄마, 그게 아니라.”
“시끄러. 내가 너를 낳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냐?”
문승협은 순간 아차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항리가 과거를 소환해 울음 섞인 넋두리를 쏟아냈다. 문승협을 임신해서부터 지금까지 겪은 갖은 수모의 시집살이와 남편과 싸운 일 등, 그동안 앵무새처럼 수없이 반복하였던 신세한탄을 또다시 늘어놓았다. 문승협은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또 들어야 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게 아니라, 엄마 말에 공감해 주거나 무덤덤하게라도 그냥 들어주었어야 했다며 반성하였다.
이항리가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승협이 이항리입주위에 난 멍자국에 손을 가져갔다. 입안에 상처가 있는지 살폈다. 이유야 어쨌든 엄마가 가엽고 애처로웠다.
“엄마, 입에 상처 난 건 괜찮아요?”
“응, 참 빨리도 물어본다.”
“미안해요, 위로가 못돼서.”
“아니야, 많이 늦었다, 어여 자라.”
문승협은 2시간가량 꼼짝 못 하고 엄마토로를 경청했다.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이 있을 때마다 괴로움을 품고 잠자리에 누웠다. 아빠가 미웠다가 엄마가 미웠다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