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
문승협이 아침에 책가방을 싸면서 성적표를 다시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 줄 요량이었다. 행방이 묘연한 성적표를 골똘히 추적한끝에, 어제 채정이를 만났을 때 여학생 중 누군가 가방을 만졌던 기억이 어렴풋 떠올랐다.
성적표를 분실한 지 일주일 지났다. 이젠 일상이 된 좌측통행으로 집 가는 길에 굳이 제원여중고생들을 피하지 않아도 되었다. 홍지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홍지아, 말도 없이 웬일이야?”
“일찍 일찍 다녀라.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 좀 하자.”
“무 무슨 일인데? 표정이 왜 그래?”
“네가 언제부터 내 표정을 살폈냐, 희한한 일이다.”
“지아야 왜 그래, 오늘따라 너 좀 이상해.”
“너 채정이 알지?”
“응, 채영이 동생이야, 너도 채영이 알잖아.”
“아 채영이 동생이여, 그래서 둘이 사귀게 된 거고?”
“뭐? 사귀긴 누가, 그렇게 아는 친한 동생이야.”
“친해? 얼마큼?”
“친하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부일이랑 영이랑 같이 만나서, 영화 보고 저녁 먹은 게 다야.”
“그래서 제원여중고에 너랑 사귄다고, 얼척없는 소문이 쫙 퍼졌으까?”
“소문?”
“그래, 차여선이랑 제갈민주랑 문승협팬들이, 채정이를 붙잡고 물어보고 난리 났어.”
“진짜? 채정이는 별일 없고?”
“으째, 걱정돼부요?”
“괜히 나 때문에 피해 입었을까 봐, 괜찮은 거지?”
“여선이랑 민주랑 나쁜 애들도 아니고, 그냥 물어보고 끝났어.”
“그 그렇지, 여선이랑 민주는 그런 애들이 아니지.”
“문제는 다른 애들이여, 날라리들 말이어.”
“왜?”
“왜는 왜여, 그 걸 빌미 삼아 시비 걸고, 떠벌리고 다니니까 그러지.”
“그럼 어떡하냐, 채정이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는데.”
“더 큰 문제는 뭔지 알아?”
“더 큰 문제?”
“애들이 너랑 사귀냐고 물었는데, 채정이가 시인도 부인도 안 했다는 거야.”
“왜?”
“내가 그걸 어떻게 알까요. 그런데, 한 가지 추측되는 건 있어.”
“뭔데?”
“너.”
“나?”
“응, 너, 네가 문제야.”
“내가?”
“너 채정이랑 관계 확실해? 뭔가 어정쩡하거나, 미련 같은 거 남기진 않았어?”
“…….”
“으째 대답이 바로 안 나오까, 뭔가 있그만?”
“실은 채정이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는데, 내가 일단 오빠동생으로 지내자고 했거든.”
“아야, 사귀는 거랑 오빠동생은 뭔 차이가 있고, 남녀사이에 무슨 일단 이단이 있다냐?”
“사귀는 건 부담스럽고, 아직 사귈 생각이 없어서.”
“이런 바보천치, 좋아하면 자기 유리한쪽으로 생각하는 게 여자야, 처신 똑바로 해.”
“처신? 아 알았어.”
문승협은 홍지아의 다그침에 찔린 점을 사실대로 말하였다. 홍지아는 채정이와 뭔가 있다는 사실에 화났다. 여자마음을 모르는 답답함에 야단쳤으나, 의외로 고분고분한 문승협모습이 귀여웠다.
“너 전교 3등 한 중간고사성적표는 잘 있냐?”
“잃어버렸어.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혹시, 모성애를 자극해서 여자마음을 흔드는, 뭐 그런 건 아니지?”
“내가 비록 애정에 굶주렸다만, 그럴 정도로 머리가 좋진 않거든요.”
“자, 여기 있다. 간수 잘해, 또 잃어버리지 말고.”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여학생들이 돌려보는 걸 내가 회수했어, 아마 제원여중고 전교생이 다 알 거다. 설마 전교 3등 한 거 자랑할라고, 억지로 흘린 것은 아니제?”
“야, 내가 분명히 책가방에 넣었는데 없어진 거라고,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아, 문승협 화내니까 무섭네. 호호, 농담이야 농담, 아무렴 인간 문승협이 그랬겠어?”
문승협은 그제야 채정이와 사귄다는 소문이 돈 원인을 짐작했다. 지난주 우연히 만났던 채정이가 문승협과 사귄다며 농담처럼 가볍게 한 말을 주위여학생들이 퍼트린 파급을 실감하였다. 소문 때문에 곤란에 처한 채정이가 걱정되었다. 성적표가 없어진 것도 그때 모여든 여학생 중 한 명의 소행으로 추측했다. 성적표유출로 다른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지 신경 쓰였다. 이 모든 일이 조심스럽지 못한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너 분명 채정이랑 사귀는 거 아니지?”
“응, 아직 여자친구 사귈 맘 없어.”
“알았어, 또 보자.”
둘은 걸으면서 이야기하다 홍지아집 앞까지 왔다. 조금 전까지도 화나있던 홍지아얼굴이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 대문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홍지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인 아기천사인형을 다정히 마주 보게 놓았다. 깍지 낀 손을 턱에 괴고 애정 가득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문승협은 집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무심코 하늘을 쳐다봤다. 국민학교 때 처신 똑바로 하라고 했던 최선경말이 떠올랐다. 더 이상 오해 여지없게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부가 컴퓨터 등 56개 업종에 외국인투자를 허용한 네거티브정책을 발표한데이어 대외시장개방을 서둘렀다.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저축예금금리를 단일금리인 14.4%로 대폭 인상했다.
신안해저유물발굴조사단이 세계최대 청자정병 등 보물 247점을 인양하였다.
중국정부가 마오쩌둥(모택동) 사상을 폐기하고, 덩샤오핑(등소평)식 실용주의 지도체제를 선언했다.
채정이와 사귄다는 소문은 홍지아와 제원여고의 문승협팬들에 의해 수습되어 점차 수그러들었지만, 이미 한번 퍼진 소문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있었다.
김부일이 공책 반만 한 크기의 책을 선물이라며 문승협에게 건넸다. 서울신문사가 창간한 주간지‘TV가이드’였다. 책 속에서 비밀을 찾으면 떡라면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책 속 비밀은 몇 장을 넘기자 금세 밝혀졌다. 채정이를 모델로 한 책가방광고였다. 채정이는 인지도가 높아져 모델활동이 늘어났고, 서울을 오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TV방송에도 나오면서 인기가 날로 높아갔다. 그만큼 문승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줄었다.
여름방학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대학가뉴스로 시끌벅적했다.
검찰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관련자 30여 명을 구속한 ‘학림사건’을 발표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신군부세력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려 학생운동조직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했다.
경찰이 지난해 12월 서울대교내에서 ‘반파쇼 학우투쟁’ 유인물을 뿌린 시위사건을 조사하였다. 서울대학생운동조직실체를 파악해 ‘무림霧林사건’이라고 이름 지었다. 안개무霧에 수풀림林은 조직사건을 뜻하는 경찰내부용어였다. 안갯속에 가려진 서울대학생운동조직이라는 뜻이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서울대학생운동조직전모를 파악하고, 뒷마무리 작업에 착수하여 9명 구속에 90여 명을 군대로 보냈다. 일거에 소탕했다는 자신감으로 더 이상 서울대 안에서 데모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데모가 계속 터져 나왔다. 무림이 빠진 그 공백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훨씬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학림學林’ 세력이 대신한 것이다.
작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정부와 정면충돌을 피하고 장기 저항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과 ‘선도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갈려 맞섰다. 후자는 전민학련을 결성하여 전민노련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준비론을 내세운 학생운동진영에 ‘무림’, 선도투쟁을 주장한 진영에 ‘학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민학련이라는 대학생단체가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학림다방’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명명하였다.
이미 6월부터 전민학련 관계자 400여 명과 전민노련 관련자 300여 명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구성혐의로 영장 없이 남영동대공분실로 연행하여 구금했다. 시민사회는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우려하였다.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결성한 혐의로 강제 연행하여 구속한 학림사건을 신군부세력 정권안정을 위한 날조된 공안사건이라고 비판했다.
학림사건으로 떠들썩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다이애나스펜서가 찰스황태자와 영국런던 성바오로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런던시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거리에 나와 축하하였다. 세기의 결혼식장면은 전 세계에 TV로 중계되었다.
문승협이 채정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새마을제과를 찾아갔다. 방학인데도 제과점 안에 학생들이 꽤 많았다. 채정이 입장을 고려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잔잔한 음악소리만 흐르던 장내에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녀학생들 눈길이 입구 쪽으로 모였다. 채정이가 문승협을 찾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문승협이 손을 들어 보이자, 채정이가 쏠린 시선을 피해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앉았다.
“언제 왔어요?”
“방금 전에, 물 좀 마시고 숨 좀 돌려.”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있었어요?”
“응, 너도 잘 있었어?”
“네, 잘은 있었는데, 너무 정신없었어요.”
“많이 바빴나 보구나?”
“네.”
“뭐 먹을래, 고로케도 있고, 맘모스빵도 있네?”
“맘모스빵은 맘모스제과가 맛있는데, 전에 가서 먹어보니 맛있더라고요. 오늘은 피곤해선지 단 게 땡기니까, 크림빵하고 단팥빵이나 모찌떡 먹을래요.”
문승협은 채정이가 먹고 싶은 걸 구체적으로 말해줘서 고마웠다. 종업원을 불러 밀크셰이크와 두 가지 빵과 모찌떡을 주문했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요?”
“아, 너희 집에 가까워서.”
“코롬방제과도 괜찮은데.”
“거긴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네가 불편할까 봐.”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요.”
“오빠, 방송 봤어요?”
“응, 봤어, 광고에 예쁘게 나오더라.”
“아뇨, 나 나온 거 말고 다이애나 결혼식이요.”
“아, 봤어.”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다이아나비가?”
“다이애나도 그렇지만, 영국왕가의 결혼식풍경이 화려하고 멋있더라고요.”
“에휴, 울 엄마가 앨리자베스여왕이 아니라 아쉽다.”
“호호, 난 허영심은 없는 편인데, 그건 좀 부럽더라.”
“꼭 신데렐라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여자라면 누구나 다 부러워하지 않을까?”
“나는 신데렐라는 싫고 평강공주가 좋아요, 바보온달을 내 신랑으로 멋지게 만드는.”
“나도 온달이 좋은데, 그렇게 되긴 틀렸어, 나는 때가 너무 많이 묻었거든.”
“호호, 그럼 내가 목욕시키면 되죠.”
“하하, 그런 때가 아니라, 내가 순수하지 못해서.”
“피, 괜한 자격지심이라니, 오빠가 어때서 그래요?”
“채정이 옆에는 온달처럼 원석 같은 남자가 잘 어울릴 거 같아, 진짜로.”
“여보쇼, 순진무구 헤실씨, 그리 말하면 나 삐쳐요.”
“앗, 죄송합니다 정이씨.”
“호호호. 참, 우리 집전화번호 몰라요? 직접 연락하지, 왜 부일이 오빠 통해서 연락했어요?”
“아는데, 부모님이 받으면, 너 입장곤란 할까 봐.”
“아직 사귄다고 말은 안 했지만, 오빠에 대해 이야기해서, 남자친구라고 해도 괜찮아요.”
“하하, 그랬구나. 어때, 활동하는데 많이 힘들지?”
“힘들어요. 차를 오래 타야 하고, 촬영도 힘들고, 여러 가지 모두 다요.”
“내가 위로가 돼주지 못해서, 좀 미안한데?”
“호호, 그 말이 위로예요. 오빠, 내 친구들 안 본 지 오래돼서 나오라고 했는데, 괜찮죠?”
“응? 응, 괜찮아, 언제 온대?”
“30분쯤 뒤에 오라고 했는데, 오빠가 싫다면, 친구들한테 다음에 보자고 할게요.”
“아 아냐, 네가 좋으면 난 괜찮아.”
잠시 후, 국민학교부터 친했다는 채정이의 친구 두 명이 들어왔다. 채정이가 자리를 옮겨 문승협 옆에 앉았다. 서로 호들갑스럽게 오랜만의 만남을 반기더니 조여주와 공현정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린 정이한테 야그 많이 들었는디요, 헤실이 오라버니, 호호호.”
“아야, 초면에 별명 부르믄 쓰냐? 안 그라요, 헤실이 오라버니, 호호호.”
“야, 너희들 장난 그만해. 그러라고 같이 만난 거 아니다, 그럴 거면 따로 보자.”
“음마, 너 시방 남자친구 편드는 거여? 아따, 정이 너 많이 변했다잉.”
“긍께 말이어, 친구 중에 남자친구가 처음이라, 신고식 한번 해볼라 했드만 틀렸다야.”
“하하하, 괜찮아요, 편한 대로 해요.”
“오빠, 애들 말 들어주면 안 돼요.”
“그라믄 뭐더러 우리 불렀냐? 남자친구 소개한다고 해서 왔드만, 맥아리 빠진다야.”
“야, 너희들이 같이 보고 싶다고 난리 쳤잖아, 이그 저 웬수들.”
“하하, 정이야 괜찮아. 여주씨 현정씨 하고픈대로 하세요, 진짜 괜찮아요.”
“어이 채정이, 들었냐?”
“정이랑 같은 학교 다녀요?”
“우리는 제원여중보다 훨씬 좋은 목화여중 다녀라우. 그라고, 동생들인께 말 내리쑈.”
“그런데, 어떻게 내 별명을.”
“오라버니는 목포여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라우, 아마 채정이 보다 유명할 것인디? 호호호.”
채정이가 만류하였지만, 문승협은 괜찮다며 가급적 편하게 해 줬다. 친구들은 채정이 눈치에 아랑곳없이 질문공세를 이어갔다. 문승협은 답변하느라 진땀을 흘리면서도 빵과 파르페를 추가주문할 정신은 있었다. 채정이 친구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은 한 시간가량 계속되었다. 채정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어나자고 하면서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채정이가 친구들과 헤어지자, 문승협은 채정이를 집에 바래다주며 함께 걸었다. 집 근처에 다다라 동네놀이터에 앉아 이야기하자고 했으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채정이가 잠시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처음 만난 게 언제죠?”
“5월 중순쯤이지.”
“그리고 우연히 학교 앞에서 만난 게 6월 초 중순, 또 한 달 반쯤 지나고 오늘 만난 거죠?”
“응, 맞아.”
“그 시간 동안에 오빠는 나한테 연락 한번 안 했어요, 이번에 연락한 것도 부일이 오빠를 통해 연락했고.”
“…….”
“6월 중순쯤 제원여고날라리언니들한테 불려 갔었어요. 갔더니, 오빠랑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고요. 다행히 홍지아언니랑 오빠동창언니들이 막아줘서 별 일은 없었는데, 난 시인도 부인도 안 했어요.”
“알아, 홍지아한테 들었어.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할 건 없어요, 내가 자초한 일인데요 뭐. 승협오빠, 우리 사귀는 거 말고 그냥 친한 오빠동생 사이로 지내요, 그게 좋겠어요.”
“…….”
“오빠도 이 말하려고 한 거죠?”
“미 미안해, 아직 여자친구 사귈 엄두가 않나.”
“왜 미안해요, 감정이 그런 걸. 나중에 대학 가서, 아니면 더 커서 만나요, 멋진 모습으로.”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앞으로도 지켜보면서 응원할게, 오빠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발 벗고 나설 테니까.”
“그 말 꼭 책임져요, 힘들면 언제든 연락할 테니까.”
“그래, 알았어, 이 약속은 내가 꼭 지킬게.”
문승협은 악수를 청하는 채정이 손을 두 손으로 포개 잡았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채정이를 지켜봤다.
채정이는 중간중간 소극적이면서 방어적인 문승협언행으로 어느 정도 예감했다.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부담스러운 자리임에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들과 시간을 잘 보내줘서 고마웠다. 메몰차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문승협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본인 또한 방송과 모델활동으로 만남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힘들 때 위로와 의지가 되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로 이상형이었다. 비록 이기적이나마 자신의 처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문승협이라고 생각하였다. 쿨한 척 돌아섰으면서도 미련이 남아 마음이 무거웠다.
문승협은 먼저 관계를 정리해 준 채정이에게 면목없었다. 상처 준다는 걱정에서 해방되었으나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자신을 헤아려주고 배려해 줘서 고마웠다. 큰 고민거리가 해결되어 홀가분하면서도, 채정이와 멀어짐을 아쉬워하는 스스로에게 이율배반을 느꼈다. 공허한 미소를 머금고 버스정류소로 향하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라디오 음악방송 DJ멘트가 흘러나왔다.
‘어제 영국왕실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비가 영국국민들의 열렬한 축복 속에서 결혼했습니다. 세계인들이 주목한 세기의 결혼식이었죠.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며 음악을 띄울게요, 폴앵카가 부릅니다 Diana’
문승협은 자신도 모르게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들었다. 문득 Diana가사를 해석하여 쓴 최선경의 시가 떠올랐다. 아직도 최선경과 추억이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나라에 있는 최선경도,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비도 영원히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