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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별 – 2권 1부 1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9)

by 태양을 품은 별

등교할 때만 해도 조용하던 학교가 조회시간부터 웅성거렸다. 문교부가 전국의 대학지하서클이 73개라 밝히며, 고등학교도 색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좌경이데올로기서클을 중점파악하고 비판교육을 실시토록 세부지침까지 하달했다. 각반담임선생들이 백지를 돌려 무기명조사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잔뜩 주눅 들었다.

국민윤리수업시간, 김생출선생이 굳은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긴장해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한숨지었다.

“문승협.”

“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제1장을 아나?”

“네.”

김생출선생은 문희경과 친구사이여서 수업시간에 걸핏하면 문승협을 호명해 질문하였다. 문승협입장에서는 매번 당혹스러웠다.

문승협이 국민학생이었을 당시, 고모친구들이 남자조카가 너무 예쁘게 생겼다며 귀여워했다. 고모들이 자랑삼아 친구들 모임에 가끔 데려갔다. 문승협은 국민학교6학년 즈음 작은 고모를 따라갔다가 김생출선생을 만난 기억이 있었다. 말이 친구지 김생출선생이 문희경보다 서너 살 위였다.

“한번 읊어 볼래?”

“자왈子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저요.”

“응, 반장 강원종이 해석해 봐.”

“공자께서 말씀하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래, 잘했다. 공자말씀대로 배우니 기쁘고, 벗이 있어 즐거우며, 남을 의식 하지 않는 것이 군자다”

“선상님, 국민윤리시간인디 으째 갑자기 논어랍니까?”

“왜 갑자기 논어를 꺼냈을까? 짐작 가는 사람?”

“…….”

“너희들 아침에 좌경 어쩌고 저쩌고 조사받았지?”

“네.”

“좌경이든 우경이든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즐거운 벗을 꼰 지르면 이 아니 슬플까, 남이 뭐라 하든 말든 너희 하고픈 대로 하는 게 군자다.”

“선상님, 선상님도 공안경찰에 잡혀갈 것 같은디요?”

“허허허, 그럼 너희들이 사식 좀 많이 넣어주라.”

“하하하, 간디! 간디! 간디!”

학생들은 김생출선생을 격의 없이 대하였다. 김생출선생도 웃음과 유머로 받아주었다. 반아이들이 김생출선생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수업시간임을 감안해 작게나마 별명을 외쳤다.

김생출선생은 서울대철학과출신으로 기간제계약직교사였다. 정규직정교사가 되려면 평판이 중요했음에도 부당한 일과 정부실정을 비판하는데 거침없었다. 학교재단과 동료교사들 사이에서 호불호로 갈렸으나, 학생들에게는 특유한 위트와 친화력으로 자유와 이상을 강조하여 인기 있었다. 마하트마간디를 닮고 말을 많이 해서 ‘말하지 마 간디’라는 별명이 붙었다. 보통 ‘간디’라고 불렸다.

“우리가 배우는 학문에 경계와 금기가 없어야 된다는 것이 내 평소 소신이다. 그래서 나는 잡혀가는 걸 피할 생각이 없고, 무섭지도 않다.”

“우우, 짝짝짝짝짝.”

“오늘 좌경이데올로기 비판교육을 하라는데, 이건 금기를 가르치라는 말이다.”

“…….”

“물론 비판도 교육이지만, 교육자로서 내 소신을 꺾을 순 없다.”

“…….”

“왜? 나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나 하고픈 대로 하는 군자니까.”

“하하하, 군자! 군자! 군자!”

“그래서, 좌경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교육대신에 토론을 할까 한다.”

“무슨 토론인디요, 주제가 뭔디라우?”

“꼭 토론이라기보다는 미래예측이랄까? 광복 후 40년쯤 지나가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참고해서, 다가올 40년 뒤 미래를 예측해 보는 거야, 2025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말이야.”

“우리가 점쟁이도 아니고 어떻게 안답니까?”

“점쟁이처럼 맞추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상상해 보자는 거야, 상상의 나래를 펴봐.”

“아따, 무자게 난해한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너희들이 노스트라다무스가 되는 거야.”

“노틀담의 꼽추는 안디, 노스트라다무스는 또 뭐다요?”

“허허, 프랑스 천문학자이자 의사이고, 르네상스시대에 최고 예언가다. 그리고, 방금 네가 말한 노틀담과 노스트라다무스는 같은 뜻이야, 둘 다 성모마리아를 이르는 말이지.”

“하하하, 와따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았다잉.”

“우리 나이가 그때 되믄 60살인께, 일단 환갑잔치는 해야제라우.”

“그때까지 살겄냐? 병들어서 폴쎄 디졌을 것이다.”

“아니어, 의학이 발달해서 백 살까지 살지도 몰라야, 인생 백세시대 말이여.”

“그러면, 먼저 가벼운 주제부터 해보자, 경제는 과연 어떻게 변할까?”

“우리나라 국민성이믄,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라와 선진국진입에 내 손목을 걸어분다.”

“언능 이리 내라잉, 시방 잘라 불자. 텍도 없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뭔 선진국, 뭔 5만 달라.”

“허허, 친구생각을 비난하면 쓰나. 그리고, 사소한 일에 손목 걸지 마라.”

“세계백대기업에 우리나라회사가 10개 정도는 너끈히 들어가겄제?”

“아야, 천대기업이 아니고?”

“취업은 잘 되까?”

“뭔 걱정이냐, 내가 책임지께 내 밑으로 와.”

“염병하네, 내가 죽으믄 죽었지 니 밑으로는 안 간다.”

“하하하.”

“무슨 직업이 인기까?”

“뻔하제, 사짜 들어가는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그라고 장의사, 허허허.”

“웃지 말어, 진짜 장의사가 인기 있을 수도 있다잉.”

“그때 가믄 먹을 것이 풍족해갖고 요리사가 유명할지도 몰라야.”

“테레비에서 나온 거 본께, 다들 아파트에서 살 것이다, 닭장멩키로 말이어.”

“그때 되믄 들고 댕기는 테레비도 있을지 몰라.”

“그라믄, 손전화는 당연히 있겄네잉.”

“그 정도믄 우주도 맘대로 들락날락하겄다, 이별 저 별 왔다 갔다 하믄서 말이여.”

“기름 말고 전기로 가는 차, 하늘을 날으는 차나 1인용 비행기도 있으까?”

“걱정 붙들어 매라, 내가 만들어 주께, 하하하.”

“나는 그런 거 필요 없고, 일주일에 두 번 쉬고 월급만 따박따박 나오믄 소원이 없겄다.”

“하하, 그래. 경제는 그렇고, 우리 사회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손자손녀랑 후손들이 많겄지라.”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가 폭발해서 전쟁 날지도 모르겄다야.”

“아니어, 인자는 둘도 아니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주의여.”

“맞어,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잖애.”

“그라다가 나중에 가시나들이 엄청 힘 쎄져서, 머시마들이 아그보고 살림도 하겄어.”

“아야, 그라믄 나는 집에서 아그보고 살림이나 할란다.”

“뭔 소리여, 같이 맛 벌이라도 해야제, 니 그랄라믄 이참에 아주 꼬추 띠어부러라.”

“어허, 내 것은 소중한 것이어, 다 또 따로 쓸데가 있단 말이시.”

“그 째깐한 것을 어따 쓴다냐?”

“하하하, 결혼도 어렵겄지만 이혼이나 당하지 말어라잉, 딱 이혼당하기 좋겄다.”

“하하하, 허허허.”

“자, 사회는 거기까지 하고. 그럼, 우리의 문화는 어떨 거 같나?”

“우리나라 가수도 빌보드에 올라가겄제?”

“빌보드가 뭔 디야?”

“노래랑 앨범을 순위로 매기는 미국음악잡진디, 거그 올라가믄 세계에서 인정받는 거여.”

“일본가수도 올라갔었는디, 우리나라는 당연하겄제.”

“영화도 아카데미랑 올라가겄제?”

“잉, 올라가야제. 김구선생님 소원이 우리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인디, 우리 후손들이 그 소원을 들어줘야제, 안 그냐?”

“그라제, 당연지사제.”

“나는 영어 안 배워도 되게, 들고 댕기는 만국통역기나 나왔으믄 소원이 없겄다.”

“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인디.”

반아이들이 과거현재미래를 왔다 갔다 하며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점점 몰입하며 다들 재미있어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외교는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 볼까?”

“통일이 되까요?”

“소련하고 중국이 북한 뒤에 저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디, 통일이 되겄냐?”

“참 풀기 어려운 숙제이긴 한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통일은 해야제.”

“시방 정부가 하는 거 봐서는 텍도 없어, 몽양 여운형선생 같은 사람이 있으믄 모르까.”

“그래도 언젠가는 그런 지도자가 나오겄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있은께.”

“어쩌믄, 우리 후손들은 통일에 관심 없을지도 몰라야, 즈그 먹고살기 바쁘믄 할 수 없잖애.”

“허허허, 역시 외교는 다루기 너무 딱딱하지? 그럼, 정치는 어떨까?”

“아따 정치 야그하믄 더 까깝스럽지라우, 니 편 내 편 갈라서 먹고사는 게 정치인인디.”

“시방 정치를 보믄 희망이 없어 부러, 사리사욕에 부정부패는 말도 아니어.”

“그란께, 과거를 반면교사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힘써야 한디 말이여.”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해서, 즈그들끼리 싸우다 판 날것이다, 썩을 놈들.”

“그래도 누군가는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가 보통나라고 보통국민이냐?”

“그라믄 뭐 한데, 독재자가 저렇게 서슬 퍼런디.”

“2025년이믄 전두환이가 몇 살이냐? 그때 되믄 죽었으까?”

“아야, 니 삼청교육대 갈라고 환장했냐?”

“염병, 신고해라, 그런 말도 못 하는 게 나라냐?”

“5.18만 생각하믄 피가 꺼꾸로 솟는다, 도대체 몇 명을 죽인 거여, 씨발.”

“긍께, 적에게 향해야 할 총구를 지 국민에게 겨누믄, 그게 인간이어?”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김생출선생은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계를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 수업시간이 끝나간다, 이쯤에서 정리하자.”

“…….”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오늘 수업은 옳고 그름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 생각을 말하고 듣는 것이었다. 적어도 너희들은 이런 정도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받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려 김생출선생이 교실을 나갔지만, 묘하게 반아이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음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몇몇 화장실을 다녀오는 학생들 빼고는 한참 시끄러워야 할 쉬는 시간임에도 조용하였다. 다음 수업에 들어온 선생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물을 정도였다. 야자시간이 끝나고 종례가 끝나고서야 누그러졌다.

“부일아, 공연 티켓하고 팜플렛 더 필요하면 말해.”

“아참, 열 장 더주라. 공연준비는 잘 돼가냐?”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쩔지 모르겠다.”

“인자 공연이 얼마 안 남았다잉.”

“응, 생각만 해도 떨린다야.”

“염병 엄살은, 잘할 거믄서.”

문승협은 한눈팔 새 없이 공연연습에 몰두했다. 윙스멤버들과 합을 맞춰가며 보완하고 채워나갔다.


부산시경이 최기식신부 등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관련자 4명을 구속하였다. 치안본부가 가톨릭인사 4명을 범인은닉혐의로 연행했다고 밝힌 지 사흘만이었다. 경향신문사가 ‘레이디경향’을 창간하였다. 서울서대문구 현저동 지하철 3호선 공사현장붕괴사고로 사망 10명과 42명이 부상당했다. 신군부정권의 사정협의회가 ‘의식개혁 9대 실천요강’을 발표하였다. 부정의식추방 등 의식개혁운동을 본격 추진하라는 전두환대통령의 지시였다. 나흘 뒤 '의식개혁추진 세부화계획'을 발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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