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8)
괘종시계가 1시를 알렸다. 문승협은 외출준비를 하였다. 친구들과 약속이 우울한 기분을 보듬어주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얼마 전 SS패션매장에서 봄옷으로 장만한 위크엔드 파랑빨강체크무늬티셔츠와 베이지색면바지를 입었다. 페페로네가방에 깔 맞춘 파란색나이키클래식테니스화를 신었다.
집을 나서면서 정난희를 만난다는 생각에 약간 들떴다. 조금 전 집안불화를 금세 잊은 자신을 보았다. 이중인격자 같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해서 자괴감이 들었다.
석빙고제과점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일이라선지 학생들이 꽤 많았다. 천영기와 이담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테이블 두 개를 붙인 8인석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2시가 되어 천영기와 이담이 들어왔다. 류연경과 한현진이 뒤따랐다. 문승협 옆으로 천영기와 류연경이 앉았고, 맞은편에 이담과 한현진이 자리했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있었어요?”
“예, 승협씨도 잘 있었소? 지난번에 말 놓기로 했는디.”
“예끼시끼, 이렇게 숫기 없는 머시마를 어따 쓰까잉.”
“하하, 맞아 그랬었지.”
“승협씨, 오늘따라 더 멋져 보인디?”
“그란께, 오늘 승협이 때깔 죽인다?”
“내가 늘 그랬지, 오늘 만 그러냐?”
“아니어, 오늘은 뭔가 달라도 많이 달라.”
“알았다 알았어, 오늘은 내가 살게, 뭐 시킬까?”
“우린 방금 점심 먹었은께, 적당히 알아서 시켜.”
“넷이서 다 같이 먹었어?”
“잉, 우린 본래 약속대로 한시에 만났어. 니 땜시 우리끼리 점심 묵고 이리 온 거여.”
“그랬구나, 미안하다야. 난희가 두 시에 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니 그렇게 잡혀갖고 으짤라고 그라냐? 남자가 말이어, 한시에 나와, 딱 그래야제.”
“영기야, 그거 하나도 안 멋있다잉. 나나 된께 니 말대로 해준 것이어.”
“으짜든간에, 남자가 박력 있게 해야제, 질질 끌려 다녀갖고는 쯧쯧.”
문승협은 시간약속도 맘대로 못 정하냐는 천영기구박에 멋쩍었다. 정난희에게 전화할 당시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려다 참았다. 오늘 만남을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종업원을 불러 맘모스빵과 친구들이 원하는 사이다와 오란씨를 주문하였다. 약속시간 15분이 넘어가는데 정난희는 오지 않았다. 조바심에 시계를 자주 보았다. 커플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어? 문승협! 천영기!”
“어? 차여선, 현기정, 오랜만이다.”
“왔다메, 우리 유선국민학교 공주님들이 납셨네.”
“아야, 손님이랑 있는디, 우린 저짝으로 가자.”
“좋은 시간 보내라잉, 담에 또 보자.”
유선국민학교동창들이 문승협과 천영기를 반갑게 알은체했다. 현기정이 모르는 여학생들을 보더니 자리를 피하였다. 곧이어 제갈민주와 박진숙이 들어왔다. 네 명이 문승협 쪽을 보면서 웃었다.
5분쯤 지나, 차여선이 문승협에게 괜찮으면 잠깐 보자고 했다. 문승협이 네 명 자리로 옮겨갔다. 국민학교여자동창 네 명은 반가운 마음에 질문하기 바빴다.
“아야 헤실아, 저그 영기 옆에 앉은 가시나가 영기 여자친구대?”
“응.”
“저 가시나가 목원여상고적대 류연경이제?”
“응, 그렇다나 봐. 여선이 너도 국민학교 때 고적대장 했잖아.”
“언제 적 야그 하냐. 영기 앞에 앉은 머시마는 누구대?”
“이담이라고, 홍인고 다니는 친한 친구야.”
“아, 그 빼빼로삼총사?”
“오늘 느그 빼빼로삼총사 단체미팅한갑다잉, 헤실이 니는 아직 여자친구 없냐?”
“그 그렇지 뭐.”
“뭐여, 니 아직도 최선경이 못 잊었어?”
“에이 갑자기 뭔 소리야. 야 제갈민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하냐?”
“호호, 다 지나간 일인디, 민감한 니가 더 이상하다야.”
“홍지아도 그렇고, 채정이도 그렇고. 소문난 집에 먹잘 것 없다드만, 딱 그 꼴이네.”
“하하, 진숙이 너는 잘 지냈냐?”
“잉, 내동상들이 승협이 오빠 찾고 난리다, 으짜끄나?”
“선숙이랑 미숙이도 많이 컸겠다?”
“그람, 벌써 국민학교5학년하고 중학교2학년이다야, 가슴도 뽀송뽀송하게 나왔어.”
“야, 뭔 소리하는 거야. 그나저나, 세월 참 빠르다.”
“맞어, 선숙이랑 미숙이랑 무자게 이뻐졌어야, 으째 다리 놓으까?”
“연설하네 진짜, 못하는 말이 없다.”
“그라지잉, 아직 그 핏덩어리들보다는 이 풍만한 내가 훨씬 낫제?”
“여선아, 난 과거 있는 여자는 별로다.”
“염병하네, 이정주 말이냐? 언제 적 야그를, 니 그렇게 쪼잔했어?”
“하하, 농담이야.”
“근디, 니 못 본 사이에 엄청 커부렀다잉?”
“긍께, 여선이보다 한 뼘 정도 작았던 그 꼬맹이가, 인자는 한 뺌 이상 크니 말이어.”
“그래, 내가 좀 크긴 컸지.”
“니 등하굣길에 안 보이드라? 우리 피해 다니제?”
“심화반이다 야자다 해서, 하굣길은 상관없지만, 등굣길은 의도적으로 피한 게 맞아.”
“니 본다고 등굣길에 시간 맞추는 아그들도 있고, 하굣길에 헤실이 느그집 앞에 죽치는 아그들도 있다드라.”
“예전보다는 줄었는디, 시방도 있단다야. 승협이가 뭔 매력 있다고, 정신 빠진 년들이 많단께.”
“아야, 키 크제 잘 생겼제, 거그다가 웃으믄 녹아나제, 당장 배우 해도 쓰겄다.”
“하하하, 얘들아 그만해, 나 스타병들겠다.”
“니 문일고그룹사운드 윙스리드싱어람서?”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인자 소문 다 났네.”
“공연 언제 하냐, 우리 초대 안 해?”
“잠깐만.”
정난희가 약속시간을 40분 넘겨 제과점 안으로 들어섰다. 국민학교여자동창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문승협을 목격하였다. 순간 표정이 싸늘해졌다. 천영기가 정난희를 발견하고 자리로 이끌었다. 정난희는 무덤덤히 천영기와 일행의 질문에 답변했다. 문승협이 뒤늦게 정난희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동창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왔어?”
“…….”
“점심은 먹었어?”
“…….”
“잠시만, 이것만 갖다 주고 올게.”
정난희는 문승협질문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천영기와 일행은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문승협이 가방에서 공연 티켓과 팸플릿을 꺼내 여자동창들 테이블로 다시 갔다.
“아야, 저 아그는 우리 학교 무용부 정난희인디?”
“으응, 맞아.”
“뭔 일이어, 니 오늘 소개팅하냐?”
“아 아냐 그런 거.”
“쟤 싸가지없다든디?”
“…….”
“으째 갑자기 벙어리가 됐으까?”
“그것보다도, 이거 하나씩 받아, 이번 우리 공연 티켓하고 팜플렛이야.”
“왐마, 우리 초대하는 거여?”
“아따, 우리가 돈 주고 사서가야 더 의미 있제.”
“괜찮아, 공연장에 기부함 있으니까, 혹시 의향 있으면 성의껏 해.”
“그라까 그라믄, 사진 멋지게 잘 나왔다잉.”
목화여고에 다니는 현기정이 목화여중고 직속후배인 정난희를 알아보았다. 의심의 눈으로 좋지 않은 정난희평판을 꼬집었다. 문승협은 당황하여 공연초대로 화제를 돌렸다. 여자동창들이 티켓과 팸플릿을 펼쳐봤다.
문승협은 정난희이야기를 또 꺼낼까 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는 정난희 때문에 오래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 정난희를 살폈다. 누가 봐도 화난 표정이었다. 다들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불편한 기색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말을 붙였다.
“잘 지냈어?”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허허, 난희야, 내가 다 같이 만나자고 했어.”
정난희가 대답대신 차갑게 물었다. 불안불안 지켜보던 천영기가 거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문승협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아, 그때 통화할 때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끊겨서 미처 말 못 했어.”
“무슨 말?”
“여기 친구들과 같이 만난다고. 이해해 줄 수 있지?”
“아니, 나 갈게.”
“…….”
“아야 뭐 하냐, 언능 가봐라, 빨랑 가서 데꼬와.”
정난희가 불만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문승협에게 쏘아 부치고 갑자기 일어나 나갔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일제히 곤혹스러워하였다. 문승협은 정난희의 돌발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천영기말에 경황없이 뒤쫓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앞서가는 정난희를 불렀다. 정난희가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창피하게 왜 큰소리로 부르고 그래?”
“그럼 어떡해, 네가 이렇게 가버리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소문 다 나겠네.”
“소문?”
“그래 소문. 오빠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소문나면 난 끝장이란 말이야.”
“그래 맞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그래도, 이렇게 가버리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뭔데?”
“상황이 이리될 줄 꿈에도 몰랐어, 미안해, 사과할게.”
“알았어. 됐지? 그럼 나 갈게.”
“난희야, 나는 괜찮은데, 네가 이대로 가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오빠는 괜찮다고?”
“응, 나도 많이 당황했지만,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데 어쩌겠어.”
“자기 맘대로 약속 만들고, 사람 곤란하게 하고, 어휴 미치겠네 정말.”
“정말 미안해, 가능하면 잠시만 있다가 가, 부탁할게.”
“약속해, 다시는 이런 자리 안 만든다고.”
“알았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문승협은 정난희입장을 십분 이해하려 했다. 자존심은 생각지 않고 사정해서라도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문승협과 정난희가 제과점 안으로 다시 들어서자, 여자동창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천영기와 친구들이 안도하며 정난희를 맞았다. 정난희는 와중에도 숙덕숙덕하는 주위 학생들 시선을 의식하였다.
“난희야, 본래 한시에 보기로 했었는디, 뭔 일 있었냐?”
“아뇨, 별일 없었는데요?”
“그란디 뭐 하러 두 시에 만나자고 했냐?”
“그냥이요, 한시는 조금 그래서요.”
천영기는 2시를 훨씬 넘겨온 정난희가 화내는 이유를 촉박한 약속시간 때문이라 생각했다. 정난희마음을 풀어줄 요량으로 무슨 사정이었는지 물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허탈하였다. 문승협은 천영기의 질문의도를 알기에 얼굴이 빨개지고 뻘쭘했다. 친구들은 정난희 때문에 당초 약속을 1시에서 2시로 변경한 사실과 약속시간에 40분 늦었으면서도 오히려 쌀쌀맞게 행동한 정난희를 덮어줬다. 천영기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항간에 유행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느그들 요즘 유행하는 참새시리즈 아냐?”
“뭔디 뭔디, 뭐 새로운 거 있냐?”
“포수가 쏘려는 찰나에 참새가 오줌 싼께, 포수가 니는 팬티도 안 입고 다니냐고 했어, 참새가 뭐라 했겄냐?”
“어이 포수, 니는 오줌 쌀 때 팬티 입고 싸냐?”
“호호호, 그거는 다 알제.”
“포수가 총 쏘는 것을 보고도 참새가 그냥 맞았어, 으째 그랬으까?”
“포수가 한 눈을 감고 있어서 윙크하는 줄 알았어.”
“그라믄, 포수가 한 눈을 감는 이유는 뭣이까?”
“애꾸눈인께.”
“포수가 쏜 총알이 빗나갔는디, 전선에 앉은 참새 세 마리가 한 마리도 안 날아갔어.”
“한 마리는 골이 비고, 한 마리는 귀머거리고, 한 마리는 간뎅이가 부어서.”
“아따 제법이다잉. 이거 맞추믄 내가 쉐이크 쏘께, 참새가 가장 무서워하는 곳은?”
“여자 셋이 모인 곳.”
“허허허, 맞았어, 가시나들이 얼마나 조잘대믄 참새들도 무서워하까잉.”
“연설하네, 남자들이 더 떠들드만 그라네.”
“부부참새가 전선에 앉았다가, 암컷이 포수총에 눈을 맞았어, 수컷이 뭐라 했겄냐?”
“니 윙크 이쁘다잉.”
참새시리즈에는 피해의식과 동정이 스며있었다. 포수는 권력자이고, 참새는 힘없는 서민약자를 상징하였다. 피해자의 모습과 심정을 표현함으로써 가해자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았다. 포수에 대항하는 참새의 오기를 강조했다. 참새가 총을 보고도 안 무서워하다가 맞은 이유를 윙크로 착각하는 것은 기만적인 가해자들을 풍자하였다. 포수가 총을 겨눌 때 감은 눈을 애꾸눈이라는 것도 가해자에 대한 병적인 면을 지적했다. 병신육갑한다는 속담과 연결되었다. 총소리를 듣고 날아가지 않은 이유가 골이 비고 귀머거리이고 간덩이가 부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학대였다. 언론통제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자학이 담겨있었다. 나아가 윤리와 인간성의 파괴, 남녀관계비하로 파생되기도 하였다. 암컷눈에 총 맞는 것을 보고 수놈이 윙크 예쁘다는 말에서 부부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다들 돌아가면서 새로 나온 참새시리즈를 화제로 즐겁게 문답했다. 이담이 친구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킨 신조어를 재미 삼아 물었다. 문승협은 정난희가 좋아하는 유머코드라 적극 참여하였다.
“현모양처가 뭔지 아냐?”
“현저하게 히프모양이 양쪽으로 처진 사람.”
“하하하, 절세미녀는?”
“절간에 세 들어 사는 미친 여자.”
“남자들은 느자구 없이 꼭 알아도 그런 거만 안다잉. 개성미는 뭔지 모르제?”
“뭐데?”
“느그 남자들의 개 같은 성미, 호호호.
“종빙고는 아?”
“아야, 그거는 종강을 빙자한 고고파티잖애”
다들 아는 신조어를 앞다퉈 내놨다. 영세민(영리하고 세련된 민주시민), 지랄하다(지적이고 발랄하다), 선구자(선천성 구제불능성 자기 상실자), 노약자석(노련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앉는 자리), 형사(형편없는 사기꾼), 졸업(졸지에 실업자), 동문서답(동대문에 서 있으면 답십리가 훤히 보인다) 등등. 처음 만났을 때 불편했던 어색함이 어느새 사라졌다. 하나라도 더 맞추려고 집중하였다.
“귀빈이 뭔지 알어?”
“니잖애, 귀찮은 빈대, 큭큭큭.”
“뭣이라고? 그라믄 바보는?”
“바보는 뭐여?”
“힌트 주까? 니여 니.”
“모르겄다, 뭔디야?”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연경이 니는 나한테 바보여, 바보.”
“호호호, 연설하네.”
“오늘 오물은 승협이 너다잉?”
“오물이 뭔데?”
“오늘의 물주, 하하하.”
신조어특성은 귀빈(귀찮은 빈대), 바보(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처럼 반어법이 특징이었다.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는 젊은이들의 일면이 나타났다. 주로 사회언론이나 학교생활과 이성관계에 관한 말들이었다.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사상 등이 바뀌면 언어도 따라 바뀌듯이, 광복 후에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달라지면서 생겨난 말들 때문에 언어도 전통적인 힘을 잃었다. ‘어르신, 삼강오륜, 효자, 열녀, 예절, 도덕, 윤리, 정의, 진실, 양심’등의 말들이 탈색되어 갔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가 ‘오는 말이 거칠어야 가는 말이 부드럽다’로 바뀌어 경직된 사회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남녀 칠세 지남철, 장부일언 풍선껌’등은 유교적인 전통과 사회진실성이 희석되어 감을 표출했다. ‘핵가족’이라는 말은 전통적인 가족제도 붕괴를, ‘고속도로, 일일생활권’등은 지역차이를 좁고 가깝게 하였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언어는 사회의 산물이다. 인간언어에 의해 인간행동이 유도되기에, 건강한 전통적인 언어사용은 건강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말은 의식이 되며, 의식은 행동을 결정한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마음에 영향을 주는 주술이고, 인간의 사고형성과 감정을 유발하며, 의지행동을 인도하는 힘이 있다. 우리 자신과 세상을 논할 때 말의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언어적인 면에서 보면, ‘폭력, 비민주적, 부정적 요소’를 지닌 언어들을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제거해야 사회발전을 돕고 정화하는 길이며, 전통을 계승하는 방법임을 깨달아야 했다.
웃고 떠들기를 한참, 정난희도 어느새 동화되어 즐겼다. 문승협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홍지아로 인해 다시 긴장되었다. 홍지아가 빵 사러 들렀다가 문승협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어, 지아야.”
“승협아, 잠깐 볼 수 있을까?”
“어, 그래. 이야기하고 있어, 나 잠시 다녀올게.”
“…….”
문승협은 일어나면서 굳어지는 정난희표정을 보았다.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렇다고 찾아온 홍지아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으로 가자, 고모랑 같이 왔거든.”
“응, 그래.”
“우리 고모 알지?”
“그럼 알지. 안녕하세요.”
“그래 승협아, 너 몰라보겠다, 키가 엄청 크고 얼굴도 더 잘생겨졌네.”
“네, 키가 좀 많이 컸죠.”
“호호, 조금 정도가 아니네, 국민학교 때 서예학원에서 봤을 땐 요만한 꼬맹이였는데.”
“하하, 지금도 크고 있어요.”
“희숙이 언니는 잘 살지?”
“네, 큰고모는 서울에서 잘살아요.”
“고모, 나 승협이랑 말 좀 하자.”
“호호, 쏘리, 미남을 만나니 내가 정신이 없네.”
“고모, 우리 이야기에 귀 좀 막아주면 감사하겠어.”
“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대신 아무 말 안 할게.”
“누구야?”
“아, 친구들.”
“너랑 쟤들이 빼빼로삼총사지?”
“야, 그런 건 누가 만드는 거냐?”
“너희에게 관심 있는 애들이겠지, 세상이 그런 거잖아.”
“할 일도 많을 텐데, 관심 가져줘 고맙다고 해야겠네.”
“여자애들은 누구야, 미팅해?”
“아 아냐 그런 거.”
“그럼 뭐야, 3대 3인데?”
“친구들이 여자친구 만나는데, 같이 만나자고 해서 따라 나온 거야.”
“사기 치는 거 아니지?”
“사기 치는 거야, 그냥 좀 속아주라.”
“호호호, 근데 너 요즘 등하굣길에 안보이더라, 피해 다니는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무슨 일 있나 했다.”
“참, 잠깐만.”
“왜?”
“아, 나 곧 공연하거든, 티켓하고 팜플렛 주려고.”
“야야, 이미 샀어, 우리 고모랑 같이 갈 거야.”
“어떻게 알고?”
“내가 너에 대해 모르면 누가 알겠어, 넌 아직 내 손바닥 안이야.”
“하하, 고맙다, 여전해줘서.”
“야 홍지아, 빵 사러 왔어?”
“와, 칠공주들이 다 모였네?”
“승협아, 우리 먼저 간다, 공연 보러 꼭 가께.”
여자동창들이 제과점을 나가면서 홍지아와 문승협에게 손들어 인사하였다. 모르는 여학생들도 몇 명 끼어있었다. 일곱 명이 우르르 빠져나가니 제과점 안이 넓어 보였다.
“칠공주는 또 뭐야?”
“그런 게 있답니다, 승협씨는 신경 끄셔요.”
“어머님은 잘 계시지?”
“응, 너무나도 잘 있지. 참, 엄마도 공연 보러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야 창피하게, 그냥 너만 와.”
“얼굴 봤으니 이제 갈게, 공연 때 보자.”
“그래, 고모님 안녕히 가세요.”
“지아야, 미리 사인받아야 하는 거 아냐?”
“고모, 내가 나중에 백장 받아줄게, 오늘은 그만 가자.”
홍지아가 고모 등을 떠밀고 나갔다. 문승협은 자리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웃고 있어 안도했으나, 자꾸 정난희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게 되었다.
“우리 인기스타 문승협군은 뭣이 이리 바쁘까잉, 난희는 승협이 관리 잘해야쓰겄다?”
“호호, 내가 왜요? 담이 오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저 가시나가 동양어망 손녀 홍지아제? 승협이 느그 집 가다 보믄 보이는 그 큰집?”
“하하 영기야, 네 말대로 오늘은 내가 오물이니까 내가 낼게, 다른 데로 가자.”
“그라까, 오늘의 물주님 문승협씨, 허허허.”
이담과 천영기가 눈치 없이 정난희를 자극하였다. 홍지아를 거론하자 정난희눈빛이 달라졌다. 문승협이 상황을 넘기려 재빨리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계산하고 나오자, 정난희가 길 건너편에 있었다. 류연경과 한현진은 친구들과 10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분위기가 다시 서먹해 있었다.
“얘들아, 지금 저녁 먹기엔 시간이 빠른데? 어디 갈래?”
“승협아, 언능 건너가 봐라.”
“왜, 어디로 갈건 데?”
“니 나오기 전에 난희가 집에 간다드라, 오늘은 여그서 쫑내고 찢어지자.”
“또 왜 그러지?”
“긍께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소개했는갑다.”
“영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디로 갈건 지나 말해.”
“우리는 전자오락실 가서 두뇌계발 좀 하다가, 이따 시간 봐서 영화나 볼란다.”
“무슨 영화?”
“레이더스인가?”
“그 스티븐스필버그감독의 인디아나존스? 개봉했어?”
“잉, 엊그젠가 했어.”
“가능하면 난희랑 같이 갈게, 안되면 나중에 연락하자.”
“잉 알았어, 언능 가봐, 난희 간다.”
정난희가 문승협 쪽을 힐긋 쳐다보더니 기다리다 지쳐 간다는 듯 발길을 옮겼다. 문승협은 류연경과 한현진에게 인사도 못하고 황급히 길을 건너 뛰어갔다.
“난희야, 집에 갈 거야?”
“응.”
“화났어?”
“…….”
“왜 그래, 무슨 일로 화난 건데?”
“화 안 났어, 그냥 기분이 그래.”
“그럼 기분 전환할 겸, 영화 보러 갈까?”
“싫어, 집에 갈 거야.”
“그래 그럼, 집까지 바래다줄게.”
“오빠, 진짜 눈치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영화 보자는 말이 나와?”
“내가 눈치는 빠르지 않지만, 말 못 할 건 또 뭐야?”
“뭐라고? 됐어, 관두자.”
“왜 그러는데, 말을 해줘야 알지.”
“나 참 어이없어서, 말을 해줘야 안다고? 진짜 몰라?”
“야, 문승협!”
“어, 작은 고모.”
문승협이 정난희 옆에 가면서 대화에 집중하느라 작은 고모를 못 봤다. 문희경이 여학생과 지나가는 조카를 보고 신대륙을 발견한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불렀다. 문승협이 당황과 쑥스런 표정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작은 고모에게 달려갔다.
“작은 고모, 어디 가요?”
“응, 어디 좀 간다. 아따, 내 조카 데이트하냐?”
“하하, 그런 거 아니야.”
“그라믄 누구대?”
“그냥 좀 아는 후배야.”
문승협이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문희경이 호기심에 정난희 쪽을 바라보았다. 정난희가 서있는 자리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언능 가봐라, 기다린다.”
“고모, 집에는 비밀로 해줄 거지?”
“호호, 니 하는 거 봐서.”
문희경은 문승협을 놀리면서도 귀여워했다. 문승협이 정난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문희경이 가던 길을 가다 다시 뒤돌아보았다. 정난희가 또 목례하였다.
“작은 고모야, 조금 말괄량이지.”
“집에서 알면 혼나지 않아?”
“작은 고모는 괜찮아.”
“집이 좀 개방적인가?”
“작은 고모는 그런 편인데, 엄마아빠는 잘 모르겠어.”
정난희가 앞장서 자기 집 쪽으로 향했다. 문승협은 소문에 민감한 정난희를 배려해 거리를 두고 걸었다. 정난희가 집 근처 골목에 다다라 속도를 늦춰 문승협을 옆으로 오도록 유도하였다.
“오빠, 내가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거 싫다고 했잖아.”
“응.”
“그런데 왜 그랬어?”
“저번에 통화할 때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끊겨서 말 못 했어.”
“아니 그 말이 아니고,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마라고.”
“알았어, 미안해.”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 가면 어쩌자는 거야?”
“아, 걔네 국민학교동창들이야.”
“그게 누구든 간에,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공연티켓 주려고 갔다 온 건데?”
“오빠가 거기 가있는 동안, 오빠친구들 사이에서 뻘쭘히 있는 나는 생각 안 해?”
“잠깐 다녀온 거잖아.”
“오빠는 잠깐이지만, 서먹하게 앉아있는 나한텐 엄청 긴 시간이라고.”
“그렇구나, 미안, 그건 미처 생각 못했어.”
“홍지아? 그 여자는 또 누구야, 어떻게 알아?”
“중학교 다닐 때 합창단하고 보이스카우트하면서 친해진 친구야.”
“친구?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진짜 그냥 친구야, 집안어른들도 알고.”
“어디 학교인데 합창단 하고 보이스카우트를 같이해?”
“같이하는 건 아니고, 인혜여중고와 덕일중고가 같은 덕일재단이라서, 서로 교류하거든.”
“그래도 그렇지, 여자친구를 앉혀놓고 가서, 한참을 희희낙락하는 게 말이 돼?”
“친구가 잠시 보자는데, 안 된다고 할 순 없잖아.”
“그럼 나는 뭐야, 오빠 때문에 억지로 거기 앉아있는 나는 뭐냐고?”
“오랜만에 만나서 그랬어, 미안해.”
“나 이런 대접 처음이야, 실망했어.”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이젠 그런 일 없도록 할게.”
“이래서 내가 남자친구 안 사귄다고, 정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무슨 뜻이야?”
“그냥 알았다고, 정난희 생각, 마음, 기분을 알았다고.”
“뭐야, 나한테 화내는 거야?”
“아니, 묻는 말에 충실히 대답한 거야, 다른 뜻 없어.”
“허 참, 나 약 올리는 거지 지금?”
“하하, 그런 거 아니야, 기분 풀어.”
“지금 웃음이 나와?”
“자, 이거 공연 티켓하고 팜플렛이야.”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나 들어갈게.”
정난희가 공연 티켓과 팸플릿을 가로채듯 받아 들며 자기 말만 내뱉고 집으로 갔다.
문승협은 멍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말들이 지나갔다. 같은 일로 몇 번씩 미안하단 사과에 변명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이 생소하였다. 예의와 매너가 없고 실망했다는 말도 정난희에게 처음 들었다. 정난희식 타박과 노골적 짜증까지, 생각지 못한 상황들에 허망함이 불쑥 밀려왔다. 친구들과 함께 만나기 싫어하고 소문을 두려워하며, 궁지에 몰아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정난희가 어떤 아이인지 의문이었다. 공연 티켓과 팸플릿을 줬는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난희에 대한 모든 것이 헷갈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득 정난희행동에 황당해하던 친구들 표정과 본인 스스로를 여자친구라면서도 남자친구를 안 사귄다는 정난희말이 떠올랐다. 끌려 다님과 끌림 사이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정난희 앞에서 자신이 자꾸 작아짐을 느꼈다. 지난겨울방학 때 에세이에서 읽은 ‘진정한 자아를 내려놓으면서까지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집에 다다르자, 작은 고모에게 들킨 것이 께름칙했다. 아침나절 집안소란에도 늦잠 잤던 작은 고모와 하필 맞닥트리다니, 혹시나 아버지가 알게 되면 큰일이라는 걱정이 엄습하였다. 잠깐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소리가 나고, 문윤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야?”
“응.”
대문이 철컥하며 열렸다. 문승협은 정원을 지나가며 비밀로 부탁했으니 작은 고모를 한번 믿어보기로 하였다. 현관에 아버지신발이 있어 조용히 들어갔다. 거실에서 TV 보던 동생들이 뭔가 안다는 표정으로 생글거렸다. 들켰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동생들이 손가락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거의 동시에 안방에서 아버지가 불렀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뭐라고 둘러댈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작은 고모에게 집에 비밀로 해달라는 약속은 여지없이 깨졌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이 진리임을 또 한 번 체험했다.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엄마가 사실대로 말하라며 아버지 몰래 신호를 보냈다.
“다녀왔습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친구들 좀 만나고 왔어요.”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학생 만나고 다니냐?”
“아, 그냥 좀 아는 후배예요.”
“만나지 얼마나 됐는데?”
“얼마 안 됐어요.”
“집에 한번 데려와, 어떤 애인지 한번 보게.”
“네, 물어볼게요.”
“그래, 가서 공부해.”
문승협은 얼른 안방을 빠져나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연애질이냐며 호통칠 줄 알았는데, 집에 초대하라는 의외의 아버지반응에 깜짝 놀랐다. 한편으로는 아침에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대던 행동은 온 데 간 데 없이, 언제 싸웠냐는 듯 오붓하게 앉아 있는 부모모습에서 뭔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문윤아와 문현아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문승협에게 따라붙었다.
“오빠, 아빠가 뭐래?”
“집에 한번 데려오래.”
“진짜? 믿기지 않는데?”
“와, 아빠가 엄청 뭐라 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언제 데려올 거야?”
“오라버니 옷 갈아입게, 동생님들은 얼른 나가주세요.”
문승협이 동생들 이마를 밀어 방에서 쫓아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해 보았다.
아침에는 부모싸움에 지옥 같은 전쟁터였다. 점심을 지나서는 정난희를 만나 혼돈의 카오스였다. 저녁에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새삼 인정하였다. 다정한 부모모습을 본 동생들이 평온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하루의 마지막은 평화로운 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