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6)
정부시책에 발맞춰 아마추어야구단 롯데자이언트가 프로야구단 롯데자이언츠로 전환했다. 문교부는 소풍과 수학여행을 자유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정부가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해 도심 76곳, 변두리 67곳을 1985년까지 재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개학을 하루 앞둔 삼일절, 문승협은 아침부터 거실과 자기 방을 오가며 아버지 문경준눈치를 살폈다. 오후 세시쯤 아버지의 외출하는 소리에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기다렸다. 삼일절아침에 하겠다는 정난희전화는 다섯 시 넘어서 왔다. 만나자는 약속을 예상하였으나 일상적 안부내용이었다. 3월 13일이 정난희생일이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기대와 다른 통화라 실망스러웠다. 3월 13일에 만나자는 뜻인지 어쩌자는 것인지 헷갈렸다. 좀처럼 정난희를 종잡을 수 없어 머리가 복잡했다. 책상에 앉아 한참 분석하였다. 생각할수록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정난희속마음보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2학년 신학기준비가 시급했다. 방학 내내 길었던 머리가 왠지 신경 쓰였다.
신학기등교첫날부터 교문 앞이 복잡하였다. 두발자유화 이후 첫 검열이라 단속하려는 선생과 저항하는 학생사이에 실랑이가 일었다. 장발인 학생들은 교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선생들이 휘두르는 가위에 학생들머리카락이 싹둑 재단되었다. 문승협은 스포츠머리가 자라 귀를 덮지 않은 정도여서 무사하였다. 강동우와 우상호는 양쪽귀가 훤히 보일 정도로 무참히 잘려나갔다.
재작년 남학생들 두발규제가 뒷머리 3Cm, 귀에서 2Cm, 앞머리 7Cm, 윗머리 4Cm 이내 스포츠머리로 완화됐었다. 더 이상 빡빡머리는 없었지만 두발자유화라고 해서 마음대로 기를 수 없었다. 곱슬머리여학생이 파마로 오인받아 혼나는 일도 있었다. 남녀학생 모두 파마와 염색 금지는 당연지사였다. 말로는 자유화였으나 자유를 구속하는 규제가 또 나왔다. 두발자유화라면서도 단속이 심하자, 심사가 뒤틀린 몇몇 학생은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에 왔다. 선생은 반항한다는 이유로 얼차려와 매를 들었다. 일부학생들이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권침해라며 항의했지만 준엄한 교권 앞에 무력화되었다. 학생들의 인권존중이나 자기 결정권보장은 ‘학생다움’이라는 말 앞에 추풍낙엽이었다. 선생들이 ‘학생은 단정하게’라는 말로써 한치 망설임 없이 가위질해 버렸다. 학생들도 ‘짧은 머리 학생은 단정하고, 긴 머리 학생은 불량하다’는 선생들의 그럴듯한 합리화에 반발하였다. ‘학생은 단정하게 라면 교사는? 일진이 머리를 짧게 하면 모범생이 되는가? 전교 1등이 머리를 기르면 불량학생이 되는가? 금발이거나 레게머리인 외국인학생은 양아치인가? 탈모로 대머리가 되면 그것도 두발상태가 불량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형용사‘단정하다’는 척도가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르다는 학생들 반론을 선생들은 묵묵부답으로 외면했다. 두발규제근거로 공부에 방해된다는 선생들 논리에도 ‘머리 감는 데 한 시간이 걸리던가? 파마나 염색을 매일같이 하던가?’라며 재차 반문하였다. 야간에 성인과 구분이 어려워 학생들 탈선이 우려된다는 치안문제에 대해서도, 극히 일부학생들에 국한된 문제라고 항변했다. 이 또한 선생들이 무시해 버렸다. 반인권적∙자기결정권침해∙자유억압이라는 학생들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결국 두발자유화는 ‘귀가 보이게’라는 타협점으로 규제되었다.
김부일과 장기원도 아슬아슬한 등굣길 두발단속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교실로 향하는 문승협을 쫓아갔다.
“아야 승협아, 너랑 나랑 4반 이어. 우리 4반에 1학년때 같은 반아그들이 10여 명 있다드라.”
“부일이 넌 이과로 간다고 했잖아, 근데 왜 4반이야?”
“아따 친구 따라 강남가야제.”
“염병 쌩까고 있네, 수학이 싫어갖고 문과로 갔으믄서.”
“기원아, 니 그러다 황천길로 가는 수가 있다잉.”
“오메 무서운 거, 어디 무서워서 농담하겄냐?”
“허허 맞어, 진짜 수Ⅱ가 겁나드라.”
“기원이 너도 4반이라며?”
“잉, 나도 4반 이어.”
문승협은 작년연말 담임선생과 문이과선택면담을 하였다. 당시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특별한 꿈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판사라고 답했다. 진로적성검사에서도 문화예술계통에 점수가 많이 나와 문과로 결정하였다.
한때 중학교진학을 앞두고 야구선수를 꿈꿨었다. 목포에 유일한 청화중학교야구부가 해체되어 포기했다. 그 후에는 중학교합창단경험과 가요제에 나온 이자연을 보면서 가수가 되고 싶었다. 이마저도 그룹사운드를 딴따라라 폄하하는 엄마와 주위시선에 체념한 상태였다.
김부일이 앞장서 교실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발단속과 교복을 변형한 멋내기를 화제로 소란스러웠다.
“아야 부일아, 니 바짓단 폭은 몇 인치로 줄인 거냐?”
“나는 6인치여, 김영후 니는?”
“난 7인치인디, 딱 좋아. 깡다구는 4인치여 갖고, 발목이 꽉 껴서 옷 벗을 때 힘들단다야.”
“야 강덕구, 니 4인치어?”
“잉, 메락없이 멋 부린다고 욕심냈는갑서.”
남학생들이 예전보다 자연스러워진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려고 교모 쓰기를 회피하면서 꾸미기에 관심이 많아졌다. 일부학생들이 멋을 부리려 교복을 고쳐 입었다. 수선에 한계가 있는 교복상의는 등허리 부분을 딱 맞게 하였다. 교복바지는 바짓단폭을 줄여 쫄쫄이나 당꼬바지스타일로 했다. 어떤 학생은 교복과 같은 검은색 추리닝원단으로 맞춰 입었다. 유행에 민감한 학생들이 즉각 따라 하였다. 교복자율화시행을 일 년 앞둔 시점이라 당연한 관심거리였다. 문승협은 무난한 선에서 따라갔다. 부쩍 큰 키에 고1 때 새로 맞춘 교복바지가 짧아졌다. 바짓단길이를 늘이면서 폭을 7인치로 줄였다. 중1 때부터 매년 10Cm 정도 성장하여 178Cm였으니 불가피했다.
반아이들이 바짓단을 살펴보며 왁자지껄하는 중에 교실뒷문이 꽝하고 열렸다. 순간 모든 시선이 뒷문으로 집중됐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모영욱이 들어왔다. 문승협의 덕일중학교 일 년 선배로 싸움짱이었다. 깡패조직에 들어갔다가 경찰서를 들락거려 퇴학당하였다. 일 년을 꿇어 문일고등학교로 전학 왔다.
문승협은 이진구와 시비가 있었던 중2 가을 즈음에 모영욱과 마주한 기억이 있었다. 조동구와 선배 남강과도 친분이 있으며, 싸움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모영욱은 한마디도 안 했으나 출현만으로 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모영욱을 처음 봐서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정체를 알아내느라 소곤거렸다. 모영욱이 맨 뒷자리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리고 강덕구와 김부일을 불렀다. 반아이들이 무슨 일인지 지켜보았다. 모영욱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씨발놈들아 뭔 일 났냐? 앞에 봐, 전부 대가리 처박고 엎드려, 고개 든 놈은 디진다잉.”
“…….”
겁먹은 반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책상에 엎드려 숨죽였다. 모영욱이 자신의 존재를 아는 강덕구와 김부일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였다. 첫 번째는 마주치면 인사하고 존대하는 선배로 대우하라 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말하기 전에는 절대 말 걸지 마라고 하였다. 열중쉬어자세로 듣던 강덕구가 단상으로 나가 반아이들에게 고개 들라고 했다. 일 년 꿇은 선배라며 모영욱이 말한 두 가지 명령을 전달하였다.
모영욱출현으로 발생된 소란은 국어를 가르치는 조현동담임선생이 교실로 오면서 일단락되었다. 모영욱을 새로 온 전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사이좋게 지내라며 유독 강조하였다. 잠시 뜸 들이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은께 잘 들어. 학부모님들이 위화감을 조성한다믄서, 심화반을 폐지하라고 요청했어. 그래서, 이번 학기부터 전부 야간자율학습으로 대체된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반아이들이 환호하며 들썩였다. 담임선생이 진정시키며 학급임원선출을 지시하였다.
반아이들이 문승협과 강원종을 추천했다. 문승협이 학교그룹사운드연습 때문에 반장직수행이 어렵다며 고사하였다. 강원종이 반장에 뽑혔다. 문승협은 부반장에 또 추천되어 장기원과 경쟁했다. 52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부반장에 선출됐다. 나머지 학급임원을 발탁한 뒤 쉬는 시간이 되었다.
모영욱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문승협을 불렀다. 문승협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아야 씨발놈, 이리 와봐.”
“네? 저요?”
“네? 저요? 크크크. 거그 니 말고 또 누가 있냐?”
“…….”
“선배를 보고도 쌩깐다잉, 니 나 몰라?”
“아, 죄송합니다.”
“크크, 씨발놈이 그때도 그라드만. 으째, 또 깜빡했냐?”
“…….”
“짱구 안 보고 잡냐? 내가 만나게 해 주까?”
“이진구요?”
“언제든 말해, 내 꼬봉인께 부르믄 재깍 온다.”
모영욱이 중학교시절 문승협과 이진구의 시비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승협은 2년도 더 지난 일을 기억하는 모영욱에게 놀랐다. 국민학교 때부터 앙숙처럼 대하는 이진구를 굳이 볼 이유는 없었다.
때마침 강덕구와 조동구가 들어왔다. 조동구가 예를 갖춰 모영욱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모영욱이 조동구에게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성님, 우리 학교로 왔소잉.”
“씨발, 으짜다본께 그렇게 됐다.”
“승협아, 니는 뭐 한디 그러고 있냐?”
“어, 도 동구야.”
조동구가 열중쉬어자세로 서있는 문승협에게 물었다. 강덕구가 놀리듯 쳐다봤다. 모영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성님, 둘도 없는 제 친한 친구여라우. 승협아 인사해, 우리 성님 잘 부탁한다잉.”
“문승협입니다.”
“아 맞어, 똥구 니랑 친구라 했제?”
“예 성님, 우리 승협이 쪼까 잘 도와주쑈.”
“아야 내가 뭔 힘이 있다고야. 우리 부반장님께서 나를 잘 봐줘야제, 크크크.”
조동구가 문승협어깨를 감싸 안더니 등뒤에 있는 강덕구 쪽으로 살짝 밀었다. 강덕구가 문승협을 끌어당기며 자리로 가라고 눈짓하였다. 조동구는 계속 모영욱과 이야기 나눴다. 김부일이 자리로 돌아가는 문승협을 바라보다 다시 모영욱 쪽을 쳐다봤다. 조동구와 모영욱이 함께 나갈 때까지 교실은 조용했다.
강덕구가 조금 전 문승협을 부르는 모영욱표정을 봤었다. 무슨 일이 있겠다 싶어 쏜살같이 조동구에게 가서 알렸다. 조동구가 이야기를 듣고 위층교실에서 부리나케 뛰어온 것이었다.
“허허허, 아야 문승협, 니 쫄았냐?”
“야 깡다구, 승협이한테 뭐라 하지 마야, 오줌 안 지렸을란가 모르겄다.”
“염병하네, 느그 둘 다 디진다잉.”
“하하하, 아따 승협이 열받은께, 욕도 잘하고 사투리도 구성지다잉.”
“허허, 천하의 문승협이 쫄다니, 쪼께 놀라운 일인디.”
“그만 까부러라잉, 오늘 느그들 초상 한번 치르까?”
“하하하, 왐마, 우리 승협이 지대로 승질나부렀네.”
김부일이 문승협을 놀리는 강덕구를 말리는 척 장난쳤다. 둘은 사투리로 성질내는 문승협을 재미있어하였다. 반아이들은 모영욱 등장만으로 공포분위기에 휩싸여 움츠러들었다. 나름의 자유로움 속에서도 어느 순간에 두려워하며 눈치 봤다. 교실이라는 한 공간에 있는 또래지만 정서가 많이 달랐다.
신학기가 시작된 지 10일이 지나고도, 반아이들이 모영욱을 피해 다녔다. 모영욱의 횡포가 눈에 띄진 않았으나, 횡행한 사건사고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문승협이 토요일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움직였다. 공연연습하러 음악학원으로 가는 길에 독일제과점을 들렀다. 제과점진열대에서 하트리본으로 예쁘게 치장된 사탕바구니를 골랐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엽서를 꺼냈다. 위쪽에 ‘To : 정난희’라 쓰고, 중간쯤에 ‘화이트데이와 생일을 축하해!’라고 메모했다. 아래쪽에 ‘From : 문승협’이라 쓸까 고민하다 말았다. 엽서를 봉투에 넣어 사탕바구니 앞쪽에 잘 꽂아놓았다.
미리 마련한 동전을 꺼내 들고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자꾸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화받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응대할지 연구한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다. 심호흡을 한 뒤 정난희집전화번호를 돌렸다. 신호가 가는 중에도 뭐라 말할지 생각하였다. 하지만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혹시 번호가 틀렸나 싶어 전화를 끊고 수첩을 꺼내 확인했다. 조금 전보다는 담대하게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신중히 다이얼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었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토해낸 동전을 꺼냈다.
시무룩이 음악학원으로 갔다. 윙스멤버들은 문승협의 심사와 상관없이 사탕바구니로 장난치기에 바빴다.
합주연습을 한지 두 시간여 지나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시계를 보니 5시가 되어갔다. 문승협은 다시 공중전화박스로 가 정난희집에 전화하였다. 마음에 준비할세 없이 신호가 간지 두 번 만에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정난희집이죠?”
“누구세요? 왜 여학생집에 전화하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저는 아는 선배 문승협이라고 합니다.”
“문승협? 무 무슨 일이에요?”
“난희랑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 잠깐 기다려봐요.”
문승협은 정난희엄마가 전화를 받아 심장이 쿵쾅댔다. 까칠하게 물어 당황했으나, 기다리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화기너머로 정난희엄마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숨죽여 귀 기울였다.
“난희야, 난희야!”
“네?”
“전화 왔다.”
“누구예요?”
“문승엽인가 승협인가, 네가 일전에 말한 그 태선화학 손자라는 그 아이냐?”
“아, 네.”
“간단하게 통화하고 얼른 끊어, 무용에 방해 안되게 그냥 친구처럼만 대하고, 알았어?”
“네, 알았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난희니?”
“웬일이야, 집에 전화를 다하고?”
“아, 저기 잠깐 볼 수 있을까?”
“어딘데?”
“내가 집 앞으로 갈게, 그 가로등 있는데.”
“날씨 추운데, 알았어.”
시큰둥하게 마지못해 나온다는 정난희였다. 문승협은 딱히 서운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늦을까 싶어 허겁지겁 음악학원으로 뛰어갔다. 윙스멤버들에게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였다. 서브보컬을 겸하는 키보드 이민상이 올 때까지 대신 노래할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설레는 심정에 거의 뛰다시피 하였다. 가면서 방금 전 통화상황을 생각했다. 정난희말대로 엄마가 무용 때문에 많이 단속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화받는 첫말이 무척 쌀쌀하였지만, 문승협이라고 하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뀌었었다. 왠지 인정받은 느낌이 들면서 이유가 궁금했다. 문득 정난희에게 태선화학 손자냐고 묻는 정난희엄마말이 떠올랐다. 뭔가 태선화학프리미엄이 붙었다는 느낌이었다. 태선화학손자가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어떤 통화였을지 궁금하였다. 왠지 야단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을 것만 같았다. 태선화학이 집안갈등으로 보면 벗어버리고 싶은 짐이면서도, 일상에서는 마치 신분을 확인시켜 주는 훈장 같아 씁쓸했다. 오늘만큼은 주홍글씨 같은 태선화학이 싫지 않았다.
정난희집 근처 가로등에 도착해 떨리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렸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나왔다가 추워서 다시 들어간 건 아닌지, 여기 말고 다른 가로등이 또 있는 건 아닌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잠시 후 누가 볼까 봐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정난희가 등장하였다. 회색추리닝바지에 갈색스웨터를 걸치고 팔짱을 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시려 보였다.
“안 추워?”
“날씨도 추운데 왜 나오라는 거야?”
“미안, 쉬는데 나오라고 해서. 많이 추워?”
“괜찮아, 견딜 만 해.”
“엄마한테 혼났니?”
“아니. 신기하게 안 혼내는 것도 처음이고, 남자전화를 바꿔준 것도 처음이야.”
“진짜?”
“응, 어쩐 일인지, 우리 엄마 엄청 부드럽더라.”
“휴우,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 이거, 별거 아닌데 받아줄래?”
“뭐야, 사탕바구니?”
“응, 화이트데이이기도 하고, 또 네 생일이라서.”
정난희가 한 손으로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썩 만족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뭘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다음엔 이런 거 사 오지 마.”
“여자친구한테 선물하는 게 처음이라서,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뭔 소리야, 여자친구라니, 내가? 나는 오빠한테 그런 말 한적 없는데?”
“하하, 그 그런 여자친구 말고, 그냥 여자사람친구.”
“오빠, 누구한테 나랑 사귄다고 말한 적 있어?”
“아 아니, 없는데.”
“어디 가서 절대 그런 말마, 영기오빠한테도, 알았어?”
“응, 그럴게.”
“만약에 오빠랑 사귄다고 소문나면 다 오빠 책임이야, 나 소문나는 거 싫어.”
“그래, 알았어.”
“근데, 생일은 생일이고 화이트데이는 화이트데이잖아, 달랑 이거 하나야?”
“하하, 그렇게 됐네.”
“이게 뭐야, 성의 없이.”
“미 미안, 미안해.”
“나 추워, 들어갈래. 그리고 함부로 집에 전화하지 마.”
정난희가 여자친구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단속했다. 생일선물이 따로 없음을 타박하였다. 문승협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마뜩잖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문승협은 집골목으로 들어가는 정난희뒷모습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작은 꽃다발에도 기뻐해줬던 서수연선생이 생각났다. 일기장과 12색 펜만으로도 감동해 준 국민학교 5∙6학년 최선경모습도 떠올랐다. 선물을 받고 엽서도 펴보지 않은 정난희에게 서운하였다. 한편으로는 정난희기대에 못 미쳤음을 자책했다. 받는 사람이 기뻐해야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라는 존재를 참 해석하기 어려웠다.
음악학원으로 가면서 사탕바구니가 성의 없다는 정난희말을 상기하였다. 심사숙고 없이 의무감에 선택한 결과로 반성했다. 고민하다 엽서에 이름을 안 쓴 것은 잘한 일 같았다. 행여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보게 되면 정난희가 혼나거나 곤란할까 봐서였다. ‘남녀인연이 종잡을 수 없으면 운명, 종잡을 수 있으면 우연’이라는 어떤 스님말씀이 기억났다. 종잡을 수 없는 정난희가 과연 운명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우연히 만나 스쳐 지가는 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난희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운명은 인지하지 못하고 우연은 인지한다는 뜻인지, 운명과 우연의 차이도 덩달아 헷갈렸다.
음악학원에 다다르자,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들려왔다. 이민상이 합주실에 들어서는 문승협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다음 연습곡 ‘Robert Palmer의 Bad Case Of Loving You’가 끝나갈 즈음 짜장면이 배달 왔다. 저녁을 먹으려고 공연연습을 중단하였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단무지와 서비스로 준 군만두를 꺼내놓았다. 다들 짜장면비비기에 바빴다.
“승협아, 어쩌다 마주친 그대 하고 나서, 연달아 Bad Case Of Loving You 부르믄 목 안 아프디?”
“목에 부담이 가긴 하는데, 괜찮아.”
“나는 아까 니 없을 때 불러본께 무자게 힘들드라.”
“그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부르고 나면 목에 힘들어가는데, 바로 이어 Bad Case Of Loving You 부르면,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나와서 차라리 더 나은 거 같아.”
“거봐라 민상아, 니가 그런께 리드싱어를 못하는 것이어, 승협이가 괜히 리드싱어냐?”
“연설하네, 누가 뭐라 하냐? 승협이 노래 부르기 힘들까 비, 노래순서 좀 바꾸까 하고 물어본 거여.”
“아야 시끄러, 침 튄다.”
“염병하네, 뭔 말을 못 하겄네 참말로.”
“민상, 짜장면 불기 전에 언능 쳐 묵어대쓰.”
“허허허, 우리 싱어 헤실이, 많이 묵고 힘내라잉.”
강동우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공연곡에서 빼자고 할까 봐 쫑크 줬으나, 이민상은 직접 불러보니 호흡과 목에 부담되어 선의로 한말이었다. 다른 윙스멤버들은 장난 삼아 이민상을 구박했다. 강동우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인기 있는 신곡이라서 선곡하였다지만, 이민상은 여전히 베이스기타가 돋보이는 연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불만을 한번 털어냈음에도 앙금이 남아 있었다.
멤버들이 허겁지겁 맛있게 짜장면을 먹는 반면, 이민상은 먹으면서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였다. 문승협이 단무지를 집어 이민상그릇에 올려주었다.
“야 민상아, 체하겠다, 단무지랑 같이 먹어.”
“잘 주고 왔냐?”
“뭘?”
“뭐는 뭐여, 정난희한테 갔다 왔잖애.”
“어떻게 알았어?”
“니가 사탕바구니 들고나갔는디, 빈손으로 왔잖애.”
윙스멤버들은 문승협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짐작하였다. 다들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결과를 물었다. 문승협은 그냥 아는 친한 동생이라고 했다. 사귄다는 말을 거론하지 말라는 정난희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다. 멤버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소하거나 피식거리면서도 모른 척해주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여자친구를 사귀면 자랑삼아 떠벌리는 게 남자심리인데, 숨기려는 문승협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들 정난희와 사귄다고 확신하는데도, 문승협만 아니라고 부인하는 격이었다.
문승협은 성장하면서 보아온 여자를 무시하는 관습이 싫었다. 특히 남자들 강압에 힘겨워하는 여자를 보면 가슴 아팠다. 아버지 문경준억압에 슬퍼하는 엄마 이항리모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여자입장에서 배려하려는 마음이 컸다. 나름 여자에 대한 매너가 몸에 밴 이유이기도 하였다.
다음날 정난희집에 무용친구들이 놀러 왔다. 한 친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정난희가 당황했다.
“이것이 뭐시어, 웬 사탕바구니대?”
“니 남자친구 있냐, 화이트데이라고 사탕 받았그만?”
“아 아니야, 남자친구는 무슨. 동생한테 받은 거야.”
“음마, 여그 엽서도 있는디?”
“아야, 뭐라고 써졌는가 언능 펴봐라잉.”
“에이, 별내용은 없다야.”
정난희는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사탕바구니를 꽁꽁 숨겨놨었다. 놀러 올 친구들에게 발각되면 곤란한 데다, 엄마한테 들키면 호되게 혼날 일이어서였다. 엽서에 이름이 쓰여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