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5)
워커주한미국대사가 ‘더 스테이트’지와 회견 중, 한국민주인사들에 대해 ‘버릇없는 애새끼들’이라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팀스피릿 82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면서, 미국정부가 일본에 1985년까지 경보기 12대 구입을 요구하였다. 한국에는 개량형 호크유도미사일 170기와 로켓 723기 판매를 발표했다. 소련정부가 SS-20 중거리핵미사일의 극동배치를 공식시인하여 동북아정세가 요동쳤다.
정난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문승협은 가슴 졸이며 아버지 문경준의 외출을 기다렸다. 아버지출타를 알리는 대문소리가 나자마자 거울 앞에 섰다. 평소와 달리 머리와 복장을 꽤 신경 썼다. 신학기부터 두발자유화가 시행된다는 소식에 두 달여간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웠다. 치장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별로 외모를 꾸미지 않고 다녔던 터라, 멋 내려는 자신이 생소하였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기본예의라며 합리화시키면서도, 쑥스럽고 어색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정난희와 만나는 과정이 엇나갔었기에, 어찌 보면 오늘이 제대로 된 첫 만남 이어서였다. 윙스합주연습을 빠지기로 하는 등 내외적으로 나름 준비했다.
잔뜩 긴장하여 독일제과점문을 열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부자연스러웠다. 시계를 보니 13:40분이었다. 자리에 앉아 무슨 대화를 할지 다시 한번 궁리하였다.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뛰었다. 1분 1초가 그렇게 긴 시간인 줄 처음 알았다. 드디어 14:00이 시계에 표시됐다. 긴장한 눈빛이 제과점출입문에 고정되었다. 5분쯤 지나고 기다리던 실루엣이 들어왔다. 재빨리 일어나 손을 들어 반겼다. 정난희가 밝은 웃음으로 가볍게 목례했다. 의자를 꺼내주고 맞은편에 앉으려는 문승협에게 대뜸 사과를 내밀었다.
“어, 웬 사과예요?”
“지난번에 사과주라고 했잖아요?”
“하하, 그걸 기억하셨구나. 그럼 잘 받을게요.”
“제 사과받아줘서 고마워요.”
정난희가 김이 서린 안경을 테이블에 놓고 콧등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내밀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문승협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승협은 순간 어리둥절하였다.
“호호, 어떻게 생겼나 본 거예요.”
“하하, 못생겼죠?”
“네, 안경을 안 쓰고 보면 난시 때문에 다 잘생겨 보이는데, 오빠는 못 생겨 보여요.”
“그래요? 왜 그렇지?”
“이그, 이렇게 안경을 쓰고 보니까, 실제모습이 더 잘생겼다고요.”
“하하하, 그럼 안경 꼭 써요.”
“오빠, 말 편하게 해요, 나도 편하게 하게.”
“네, 그래요 그럼.”
문승협이 정난희에게 조각케이크와 밀크셰이크를 좋아하는지 묻고 주문했다.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 줘서 고마워, 윙스멤버들이 엄청 부러워했어.”
“그럼, 화이트데이 때 기대해도 되나 모르겠네?”
“하하,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게 소신이니까, 받은 게 있으니 갚아야지.”
“치, 그런 의무감으로는 받기 싫은데.”
“기대는 하는데, 자발적으로 달라는 강요인 건가?”
“강요받는 사랑도 그리 나쁘진 않을 텐데, 왜, 싫어요?”
“강요받는 사랑이라, 그럼, 난희가 준 초콜릿에 담긴 의미를 진심으로 받아들여도 되려나?”
“오빠, 혹시 확인하는 그런 집착 같은 거 있나? 나는 그런 거 딱 질색인데.”
“전혀 없진 않아, 남자라면 다 그럴걸?”
“남자들은 참 이상해, 남자들은 다 그렇다면서, 꼭 일반화시켜 빠져나가더라.”
“일반화라기보다는 보편성을 말하는 거였는데,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주문한 조각케이크와 밀크셰이크가 나왔다. 문승협이 포크를 챙겨 정난희 앞에 냅킨을 깐 뒤 놔줬다.
“날씨 추운데, 밀크셰이크 먹어도 괜찮아? 따뜻한 우유 한잔 시킬까?”
“아니, 이거면 됐어. 오빠, 참 자상하다.”
“내 장점이라고나 할까, 하하.”
“오빠, 자뻑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모르는데.”
“자기 스스로에게 반해 푹 빠진 사람이야.”
“내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데, 설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호호, 알아서 생각하시길.”
“하하, 농담이야, 난 내가 자상한지 잘 몰라.”
“나한테만 자상한 걸까, 아니면 다른 여자한테도 그러는 걸까?”
“하하, 알아서 생각하시길.”
“뭐야, 나 따라 하는 거야?”
정난희가 케이크를 조금 찍어 먹고 밀크셰이크를 한 모금 마셨다. 오른손가락중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고 고개를 내밀더니, 눈을 크게 뜨며 문승협 얼굴을 또 살폈다. 문승협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같이 고개를 내밀었다. 둘이 동시에 한 마디씩 하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눈이 되게 예쁘다.”
“잘생겼다.”
“하하하, 호호호.”
“혼자 한 소리야.”
“나도 혼자 한 말임.”
“가까이서 보니까, 오빠눈이 엄청 초롱초롱하네?”
“그래? 내 눈이라서 그런지, 난 잘 모르겠어.”
“근데, 여자한테 잘생겼다고 하다니, 심한 거 아니야?”
“그런가? 난희는 가까이서 보면 잘생겼는데, 떨어져서 보면 예뻐.”
“피, 그게 무슨 말이야. 잘생겼단 말은 싫어, 하지 마.”
“하하, 알았어, 그럴게.”
“호호, 말도 잘 들어요, 맘에 들어.”
정난희는 좋고 싫음이 명확하였다. 문승협은 가급적 맞추려고 노력했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오빠 별명이 헤실이라더라?”
“그러게, 나도 몰랐는데, 그렇게 부른다더라고.”
“이유는 알아?”
“잘 웃는다고?”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 붙인 별명이라는데, 여자들한테 얼마나 웃어줬으면 그럴까?”
“여자들한테 웃어준 적 없는데?”
“이제부턴 그러지 마. 실없이 여자들에게 웃지 말고, 나한테만 웃어.”
“알았어.”
“만약 웃었다 하면, 나 화낼 거야, 알았어?”
“응, 알았어.”
“진짜지, 약속해?”
“알았어요 알았어.”
“화났어?”
“하하, 아니야, 화는 무슨.”
“내가 지켜볼 거다?”
“예, 약속합니다.”
둘은 짧은 시간임에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정난희는 전보다 부드러웠지만, 이런저런 단속으로 말속에 날카로움이 있었다. 문승협눈에는 그런 정난희가 귀엽게만 보였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가족관계로 넘어갔다.
정난희의 아버지는 목포세무서에 다니는 세무공무원이었다. 어머니는 무용하는 정난희를 뒷바라지하는데 전념하였다. 중학교입학하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오빠의 여동생들은 몇 학년이야?”
“이번에 중학교2학년하고 국민학교4학년에 올라가.”
“참, 태선화학하고는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라니?”
“오빠네 아빠하고 작은 고모도 태선화학에 근무하고, 오빠가 태선화학 손자라던데?”
“누가?”
“부현지가.”
“부용경 동생이?”
“응.”
“친손자는 아니고, 우리 할머니가 태선화학회장 여동생이야, 왜?”
“아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무용은 어때, 힘들지 않아?”
“무용하는 건 좋아하니까 괜찮아. 근데, 무용 때문에 엄마와 무용선생님한테 끊임없이 간섭받고 시간관리를 받아서 너무 힘들어. 혹시 우리가 사귀더라도 자주 만나기 어려울 거야, 방해도 많을 거고. 오빠는 그룹사운드를 어떻게 하게 된 거야?”
“중학교 때 합창단했던 계기로 오디션제안을 받았어. 메인보컬만 맡았었는데, 퍼스트기타리스트가 탈퇴하면서 지금은 세컨드기타도 연습하고 있어, 재능을 떠나 그냥 취미 수준이야.”
정난희주도로 가정조사와 주요 관심사에 이어, 감명 깊었던 책, 좋아하는 영화장르, 자주 듣는 음악 등을 묻고 답하였다. 시시껄렁한 또래들 이야기를 나누다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몇몇 테이블의 남녀학생들이 자꾸 힐끔거렸다. 문승협은 왜 쳐다보는지 의아하였으나, 정난희는 숙덕거리는 내용까지 짐작했다.
두 사람은 처음 본 학생들이지만, 남학생들은 정난희를 알고, 여학생들은 문승협을 알았다. 남녀학생들에게는 문승협과 정난희의 만남자체가 이야깃거리였다.
문승협은 주변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반면, 정난희는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재빨리 턱에 괴던 두 손을 내리고 몸을 뒤로 빼 떨어져 앉았다. 대화하면서도 학생들 시선을 의식했다. 일거수일투족 지켜보는 관심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포사회가 좁아서 소문이 금방 돌아 불편하다며 짜증스러워하였다. 갑자기 먼저 나갈 테니 조금 있다가 나오라고 했다.
문승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어나는 정난희를 지켜보았다. 의사를 묻지도 않은 돌발행동에 당황하였다. 남학생들 시선이 문밖으로 나가는 정난희를 따라갔다. 여학생들이 턱으로 정난희를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금세 남학생들 시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승협에게 되돌아왔다. 여학생들도 혼자 남은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문승협은 남녀학생들과 시선이 마주쳐 머쓱했다. 그보다는 조금 있다 나오라던 정난희말이 더 신경 쓰였다. 조금이라는 시간을 어림잡기 어려웠다. 5분쯤 뒤 일어나 프런트에 가서 계산하였다. 추운 바깥날씨에 떨고 있을 정난희를 고려한 시간이었다.
제과점을 나와 좌우를 살피며 정난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정난희집방향으로 가면서 계속 두리번거렸다. 100미터쯤 떨어진 연쇄점호빵기계 옆에서 정난희가 손을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추워 죽겠네.”
“미안. 조금 있다 나오래서 그랬는데, 많이 추웠겠다.”
“그래. 바로 계산하고 나오지, 뭘 그렇게 오래 있어?”
“따뜻한데 있다 나와서 더 춥지, 다시 어디 들어갈까?”
“아니, 집에 갈래.”
“그래 그럼. 집에 바래다줄까?”
정난희가 좋다 싫다 대답 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 두어 걸음 뒤 문승협에게 더 떨어져 오라고 하였다. 아직 날 밝은 시간이라 누가 볼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문승협은 머뭇대며 거리를 벌렸다. 둘은 멀찍이 걸으며 아무 말없었다. 며칠 전 바래다줬던 정난희집 근처 가로등에 가까워지자, 골목에서 남학생 세 명이 툭 튀어나왔다.
“어이, 우리 좀 보까?”
“오빠, 얼른 가, 삼일절아침에 전화할게.”
“쟤네 누구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빨리 가, 맨날 우리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애들이야.”
남학생들이 다가오는데, 큰길 쪽에서 어린 남학생이 누나라고 부르며 뛰어왔다. 껄렁한 남학생 세 명이 주춤주춤 멈춰 섰다. 정난희가 어린 남학생을 문승협에게 소개했다.
“내 동생이야.”
“아, 그렇구나.”
“누나 친구야, 인사해.”
“안녕하시오.”
“안녕, 난 문승협이야. 이름이 뭐예요?”
“정훈희요.”
“정훈, 만나서 반가워요.”
“아니요, 정훈희여라우.”
“아, 정훈희. 잘생겼네, 다음엔 형이라고 불러요.”
“누나 남자친구여?”
“아냐, 그냥 친구.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알지?”
“알어 알어, 엄마가 알믄 난리 나제.”
“동생 데리고 먼저 가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정난희가 남동생을 데리고 갔다. 남학생들이 문승협에게 다가가 시비조로 물었다.
“아야, 너 어디 학교 몇 학년이어?”
“문일고 2학년에 올라가요.”
“문일고 2학년? 그라믄, 김부일이라고 아요?”
“내 친군데, 왜요?”
“친구라고라우, 이름이 뭐시요?”
“문승협인데요, 그쪽은 어디 학교 몇 학이에요?”
“아, 그 문승협 선배시요. 저흰 이번에 홍인중 졸업하는 부일이 성 1년 후배여라우.”
“그런데 왜 날 보자고 한 거죠?”
“아 아니어라우, 저희가 실례했네요.”
“그럼 어서 가봐요.”
“저, 가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쭤도 되까요?”
“뭔데요?”
“정난희랑은 뭔 사이요?”
“알아서 뭐 하려고?”
“궁금해서라우, 성 깔치믄 인자 찝쩍 안 댈라고요.”
“깔치? 깔치가 뭔데?”
“애인이요. 여자친구.”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나랑 친한 동생이니까, 앞으로 정난희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문승협은 선뜻 여자친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난희에게 사귀자는 말을 듣지 못한 데다, 자신도 아직 교제까지 생각 못한 양심이었다. 무엇보다 소문을 걱정하는 정난희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까 봐 신경 쓰였다.
남학생 세 명은 언행에 비해 온순하였다. 미동 없이 지켜보는 문승협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야, 그냥 친한 동생이라잖애?”
“염병하네, 친한동생이믄 사귀는 것이제. 안 그라믄, 무담시 집까지 바래다준다냐?”
“하기사, 지난번도 그렇고잉. 말하는 거 본께 깔치 맞어, 그 남동생도 인사 하디야.”
남학생들이 길목을 돌아갔다. 문승협은 조금 전 정난희남매가 갔던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집에 들어갔으리라 짐작했던 정난희의 동생이 작은 골목입구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해맑은 미소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승협이 형, 누나가 친구라고 소개한 남자는 형이 처음이어라우.”
“야 뭔 소리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 말고 빨리 들어가.”
뒤쪽 담벼락에 숨어있던 정난희가 당황한 듯 동생입을 틀어막았다. 문승협에게 잘 가라는 손인사를 하고 골목안쪽으로 사라졌다. 문승협은 빙긋 웃으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정난희를 만나면서 알게 된 생소한 언어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무용, 정난희의 엄마, 무용선생, 뭇사람들의 시선’등의 표현이었다. 정난희의 말과 행동에서 이제껏 봐왔던 여자들과 많이 다른 독특함을 보았다. 흔히 들어왔던 ‘사귐, 남자친구, 여자친구, 이성교제’라는 말이 새롭게 느껴졌다. 둘의 관계를 정의할 한마디 없이 전화하겠다는 말만 남긴 정난희가 궁금하였다. 가슴속에서 몽실몽실한 뭉클함이 꿈틀댔다. 삼일절아침이 기다려졌다.
다음날 음악학원에 가면서도 그 기분은 계속되었다. 어제 정난희와 걷던 길을 지나갈 때는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어디선가 정난희가 나타날 것만 같아 자꾸 두리번거렸다. 음악학원에 다다라서야 자신의 의식을 자각하고 피식 웃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킨 마냥 쑥스러웠다. 합주실문을 열면서 먼저 와있는 이민상에게 활기차게 인사했다.
“즐거운 오후.”
“왔냐, 니 요즘 기분 좋아 보인다?”
“하하, 그래? 특별히 좋을 것도 안 좋을 것도 없는데?”
“그건 그렇고, 오늘은 꼭 공연곡 결정해야 한디, 생각 좀 해봤냐?”
“몇 곡 추려봤는데, 애들 오면 의논해서 결정하자.”
“강동우가 정규성한테 부탁해 갖고, 파트별로 몇 곡 따온다고 하드라.”
“아, 홍익대그룹사운드에서 드럼 치는 형?”
“잉, 이따 같이 올 거여.”
유행가요든 대학가요제곡이든 악보를 구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현실이었다. 악보가 없으면 ‘대중가요, 최신가요, 뉴히트송’ 같은 시중서점에서 판매되는 노래책을 참고하였다. 노래책에도 없는 팝송의 경우는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수없이 들으며 영어가사를 한글로 옮겨 악보를 만들었다. 계속 반복해서 듣고 직접 파트별로 악기를 쳐가면서 코드를 따다 보니 부지기수로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졌다. 그렇게 퍼스트기타와 베이스기타뿐 아니라 키보드와 드럼까지, 연습장에 오선지를 그려 쓰거나 음악노트에 수기로 악보를 만들었다.
고등학교동아리밴드임에도 학교지원이 없어서 앰프와 액세서리 등 장비 살 돈이 부족했다. 악보와 개인장비는 멤버들의 자비로 각자구입하였다. 이퀄라이저나 공동장비는 멤버들이 돈을 갹출해 리더가 대표로 서울종로낙원상가에 가서 사 왔다. 특히 퍼스트기타 장홍기가 기타 사운드에 욕심이 많았다. 페이저나 리버브와 유니바이브같이 꿀렁대는 톤으로 소리를 내는 기타 이펙터를 사고 싶었으나 엄두를 못 냈다. 그나마 싸이키델릭사운드를 내는 퍼즈박스와 와와페달 중에서 고심하다 와와페달을 구입했다.
윙스멤버들이 다 모이고, 리더 강동우가 공연곡결정을 주도하였다. 첫 공연이기에 대학가요제 그룹사운드곡에서 대중성이 있는 곡으로 하자고 했다. 멤버들의 동의로 대중가요 10곡과 팝송 2곡을 최종 선정하였다. 대중가요 10곡은 ‘구름과 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대로 그렇게, 바람과 구름, 연, 하늘색 꿈, 불놀이야, 젊은 미소, 날개’였다. 팝송 2곡은 ‘Robert Palmer의 Bad Case Of Loving You’와 ‘Leif Garrett의 I Was Made For Dancing’이었다. 이 중에서 공연은 가요 8곡과 팝송 2곡으로 하고, 나머지 2곡은 앙코르곡으로 준비했다. 바로 악보확인에 들어갔다. 합주연습 때마다 문승협이 악보를 구해와서 대부분 있었지만, 가요 2곡과 팝송 1곡의 악보가 없었다. 다행히 가요 2곡은 홍익대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치는 성정규가 카세트테이프와 가요책을 참고하여 파트별 악보를 따와서 해결하였다. 남은 팝송 1곡이 문제였다. 문승협이 곧바로 대학가요제에서 아차상을 받았던 이자연에게 전화하여 부탁했다. 윙스멤버가 된 뒤 자랑삼아 연락하였고, 이자연이 물심양면으로 격려하면서 악보구입에 어려움을 겪은 문승협을 많이 도와줬었다.
며칠 후, 문승협은 이자연에게서 악보를 받았다. 이자연은 Leif Garrett악보를 사방팔방으로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Smokie의 Living Next Door To Alice’를 추천하며 악보를 보냈다.
멤버들은 이자연에게 추천받은 팝송으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합주연습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공연준비에도 박차를 가했다. 다들 공연을 위한 장소섭외와 찬조협찬을 구하느라 동분서주였다.
공연준비와 합주연습이 계속되면서 성과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공연준비 전까지만도 없었던 갈등이 본격적인 공연합주연습에서 불협화음으로 나타났다. 허심탄회한 대화의장이 필요하였다. 문승협의 제안으로 리더 강동우가 자리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의사표현에 소극적이었다. 퍼스트기타 장홍기가 키보드를 언급하자, 하나 둘 속내를 드러냈다. 각자 입장에서 주장이 쏟아졌다.
“키보드멜로디하고 퍼스트기타 애드리브가 중복된께, 사운드가 무자게 난잡하드라.”
“맞어, 원곡대로 키보드코드를 쳐야제.”
“아야 강동우, 니는 공연곡을 베이스기타가 튀는 노래로 정했잖애.”
“뭐가야, 내가 언제?”
“불놀이야랑 어쩌다 마주친 그대도 그렇고, 안 그냐?”
키보드 이민상이 울그락불그락해 사심에 찬 곡선정이라며 지적하였다. 정색한 강동우에게 베이스기타줄을 잡아 뜯어 펑키한 리듬이 반복되는 초퍼주법곡을 예로 들었다. 드럼을 치는 우상호가 끼어들었다.
“그런 거시기가 몇 곡이나 된다고 그라냐, 그 정도는 암시랑 안 해. 그보다 퍼스트기타가 드럼박자 안에서 애들립을 해야 한디, 잘난 체하느라 박자를 무시한께 싸운드가 자꾸 어그러져부러.”
“연설하네, 내가 언제야?”
“퍼스트기타도 그렇긴 한디, 베이스기타가 드럼이랑 엇박자 나는 것이 더 문제여.”
“아야, 원곡에도 없는 난해한 기타 리프는 으짜고야?”
“리드싱어도 말이어, 락을 부를 때는 맥아리 없이 그러지 말고 허스키하게 좀 불러라.”
뽐내고 싶은 현란한 솔로애드리브와 연주테크닉, 전체 사운드와 하모니를 컨트롤하는 이퀄라이저를 자기 악기 중심으로 음량크기를 높여달라는 요구, 서로 돋보이려는 욕심을 대놓고 주장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기싸움이 이어졌다. 가만히 듣던 문승협이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나도 한마디 할게. 너희들 왜 그룹사운드라고 하는지 알아?”
“뭔 소리 할라고 그라냐?”
“오늘 보니까, 왜 그룹사운드가 어려운지 알겠다. 그룹사운드는 전자기타 전자오르간 드럼 등등, 여러 명이 여러 가지 악기를 합주하고 노래하는 거잖아.”
“여그서 그것도 모르는 사람 있냐?”
“그런데, 일렉트릭악기를 다루면서 불화가 있으면, 과연 좋은 음악이 나올까?”
“…….”
“그룹사운드에 어울리는 말은, 희생과 양보, 배려와 조화를 통한 하모니 아닐까? 그룹사운드에 어울리지 않는 말은, 이기심과 욕심, 고집과 독선 독단이잖아.”
“그래서 으짜자고야?”
“내가 뭐 어쩌자는 것이 아니야.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오늘은 갖고 있던 불만들 다 털어놓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그래 그라자, 오늘 싹 다 까놓고 털어 불자.”
멤버들의 격한 감정이 한층 수그러들었다. 차분히 쌓여있는 진짜 불만들을 다시 털어놓았다. 희생과 양보와 배려로 하나하나 조정하였다. 케미가 좋은 부분은 조화와 하모니를 이뤄 시너지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비록 난생처음 여럿이 모여 그룹사운드를 해보겠다는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이지만 타협과 절충을 알았다. 서로 화합하려고 조율하였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신군부정권처럼 독재행태는 없었다. (계속)